영화 공연 나들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

智美 아줌마 2017. 1. 3. 15:10

어휴 ~ @#$% . . . 영화 보는 관객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 소리와 욕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우리나라 공무원들 하는 짓하고 똑같네. 똑같아. 관객들이 영화 보면서 한숨 쉬고 쓰벌놈 욕하며 보는 영화가 나, 다니엘 브레이크이다. 그나마 우리나라 공무원들 민원 처리하는 게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규정이 어쩌니 하며 뭐 해와라, 뭐는 안 된다. 일반 민원인한테는 까다롭게 퇴짜 놓기 일쑤면서 권력 앞이나 자기들 측근이 일 보러 오면 일사천리로 처리해주지 않는가. 그래서 빽이 있어야 세상사는 게 쉽다는 것을 어린애도 다 아는 이치가 되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노력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도 있지만, 열심히 살아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 보면 노력하는데 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고, 열심히 사는데 왜 그렇게밖에 못사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몸이 건강하면 배움이 짧아 변변한 직장도 못 다녀도, 하루하루 날 일 하면서도 가족 부양하고 자식 공부 가르치고 알뜰하게 살면서 집도 장만하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나락으로 떨어져 비참하게 살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고 가난을 원망하며 사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학창시절 월곡동에 살던 급우가 결석해서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학교를 지원해서 가다 보니 거주지와 상관없이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주소를 갖고 월곡동 달동네를 찾아갔더니 허름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좁은 골목길을 다니며 집을 찾다 보니 많은 집 문 앞에 술병이 수북이 쌓인 것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서 저렇게 술 사 먹을 돈으로 저축이나 하지, 왜 저렇게 살까. 저 돈으로 식구들 맛있는 반찬이라도 사 먹게 하지,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

 

옛날 어느 서울시장이 어떤 달동네 시찰을 갔는데 퇴임하고 10년 후에 그 동네를 다시 가게 되어 둘러 보니까 그 동네 사람들 10년 전이나 후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똑같이 사는 것을 보고 가난은 본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라가 도와줘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쓴 글을 읽을 적이 있다. 그래서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못한다고 했나 보다. 요즘 우리나라도 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에 속한다고 한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하게 도움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다니엘 브레이크처럼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지 않게.

 

 

11시 25분에 상영하는 시카고를 보고 오후 3시 10분에 상영하는 나, 다니엘 브레이크를 보기 위해 명동 씨네 라이브러리에 있는 도서관에서 만화책 센과 히치로의 행방불명이 눈에 띄어 봤다. 처음엔 다른 책을 골라 읽었는데 작은 글씨가 빼곡히 있으니까 눈이 너무 피로하고 멀미나는 것처럼 울렁거려서 센과 히치로로 바꿔 봤다. 지난주에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보러 명동 씨네 라이브러리에 왔을 때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입장이 번거로워 그냥 갔는데 오늘은 1시간 반 정도 시간이 남아 들어갔더니 영화 보러왔다가 도서관 이용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2016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로카르노영화제, 산세바스티안 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의 화제작. 15분 간의 기립박수! 전세계 평단과 관객의 절대적 지지를 얻는 필견의 영화, 평범한 이웃에서 특별한 나의 영웅으로 관객을 사로잡을 2016년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현 영국 사회의 부조리한 복지제도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온기와 감동으로 채우는 영화다.

 

 

낯선 뉴캐슬로 이주한 탓에 길을 헤매다 정해진 시간에 단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고용청에서의 상담 기회를 박탈당하는 케이티

다니엘과 케이티는 고용청에서 만난 인연으로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지낸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집에 있는 가구를 다 팔고 버티지만, 절망 뿐인 다니엘

 

굶주림에 지쳐 스파게티 소스 통조림을 따 먹다가 수치심에 우는 케이티를 다니엘이 달래주는 모습

고용청 담벼락에 쓴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라는 '저항'의 표시.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후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 라는 가슴 뭉클한 수상 소감을 전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앞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는 “사람들에게 ‘가난은 너의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잔인함이 문제이다”라는 날선 비판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BBC에서 TV다큐 작업을 시작으로 방송과 영화 두 곳을 부지런히 오가며 다소 거칠고 불편한 사회,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어 온 켄 로치 감독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에는 역부족인 약자들 편에서 관찰자로 때론 대변자로 세상을 향한 일침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

 

어디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건가? 
  
나는 언제나 제 고향에서 넌이튼에서 뭔가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폴 래버티와 함께 거기서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캐롤 갤러퍼라는 친구가 운영하는 자선단체인 ‘도어웨이’의 운영을 조금 돕고 있는데, 그 친구가 나와 폴에게 여러 이유들로 직업을 구할 수 없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일부는 불안정한 임금으로 일하거나 살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젊고 아주 씩씩한 청년이었는데, 우리를 자신의 방에 초대했다. 도어웨이에서 제공하는 공동주택이었는데, 그 친구의 방은 아주 열악한, 디킨슨의 소설에서나 볼 법한 환경이었다. 바닥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냉장고가 하나,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폴은 그에게 냉장고 안을 봐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안 돼요”라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우유도, 비스킷도 아무것도 없었다. 음식 없이 견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지난 주에는 4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건 완전 배고픔 그 자체고, 그는 정말 절박했다. 그는 한 업체에서 일하는 친구의 얘기도 해줬다. 친구는 원래 5시까지 출근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6시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대중교통조차 이용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그에게 업체직원은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15분이 지나서 돌아와서는 “오늘은 일감이 없네요”라고 말했다는 거다. 그 친구는 한 푼도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끝이 보이지 않는 모욕과 삶의 불안정성 같은 것들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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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 모두들 '원칙'대로 하는데도 불행이 빚어지는 아이러니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것이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일견 맞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 '긍정적인' 말에는 냉정한 현실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난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드러낼수록 초라해지기에, 되도록 숨기고 싶은 것이다.  

지난달 8일 개봉한 세계적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도 국가가 제시하는 '기준'에 들지 못해 곤란을 겪는 다니엘(데이브 존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치의가 혹시나 심장 발작이 일어날 지 모르니 좀 더 쉬면서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밝혔는데도, 그는 고용연금수당 자격심사 후 질병수당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아파서 일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충족시키기에 단 3점이 모자랐다는 이유로.

고용청에서 내려온 '의료전문가'와의 단 한 차례 만남이 꾸준히 다니엘의 상태를 봐 온 주치의의 소견보다 앞서느냐는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이후 일어나는 일들도 다 꼬이기만 한다. 그동안 컴퓨터를 다루지 못해도 잘 살아왔던 그는, 질병수당이 끊길 위기를 맞고 나서야 자신이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모든 것이 인터넷에 나와 있는 시대이기에, 별 수 없이 컴퓨터로 구직수당을 신청해야 했던 그는 수차례 실패를 겪는다. 다니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고용센터의 앤이 도움을 주자, 앤의 상사는 "잘못된 선례가 남는다고요"라며 오히려 앤을 꾸짖는다.

우여곡절 끝에 구직수당을 신청했지만 이때도 다니엘은 '내가 열심히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증명해 보이지 못해 '부적격 대상'이 된다.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손으로 직접 쓴 이력서를 돌리고 다녀도, 사진 같은 증거물이 없고 온라인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해진 시간에 단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고용청에서의 상담 기회를 박탈당한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의 상황은 더 나쁘다. 낯선 뉴캐슬로 이주한 탓에 길을 헤맸다는 설명은 공무원들이 내세우는 '원칙' 앞에 무력해질 따름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고,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끼니도 거른 채 과일로 버티지만 오히려 비참한 상황만 자꾸 맞닥뜨리게 된다. 생필품을 나눠주는 센터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통조림을 따 허겁지겁 먹는 장면은 압권이다. 밀려오는 수치심에 울음을 터뜨리고,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음에도 '죄송하다'고 고개숙이는 케이티의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다니엘과 케이티는 고용청에서 만난 인연으로 서로를 돕고 의지하면서 기운을 얻는다. 둘은 종종 이웃들로부터 선의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같은 유대는 끝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분명 세상은 '원칙'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사회에 폐를 끼치지도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던 선량한 시민들은 점점 불행해지는 아이러니.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곁을 돌아보면 정말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국가 시스템의 허점을 짚어내는 영화다.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만든다. 다니엘은 '일자리 부족'이라는 문제엔 눈 감은 채 "눈에 띄십시오. 영악해지십시오. 여러분의 예리함과 성실함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이력서 전문강사의 조언도, '잣대'만 중시하며 사람들이 처한 각자의 곤란함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시스템'도 거부한다.

조금만 비위를 맞추면 구직 수당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앤의 물음에 그는 "나에게 돌아오는 건 수치심뿐이잖소"라며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고 말한다. 대신, 질병 수당 거부 결정에 대해 항고하기로 한다. 고용청 담벼락에 쓴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라는 낙서는 그의 '저항'의 표시다.

하지만 다니엘은 항고 재판 당일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숨지고 만다. 케이티는 다니엘의 장례식에서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줬다"면서 "정부가 너무 빨리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한 후, 다니엘이 항고 재판 때 읽으려고 준비했던 편지를 읽는다. 단지 '한 사람의 시민'이고 싶었던 다니엘이 관객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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