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연 나들이

영화 동주

智美 아줌마 2016. 12. 3. 21:40

영화 동주를 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윤동주 님의 시 한 소절은 기억하고 읊지 않을까. 특히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별 헤는 밤"과 "서시"는 너무나도 유명한 시라서 누구나 한 두 번 이상은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는 시구를 노트에 옮겨 적고 때로는 입가에 맴돌며 읊조리곤 했을 것이다.

 

그만큼 윤동주 님의 시를 접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쉽게 젖어 들어 그 글에 동요된다. 감성 가득한 글귀마다 잔잔하게 여울져 가슴에 스며드는 윤동주 님의 시, 막연하게 시를 읽고 읊었는데 영화 동주를 보면서 나지막히 흘러나오는 시를 듣게 되니까 가슴이 먹먹해지고 가끔 울먹여졌다.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아스라함이 감동의 물결을 일렁이게 하고 빛바랜 추억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좋은 영화 동주를 차일피일 미루다 못 보게 되어 늘 아쉬웠는데 이번에 CGV에서 골든 애그 기획전으로 열흘간 재상영한다고 해서 예매하려니까 서울에는 왕십리, 여의도 신촌점에서 상영하는데 좋은 좌석은 다 매진되고 앞자리와 장애인석만 남아 있다. 앞자리에서 보려면 눈이 많이 피곤하고 불편할 텐데 하며 망설이다 보니 어느새 장애인석만 남고 대부분 앞자리까지 거의 다 매진되었다.

 

에구 ~ 진즉에 예매할 걸 괜히 망설이며 여유 부리다가 또 놓치게 생겼다. 그래서 경기도 지역 상영하는 CGV를 보니까 인천점과 오리역점 두 곳에서 상영하는데 좌석이 여유가 있어 소요 시간을 확인하니까 집에서 가기에는 인천점보다 오리역점이 더 가까워 오리역 CGV로 예매해 놓고 2시간이 걸려 영화 동주를 보러 오리역으로 갔다. 나 미친 겨? 영화 한 편 보겠다고 두 시간이나 걸리는 오리역까지 가다니 말이다. 먼 곳까지 갔지만 그래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되었다. 요즘 영화같이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하니 여운이 남는다. 이렇게 좋은 영화는 꼭 봐야 하니까.

 

 

 

윤동주(일본식 이름:히라누마 도슈,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님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 본관은 파평이다. 중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를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 님은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 님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송몽규 님의 본관은 은진이고 중국 지린 성 룽징 지신 진 명동촌 출생이며 한때 일제 강점기 함경북도 경흥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시인 윤동주 님의 고종사촌 형인 그는 일찍이 만주 룽징 은진중학교 재학 중에 학교 교목이었던 명희조 선생의 주선을 받아 백범 김구 국무령의 예하 지도 편달로 훈련 교습을 주행하던 중화민국 허난 성 뤄양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에 유학 시절 특별고등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1943년 7월 10일에 교토에서 특별고등경찰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이후 교토 제국대학교에서는 제적 조치 처분되었다.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교 문학부 사학과 선과생으로 합격하여 유학을 한다. 그러나 1943년 7월 14일, 한국 유학생 모임에서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한 것을 이유로 송몽규 님은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 책동'이란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의 판결을 받은 송몽규님은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1945년 3월 7일에 향년 29세로 사망하였다.

 

술가락 / 송몽규 1935년(18세)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전문

 

우리 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아- 여보! 어디좀 나가봐요!」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러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外國)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대게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뺨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XX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 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그런 술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이라고 해서(偕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을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자, 먹읍시다.」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지간 동주와 몽규.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두 사람.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 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어둠의 시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윤동주 시인 서거 71주기
시보다 더 찬란했던 그의 청춘을 대한민국 최초로 스크린에서 만난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정직하게 그리고 있다. <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TV나 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던 이준익 감독의 의문에서 출발했다. 윤동주의 시가 어떤 시대와 사람들을 거쳐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온전히 스크린에 담고 싶었던 이준익 감독의 바람은 영화 <프랑스 영화처럼>, <조류인간>, <배우는 배우다> 등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이 각본을 맡으면서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가장 움직인 것은 죽어서야 시인이 될 수 있었던 윤동주의 삶, 그 자체였다. 특히 신연식 감독은 "윤동주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시인이 되지 못한 청춘이었다. 동시대에 인정 받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시가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며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수의 시인 중 유독 윤동주의 삶에 이끌렸던 이유를 전했다. 이후 무언가 이루고 싶었지만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젊은이, 청년 윤동주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었던 두 사람은 그의 삶을 따라 가며 청년 ‘동주’의 작품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주목했다.

 

그리고 정들었던 고향을 떠날 때와 창씨 개명을 선택해야만 했던 연희전문학교 시절 등 ‘동주’의 생애 가장 중요한 사건들과 맞물리는 시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며 그의 작품이 더욱 가슴 깊이 남을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영화사상 최초로 시인 윤동주의 삶을 스크린에 옮겨내며 "윤동주 시인의 시에 부끄럽지 않게 찍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준익 감독의 굳건한 포부처럼 영화 <동주>는 화려한 기교나 과장 없이 진실하고 정직한 이야기로 관객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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