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 산행 셋째 날
지리산 종주 산행을 계획하면서 여기저기 품 팔아가며 정보를 얻고는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노고단 대피소에서 1박하고 다음 날엔 연하천 대피소까지 가서 1박,
그리고 셋째 날에는 꿈도 야무지게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서 1박 하여 3박 4일 일정으로 종주 산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나 같은 거북이걸음으로는 정말 3박 4일도 버거워서
이젠 거북이도 못 되는 자라라고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에구 ~ 이젠 난 거북이도 못 되는 자라다.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보다 늦게 출발하여 늦은 시각에 도착하게 된 이유도 있지만,
워낙 저질 체력으로 남들 정도의 스피드로 이동할 수 없는 이유가 가장 큰 이유다.
남들은 성큼성큼 올라가는 계단도 나는 서너 개, 네댓 개만 올라가도 숨이 차서 쉬어야 하고
대부분이 혼자 다니다 보니 행여 다치는 불상사가 있을까 너무 몸 사리며 조심조심 다니는 이유도 한 몫 거든다.
그리고 셋째 날, 연하천 대피소에서의 출발은 화장실 가는 문제로 출발이 늦어졌는데
예민한 성품이라 산에 오면 화장실 볼일을 보는 게 늘 문제라
변의가 느껴지지 않아도 산행 중에 급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에 화장실을 자꾸 들락거리게 된다.
출발하려다 괜스레 서너 번을 들락거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8시가 다 되어갔다.
이런 ~ 길이 먼데 또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전날과 비슷한 시각에 출발하는 것 같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벽소령 대피소까지 3.6km, 세석 대피소까지 6.3km, 장터목 대피소까지 3.4km 총 13.3km라
전날 노고단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 12.5km를 오면서 날이 어두워져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걸어야 했는데
셋째 날에는 길이 1km 정도 더 길어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는 것은 또 야간 산행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장터목 대피소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 세석 대피소 2km 전 지점에서 장터목 대피소에 전화해서 사정을 말하고
세석 대피소로 예약 변경 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인터넷으로 처리된 것이라 임의로 사무실에서 변경할 수 없다고,
세석 대피소에 도착하면 직원에게 말하고 세석 대피소로 예약, 다시 결재하라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그럼 장터목 대피소 예약 건은 취소가 됩니다, 했다.
그렇게 장터목 대피소 직원과 통화한 시각이 2시 반쯤이었고, 이젠 한결 여유 있게 세석 대피소로 간다.
그런데 평일이긴 하지만, 지리산 산행은 참, 사람이 그리운 산행을 해야 한다.
종주 산행이다 보니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 또 내가 가는 방향에서 반대로 오는 사람이 드문드문 한두 사람씩 지나갈 뿐,
산악회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긴 해도 지리산 산행 중에는 늘 사람이 그립다.
땅에 떨어져 쌓인 갈잎에 도토리가 틱, 틱 떨어지는 소리가 꼭 사람이 스틱을 찍으며 오는 소리로 들리고
사그락사그락 산에서 들리는 소리가 사람들 두런대며 오는 소리같이 들려 자꾸 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다른 구간도 마찬가지지만, 연하천 대피소에서 벽소령 대피소 가는 길은 암릉 구간이 여러 곳 있어
벽소령 대피소에서 세석 대피소가는 길보다 짧지만, 내가 더 벅벅대며 산을 타야 했다.
나는 암릉 구간만 나오면 잡는 손힘과 딛는 다리의 힘이 약해 네 발로 기어오르고 엉덩이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등산화 신고 딛는 것이니 팍팍 딛어도 미끄럽지 않는데 왜 그렇게 겁을 먹고 살금살금 밖에 못 걷는지,
다행히 북한산 문수봉처럼 길게 암릉을 타야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암릉 구간은 내게 쥐약이다. ㅎㅎㅎ
그렇게 혼자 벅벅대며 산을 오르는 중에 뒤따라오던 광양에서 왔다는 아이 아빠를 만났는데
직장에서 야간 일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산행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쉬엄쉬엄 간다며
내가 힘겹게 혼자 가는 것을 보고 힘들 때 동행인이 있으면 덜 힘들게 느껴진다며 내 페이스에 맞춰 동행해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고 좋지만, 젊은 남자가 나 같은 거북이랑 동행하는 건 답답해 숨넘어갈 텐데, 하니
어차피 본인도 몸 상태가 안 좋아 평소같이 빨리 가지 못하니 쉬엄쉬엄 같이 가자고 했다.
뜻하지 않게 고마운 인연을 만나 암릉 구간을 오를 때도 뒤에서 지켜 봐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고
가파르게 높은 곳을 치고 올라가야 할 때는 밑에서 한 템포 쉬었다가 오르면 조금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다는
산행 중의 도움되는 요령이나 정보도 알려주고, 힘들게 오른 후엔 잠시 앉아 쉬거나 풍경 좋은 곳에 머물기도 하고
이야기하며 가는데, 설령 여유 부리다 어두워진다고 해도 든든한 동행인이 있다는 안도감에 정말 편한 마음으로 쉬며 걸었다.
여유 있게 놀며 쉬며 걷다 보니 드디어 세석 대피소에 5시 30분 조금 넘어 도착했다.
지난 5월에 세석 대피소에 온 후, 두 번째로 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산철쭉과 야생화가 세석 평전을 물들여
무릉도원이 이보다 아름다울까 했더니 이번엔 울긋불긋 단풍 들 때 다시 오게 되었다.
이제 어두워지기 전에 먼저 저녁을 해먹기로 했는데 아이 아빠는 산에서 계속 라면만 끓여 먹었다고 해서
얼른 밥도 짓고 김치찌개도 끓여서 같이 먹자고 하고는 스팸, 참치, 미트볼까지 남은 재료 다 넣고,
만들어 간 얌념장으로 간을 맞춰서 보글보글 끓여 먹으니 혼자 먹다가 고마운 사람과 함께 먹으니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아이 아빠도 계속 속이 쓰렸는데 아픈 것도 사라지고 진수성찬이라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아이 아빠는 다음 날 일찍 천왕봉 찍고 대원사로 하산한다며 어두울 때 출발한다고 미리 인사하고 숙소로 들어갔다.
정말 고마운 인연이라 밤에 화장실 갈 때, 조심히 잘 가라고 아이 아빠 등산화 속에 메모를 남겼는데
메모지가 없어 대피소에서 준 초록색 영수증에 글을 써서 등산화 안에 넣어뒀더니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안타깝게도 글은 못 보고 그냥 신발장에 빼 놓고 간 것 같았다.
아이 아빠, 혹시 인연이 닿아 내 블로그에 들어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흔적 남겨주고 가세요.
동행해줘서 정말 고마웠고, 덕분에 행복한 산행 되었어요.
아이 아빠도 무탈하게 하산 잘 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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