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연 나들이

오페라 토스카

智美 아줌마 2016. 10. 16. 13:16

10월 2일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고 온 후 2주 만에 다시 가는 예술의 전당,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거리마다 사람들이 많아 복잡하다. 남부터미널역에 도착해 버스 정류장으로 올라가니까 바로 셔틀버스가 도착해서 기다림 없이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예술의 전당 앞 가로수는 어느새 빨갛게 단풍 들어 예쁘게 줄지어 서 있다. 완연한 가을이 되었네. 폭염으로 지치게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가을 깊은 곳에 와 있구나. 이젠 가을도 머지않아 가고 겨울이 오겠지. 계절은 알게 모르게 우리 곁을 맴돌다 세월과 함께 떠나간다.

 

오늘 볼 오페라 토스카 포스터가 외벽에 붙어있다.

다음에 볼 공연은 로엔그린인데 이 작품은 처음 보게 되는 것이라 기대되는 작품이다.

오페라 토스카의 포토월

오늘도 인증 샷!!

 

토스카 공연이 있을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

커튼콜 촬영

 

카를로 몬타나로 지휘자께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에게도 인사와 갈채를 보낸다.

 

 

 

장서가였던 사르두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와 테르미도르 반동, 나폴레옹 집권기 등 프랑스의 역사적 사건에서 작품의 소재를 즐겨 찾았다. 특히 당대 유럽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를 캐스팅한 연극 [토스카]는 1887년 초연 이후 프랑스에서만 3,000여 회 공연할 만큼 대대적인 인기몰이를 했다. 작곡가 푸치니가 밀라노에서 이 연극을 관람한 것은 1889년이었다. 당시 공연에도 베른하르트가 출연했다. 작품의 탄탄한 구성과 극적 긴장감에 깊은 인상을 받은 푸치니는 오페라 작곡을 위해 필요한 판권 계약을 출판업자에게 의뢰했다. 하지만 작곡 과정은 난산에 가까웠다.

 

원작자인 사르두는 고국 프랑스의 음악가가 아니라 당시 31세의 이탈리아 작곡가가 곡을 쓴다는 것이 못내 미심쩍었다. 푸치니의 단짝 대본 작가였던 주세페 자코사와 루이지 일리카도 오페라에 잘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이 작품은 푸치니가 아니라 동료 작곡가 알베르토 프란체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푸치니는 “잔인한 작품”이라면서 포기를 종용했고, 프란체티는 순순히 작품을 푸치니에게 내주고 말았다고 한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오페라 작곡의 이면에도 [토스카] 못지않게 음흉한 공작이 깔려 있었던 셈이었다.

 

1894년에는 오페라 대본 작가들이 사르두의 허락을 받기 위해 파리로 찾아가 대본을 낭독했다. 당시 오페라 [오셀로] 공연을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여든 살의 작곡가 베르디도 낭독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일리카에게 대본을 건네받아서 작품을 읽어본 베르디는 “내 나이만 아니라면 [토스카]를 직접 작곡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를 완성한 직후였다. 베르디는 7년 뒤인 1901년 타계했다.

오페라는 23명에 이르는 희곡의 등장인물을 9명으로 과감하게 줄이고, 원작의 5막을 3막으로 압축하면서 속도감을 높였다. ‘2시간 안으로 작품을 편집한다’는 할리우드 영화의 숨은 공식처럼, [토스카]도 전체 3막을 2시간 안에 공연하면서 파국으로 빠르게 치닫는 흥행 공식을 철저하게 따랐다. 요컨대 [토스카]는 감독의 고집으로 빚어낸 예술 영화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오페라의 ‘블록버스터’에 가까웠다.(지식백과 발췌)

 

 

오페라 <토스카>의 2막 6장에 나오는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Vissi d'arte vissi d;amour'를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