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선덕여왕릉 추향대제

智美 아줌마 2016. 9. 22. 14:42

 

교촌 마을을 돌다 보니 어느새 선덕여왕릉 제례 시간이 되어간다. 교촌 마을 바로 앞에서는 버스가 없다고 해서 관광 안내소 해설사께서 택시를 불러주셔서 선덕여왕릉까지 택시 타고 갔다. 요금이 8천 원 가까이 나왔는데 기사 아저씨한테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니 여기서 더 들어가면 차를 돌려 나오기가 불편하다며 이곳에서 내려줬다. 감사!!

 

 

선덕여왕릉은 둘레가 73m가량의 원형 봉토분이며 사적 제182호이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큰딸로 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16년 간 신라의 왕으로 재위하면서 후일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 명장 김유신과 같은 인물을 거느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았다. 또 분황사, 첨성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워 신라 불교건축의 금자탑을 이룬 인물이다. 선덕여왕릉의 위치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여왕의 능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조에 “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예언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 날이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했는 바,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고 하였고, 『삼국사기』 선덕왕조에도 “낭산에 장사지냈다. ”고 하였으며, 현재 왕릉의 남쪽 아래에는 사천왕사지가 있어 이러한 기록들과 일치된다.

 

큰길에서 선덕영왕릉까지 거리가 200m 정도라고 되어있는데 택시에서 내려 릉을 찾아가는 길엔 소나무가 많은 숲길이다.

 

 

1949년에 능을 수축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신라 선덕왕릉 봉수 기념비

 

바삐 걸어갔더니 다행히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선덕여왕의 제향에는 많은 여자분이 활옷을 입고 있다. 활옷은 조선시대 후기에 공주나 옹주의 혼례복으로 입던 예복. 조선 말에는 일반 서민도 혼례용으로 입었으며 오늘날에도 혼례시 폐백복으로 입어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운데 하나이다. 활옷은 붉은색의 겉길에 청색의 안을 넣어 만드는데 이는 남녀와 우주의 음양을 상징한다. 또, 겉길에는 연화·모란·봉황·원앙·나비와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의 문양 등을 수놓아서 대단히 화려하고 좋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 가체머리를 한 세 분도 있는데 가체머리는 고려시대 중기 원나라에서 온 가체 양식이 여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명제 궁양의 수식을 받은 가체로 고대 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부녀자들은 조선 중기까지 궁중에서 일반 서민 부녀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체로 꾸민 머리 형태를 즐겼다. 조선시대 머리 양식에서 자주 논의되는 것이 ‘체계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체계는 가체로 꾸미는 것으로 자기 머리카락과 함께 다리, 다래, 월자, 차, 수체, 달비, 체자를 넣어 덧붙어 꾸미는 것으로 가체에 소용되는 비용이 과하여 가체 하나의 값이 20냥(당시 황소 한 마리 값)에서 중인 열 집의 재산을 넘는 고가로 사회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체의 풍습은 신라 때에도 있었는데 가체를 몽고 풍속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고대의 몽골에도 우리와 같이 가체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가체가 부녀자 머리 모양의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고 영조 때를 전후하여 크게 성행하였다. 그러나 가체의 사치가 극도로 심해짐에 따라 1788(정조 12)년 10월 국법으로 금하는 한편, 사대부 처첩 이하의 결발 양식도 제정하였다고 한다.

 

 

제례 방식은 모르지만, 선덕여왕께서 여자분이라 그런지, 미추왕릉이나 내물왕릉에서 지내던 제례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먼저 삼헌을 하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세 분이 삼배를 먼저 하신다.

 

그리고 붉은 활옷을 입은 여자분이 먼저 들어와 삼헌을 한다.

 

 

마주 보고 인사를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여자분 중에 붉은 활옷 입은 분과 푸른 활옷 입은 두 분이 있는데 아마 남자분과 마찬가지로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과 같은 직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살다 보니 이런 제향을 볼 기회가 없어 아쉽다.

 

 

 

 

 

 

 

 

 

 

 

 

 

 

 

 

 

 

 

 

 

지난 달 무안, 담양 여행 때 생긴 발에 물집이, 이번 경주 여행에서도 또 생겨서 첫날부터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보니 많이 힘들어 제향을 보다 아래서 사람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나도 내려갔다. "아이고, 이 아지매 여기까지 왔네. " 하시며 내물왕릉에서 몇 마디 건낸 부산에서 오셨다는 할매 두 분이 반기시며 옆에 앉으라고 자리를 가르키신다. 미추왕릉이나 내물왕릉의 제향을 봤으니 선덕여왕의 제향도 봐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택시 타고 쫓아왔다고 하니, 그렇게 관심 가져줘서 고맙다고 하신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점점 관심이 없어진다며 걱정하셨다.

 

그건 할매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오늘 제향에서도 보면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 주관하시기는 하지만, 다음 대를 이어 제향을 모실 젊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전통을 이어가려면 다음 세대에게도 참여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할매 두 분과 얘기 나누다 보니 찌푸리고 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우산이야 있지만, 큰길까지 나가 버스를 타야 하므로 먼저 간다고 인사하고 내려왔다. 올 때는 교촌 관광 안내소에서 전화해줘 택시 타고 왔지만, 갈 때는 버스를 타야 해서 비가 더 오기 전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야 할 것 같아 부지런히 내려가는데 마침 아기 안은 부부가 차를 타려고 해서 시내 방향으로 가면 좀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흔쾌히 타라고 한다.

 

서울에서 경주 여행 왔다가 미추왕릉 참봉 어르신께서 오늘 제향이 있다고 알려주셔서 참관하게 되었다고 하니, 본인은 어머니께서 제례 참여 중이셔서 보러 왔다고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가는데 다음에 갈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기에 안압지를 가려고 하니까 버스 타기 쉬운 곳에 내려주면 된다고 했는데 지나가는 길이니까 안압지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다음 여행지까지 편히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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