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경주 향교

智美 아줌마 2016. 9. 22. 12:11

 

경주 향교는 고려시대 때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이 자리는 신라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하고 신라 월성 동궁 임해전의 석재를 이용해 지었다고 한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과 전사청을 다시 지었다.

 

이어서 선조 37년(1604)에 동무와 서무를 짓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더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이다. 대성전은 앞이 3칸이고 옆이 3칸인 맞배지붕으로 위엄이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인 겹처마 맞배집이다.

 

 

경주 향교 외삼문, 내물왕릉의 추향대제를 보고 바로 옆에 있는 교촌 마을의 경주 향교를 먼저 갔다. 관람객의 출입문이 주차된 차들로 인해 못 보고 지나쳐 국립공원 관리소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밑으로 내려가 돌아가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려가 돌아가니까 닫혀있는 외삼문이었다. 도대체 들어가는 문은 어디 있는 데 이리로 가라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다가 주민인 것 같은 사람이 지나가기에 물어보니까 왔던 방향을 가리키며 다시 돌아가면 있다고 한다. 향교의 위치를 물었으면, 돌아가면 외삼문이 있고 관람을 하려면 바로 아래 주차된 차들 사이에 출입문 있다고, 한 마디 더 보태 말해주면 덫 나나? 아무리 점심시간이라 밥 먹는 게 급하다고 해도 그렇지, 명색이 국립공원 관리소 직원이 아닌가.

 

주민이 알려줘서 관람객이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들어간다.

 

문으로 들어가니까 우물이 바로 앞에 있고 관리사인 것 같은데 예전엔 우물이 있는 이곳이 요석궁 일부라고 한다. 요석궁은 요석공주와 원효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원효는 34세 때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불법을 배우러 떠났다가 요동 땅에서 고구려 군사들에게 첩자로 붙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온다. 10년 후 다시 의상과 함께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던 중 깊은 산 속에서 폭풍우를 만나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이때 해골에 담긴 물로 도를 깨치고 혼자서 신라로 돌아와 화엄경을 쉽게 주석하고 거지 행세를 하며 포교를 하던 중, 어느 날 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가 하늘 떠받칠 기둥을 박으리"라고 노래 부른다.

 

태종 무열왕만이 이 노래의 뜻을 눈치채고 아마도 이 스님은 귀부인을 만나 훌륭한 아들을 낳길 원한다.는 생각에, 마침 요석궁에서 과부가 되어 홀로 사는 둘째 딸을 생각하고 궁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이 흐르는 문천교(월정교)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궁리를 보자마자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고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게 하고 쉬게 했는데 원효가 3일 쉬고 떠난 후 요석공주는 태기가 있어 660년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 당시 요석공주는 남편 김흠운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청상과부로 궁을 지키고 있었다. 후에 설총은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손꼽힌 대학자로 활동했다.

 

요석공주와 관련된 사료와 내용들이 많지 않아 그의 인물적 성격을 파악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으나 현재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의 소요산 관리사무소 동쪽 약 20m 지점에 ‘요석공주별궁지()’라고 쓰인 작은 표지석이 세워진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요석공주가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소요산에서 아들 설총과 함께 기거하던 터라고 한다. 요석공주는 소요산에 초막을 짓고 수행하던 원효를 따라와서 수행처 근처에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기거하며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소요산 자재암에는 원효와 요석공주와 관련된 곳들이 많은데 그 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공주봉은 요석공주를 위해 원효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표지석이 있는 자리가 정확한 별궁지가 아니라고도 하는데 그 예로 조선지에는 ‘바위골짜기 평평한 터에 두 군데의 옛 궁터가 있다. 예로부터 요석공주의 궁터라고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소요산기에는 요석공주 궁지는 ‘원효폭포에서 서북쪽 80장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서재, 관리사에서 더 들어가니까 서재와 동재, 그리고 명륜당이 있다. 평지에서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있는 전묘후학의 배치다.

명륜당

 

동재

동재 마루

존경각

 

 

 

 

서무

 

 

동무

내삼문

내삼문에서 본 외삼문

처음 돌아가서 본 밖의 외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