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발굴지와 석빙고를 둘러 보고 신라 왕궁 영상관에 들어가 쉬면서 자료 영상을 본 후, 이제 안압지, 동궁과 월지로 간다. 선덕여왕릉에서 아기 아빠가 이곳 동궁과 월지 앞에 내려줘서 바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야경까지 보려면 시간이 어중간해서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시간이 맞을 것 같아 그리할까 했으나 그럼 입장료를 한 번 더 내야 한다고 해서 월성과 석빙고를 먼저 다녀오게 되었다.
동궁과 월지 매표소 입구
동궁과 월지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발굴터의 복원한 건물
오른쪽이 제 1 건물과 제 3 건물
오른쪽 제 3 건물과 제 5 건물
경주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 서쪽에 있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로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이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 묵객들이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이 곳을 기러기 '안'자와 오리'압'자를 써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후 1980년대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이 곳이 본래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지'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 되어 '안압지'라는 이름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월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 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680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서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어느곳에서 바라보아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예지가 돋보인다
제 1 건물
제 3 건물에는 발굴 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 3 건물
동쪽 연못
서쪽 연못
제 1 건물
제 3 건물
서쪽 연못에 있는 제 5 건물
제 3 건물과 제 5 건물
왼쪽부터 제 1 건물, 제 3 건물, 제 5 건물
동쪽 연못에는 노랑어리언이 가득 피어있다. 그리고 가물어서인지 안타깝게 녹조도 많이 끼어있다.
동궁터 연못 건너 산책로에는 쉴 수 있는 의자가 여러 곳 있어 월지 한 바퀴 돌고 한적한 곳에 누워 월지에 조명이 들어오기 기다리며 한숨 깜박 잤더니 개운하다. 야간열차 타고 오면서 잠을 못 자고 내려와 온종일 왕릉 제향 보러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더니 너무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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