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강원도 여행 중에 들른 설악산
등산 장비는커녕, 불망 레이스 셔츠 차림에 운동화 신고 물이나 비상식량도 없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렇게 처음 설악산과 연을 맺게 되었다.
산에서의 거리 개념이 없던 시절, 흔들바위까지 1, 5km, 울산바위까지 또 1. 5km면 얼마 안 되잖아?
자동차 거리를 생각하고 까짓거 그 정도면 갔다 오지 뭐. 그렇게 설악산을 만만하게 보고 올라갔다가
공포의 808계단 앞에서 진퇴양난의 귀로에 서서 갈등하였지만, 포기가 안 되더란 말이지.
그래서 무모한 짓인 줄도 모르고 울산바위 정상 태극기 휘날리는 곳에 운동화 발을 딛게 되었으나
초주검 상태로 다리가 꼬여 내려오게 되었고 그래서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 설악산을 만나고 난 후, 2011년 6월 또 속초 여행길에 암각문이 있는 설악산 비선대를 가게 되었는데
어라? 비선대에서 마등령까지 3. 5km네. 울산바위 올라가는 정도의 거리니까 올라가 볼까?
그런데 그 올라가 볼까? 라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를 그때는 몰랐었다
그 날도 운동화 신고 물과 먹거리도 없이 그렇게 무식하게 마등령에 올랐고
6월의 설악산 마등령은 나를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았으며, 산 아래서 먹다 남은 물은 진작에 바닥나
더위와 갈증으로 아사 직전에 도달하게 되어 쉬고 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공룡능선을 타고 마등령에서 비박하고 내려오는 두 분을 만나 꺼져가던 내 생명의 등불을 희미하게나마 다시 밝힐 수 있었다.
하산 중이라 물과 비상식량이 다 떨어진 상태라 챙겨 주지 못한다며
두 분에 남아 있는 물을 내 병에 다 옮겨 담아 주고 사탕, 초코릿 서너 개와 커피 믹스 두 개를 주고는
사탕 다 먹고 나면 커피 믹스 설탕이라도 그냥 먹으라며 일러주고는 두 분은 비선대 방향으로 내려가고
무식해서 용감한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마등령을 넘어 오세암, 영시암을 거쳐 백담사로 내려갔었다.
내려가면서 오세암, 영시암에서 공양을 받고 답례로 보시 3만 원을 넣고 왔는데
요즘에는 국수 공양을 하지만, 당시 영시암에서는 녹두 흰죽 공양으로 그때 맛있게 먹었던 녹두 흰죽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개고생을 해놓고도 이상하게 설악산이 자꾸 눈에 아른거려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늘 여행만 다니다 보니 등산용품 하나 없어 등산화, 등산용 배낭 등을 장만해서 다시 설악산을 찾게 되었는데
그렇게 설악산을 만나러 다니다 보니 사계절 법정 탐방로 코스를 다 누비게 되었고
힘들다는 공룡 능선, 서북 능선 귀때기청봉까지 내 발 도장을 콩콩 찍고 왔다. 아자아자!!
그래서 작년부터 지리산을 가자, 하고 지리산 공부를 하였으나
눈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위험할 수 있는 산행보다 여행지나 다니고 북한산 둘레길을 다녔는데
북한산 둘레길 21구간 한 바퀴를 다 돌게 되어 올부터는 다시 지리산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막상 지리산을 살펴보니까 지리산은 설악산같이 대청봉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최정상 천왕봉이 한쪽에 있고 사방팔방으로 길게 산자락이 뻗어있어
설악산 대청봉을 매번 오를 수 있는 것과 같이 지리산 천왕봉은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럼 대피소를 중심으로 올라갔다가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잡고 다니자고
먼저 백무동에서 장터목 대피소 1박하고 천왕봉을 넘어 중산리로 하산하는 일정을 세우고 출발했다.
그런데 백무동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고약하던지, 올라가면서
"지리산 너, 뭔 산이 그러냐? 어떻게 계속 돌계단을 치고 올라만 가라고 하니? 다시는 너 보러 오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지리산을 원망(?)하면서 올라갔는데
남들 4시간이면 올라간다는 백무동 길을 나는 장장 7시간 걸려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였다.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거북이라 남들 3시간 걸린다면 난 5시간 넘게 잡고 출발하니까
내 페이스대로 제대로 올라간 것이니 많이 늦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 그럼.
나는 폐활량도 달리고 저질 체력이지만, 정신력 끈기로 버티고 올라가는데
게다가 보물찾기하며 올라가다 보니 남들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지리산은 오르내리는 길이 어려워 종주 코스 산행을 하나보다. 나도 종주 코스 산행을 계획해 봐야겠다.
그런데 백무동으로 오르는 중에 보물을 많이 찾으며 올라갔다면 지리산 원망을 덜 했을지도 모를 텐데
내가 찾은 보물은 설악산에서 본 것보다 큰 천남성과 금강애기나리, 개별꽃, 얼레지, 산괴불주머니 등이었고
이 맘때 설악산에서 보던 야생화는 눈에 띄지 않아 많이 두리번거리며 찾으며 올라갔으나
일찍 왔다 갔는지, 아니면 너무 깊이 숨어있는지, 아직 세상 빛을 보러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얘들아, 어디 있니? 다음에 갈 테니까 예쁜 모습 보여줄래?
그렇게 지리산을 원망하며 올라갔지만, 역시 산은 힘들게 올라온 것에 대한 보상은 서운하지 않게 해준다.
그 대가를 받은 나는 다음 주에 세석 대피소, 6월에 백소령 대피소를 예약해 두고 있으므로
"지리산 너 보러 다시는 안 가고 싶어. " 했지만, 또 힘들게 내가 지리산 너를 만나러 기꺼이 갈 것이다.
기다려라, 지리산아 내가 또 너를 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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