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관

智美 아줌마 2016. 2. 28. 18:00

안목 해변 커피 거리에서 솔향 온천 도착 후, 온종일 발품 팔며 고생한 몸을 따뜻한 물로 여독을 풀고 찜질방 수면실로 가서 바로 잠자리에 누었다. "엄마, 몇 시에 일어나야 해?" "허난설헌 기념관이 9시 문을 여니까 아침 먹고 가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아침은 초당 마을로 가서 두부 요리 먹자." 하고는 문 살짝 여닫지 않고 쿵쿵 여닫는 매너없는 사람들로 인해 몇 번이나 잠을 설쳤지만, 한 달 넘게 방콕 생활하다 모처럼 여행이라서 그런지 그렇게라도 깜박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챙기고 솔향 온천을 나오니 7시 40분이 되었다. 아침 식사 되는 식당이 있을까? 여행지라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하며 초당 마을로 갔다. 초당 마을 길 양쪽 식당마다 영업하고 있었고 순두부와 청국장을 한다고 쓰여있다. 우리 가족은 청국장 냄새가 싫어 먹지 않는데 식당 안에 들어가면 냄새 안 날까? 염려하며 어떤 집이 맛있을까? 식당 앞을 지나면서 검색하니까 그다지 평판이 좋은 식당이 없다. 그나마 차현희 농촌 순두붓집이 괜찮다는 글들이 올라와 있어 그곳으로 갔는데 이른 시간인데도 여러 팀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린 뭘 먹을까? 이왕이면 좀 괜찮은 걸 먹자고 1인분에 만 4천 원 하는 낙지 순두부 전골을 시켰다. 둘이 먹기에는 양이 많았지만, 생선구이와 조림까지 다 먹고는 무거운 배를 두 다리가 힘겹게 받쳐 들고 씩씩거리며 허난설헌 기념관을 걸어서 찾아갔다.

 

 

안목(강릉항)에서 버스 104, 105, 200, 222, 223번 버스를 타고 초당 분수공원 앞 하차 후, 초당 마을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면 경포 솔향 온천이 나온다. 버스는 5정거장이고 하차 후 도보 580m인데 승용차로 갈 경우 경포대 쪽으로 가면 안 되고 초당 마을 쪽으로 가야 한다. 요금은 만 원

 

 

솔향 온천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우리가 사다 먹는 초당 두부 공장이 여기 있구나.

초당  두부 마을의 차현희 농촌 순두부집에서 아침을 먹고 허난설헌 생가를 찾아 간다.

강릉에 여러 번 다녀왔지만, 소나무가 많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곳곳에 강릉은 솔향의 도시라고 써있었구나.

허난설헌 기념관을 가려면 ↑위 버스 종점 초당 마을에서 내려 걸어가면 멀지 않고 206, 207번 버스는 강릉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내리면 된다.

초당 순두부 마을에서 허난설헌 기념관 가는 길에 두부 만드는 과정 10-10 벽화가 있다. 주차된 차로 인해 옆으로 비켜 찍었다.

 

 

 

 

 

 

 

 

 

계속 걸어가며 단계별 벽화를 찍었는데 "엄마 10-10 찍었어? 10단계라고 되어있는데? " "아니, 못 본 것 같은데" 했더니 다시 되돌아 가 보자며 앞장 서 가더니 10-10단계 벽화를 찾아준다. 못 찍어도 그만인데 귀찮아 하지 않고 챙겨주는 딸이 고마웠다.

 

남의 집이지만, 한옥 선이 참 예쁜 집이었는데 관리가 제대로 안 된 것 같아 아쉬웠다.

어째, 하늘이 시원잖네. 산뜻하게 개이면 좋겠는데 . . .

 

허난설헌 기념관 앞에 도착. 주차장 부근에 지도에는 홍길동 박물관이 표시 되어 있어 주변을 살펴 봐도 안 보인다. 길을 쓸고 계신 어르신께 여쭈어 보니 모르신단다. 나중에 기념관 직원 아짐한테 물어 보니까 벌써 없어졌고 삭제 요청했는데 아직도 지도에 나오더냐고 되묻는다.

 

 

허난설헌 솔숲은 2010년 민간 환경 단체인 생명의 숲과 유한킴벌리, 산림청이 공동 주관하는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과 '아름다운 누리상'을 수상하였다. 매년 봄과 가을에 이곳에서 허난설헌 문화제와 허균 문화제를 개최하여 두 문인을 기리고 있다.

 

 

2001년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터는 아름다운 솔숲을 지나면 나타나는 전형적인 사대부가 한옥의 형태이다. 솟을대문과 야트막한 담장 안에 대청과 사랑채 안채 등이 있고 우물과 방앗간 옆으로 좁은 문을 두어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남녀의 구분을 두었다. 안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매화나무가 아름답게 자란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로 지정된 곳이다.

 

우물

 

 

사랑채

 

 

향나무

향나무와 배롱나무

향나무

 

교산 허균은 선조대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 사상가·개혁가였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해 갔지만 허균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은 흔하지 않다. 허균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었고 그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마침내 광해군 10년(1618) 역적의 혐의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자료는 한결같이 허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만큼 허균은 개성이 강하고 과격하며 독단적인 성향의 인물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매우 위험하고 부정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시대에 허균 같은 개혁 지향적인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허균이 살았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는 조선 사회가 보수와 혁신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시기였으며, 허균은 이러한 시기에 혁신의 길을 택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허균은 1569년(선조 2)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허성과 중형 허봉은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학과 문장, 외교 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허균에게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다섯 살 위의 누이 허난설헌이 있었다. 난설헌은 일곱 살부터 시를 훌륭하게 지었다고 소문이 났으며 여자 신동이라고 불렸다. 허균이 태어난 곳은 외가인 강릉으로, 그 동네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는데 마치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부터 교산(교는 이무기란 뜻)이라 불렸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으나, 묘하게도 자신의 이상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처형된 그의 삶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연상시킨다.

 

허균은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학문적 재질을 발휘했지만 그에 대한 당대 및 후대의 평가는 철저히 부정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역모 죄로 처형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에게 내려진 실록의 평가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허균이 얼마나 기피 인물로 낙인찍혔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

그 몸뚱이를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찢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

그의 일생에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 『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윤4월 29일 』

 

 

허균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 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역모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는 허균에게는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은 '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개는 1678년(숙종 4년)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밋거리도 낳고 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만은 유일하게 신원 되지 않아 대한제국이 망하던 시점까지 복권되지 않고,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아저씨 한 분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다. 추위를 녹이려고 가끔 불을 지피기도 하는데 장마철에 습하지 않게 불을 때기도 한다고 한다.

 

 

 

 안채 문

 

안채 문 안쪽에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이것은 뭔가? 관람객들 손 씻으라는 수돗가라고 하지? 참으로 개념없는 졸속 행정이다. 이런 고택에 이런 시설물이 웬말인가?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발상인지 개탄스럽다. 생가가 놀이공원 시설물도 아닌데 후손들이 볼 때 이런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 의문이고 복원을 한다는 것은 고증을 거쳐 원형에 맞게 복원하고 문화재답게 제대로 보존,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허난설헌은 초당 허엽(1517~1580)의 딸로 서당 김성립의 부인이며 교산 허균(1569~1618)의 누이다. 당대 문벌가에서 자란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도 능해 8세에 그 유명한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여신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유교적 윤리와 제도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중국이 아닌 조선에서 태어난 것과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이백이나 두목지 같이 출중한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세 가지 한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난설헌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난설헌의 시가 역시 허씨 가문에 비견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김성립은 결혼 후에도 급제를 하지 못하다가 난설헌이 사망하던 해인 28세에 기축증광시의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난설헌은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남편 김성립과도 불화했다. 김성립은 과거시험준비를 구실로 강가에 집을 짓고 따로 생활했기 때문에 사실상 부부간의 정을 누리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난설헌의 시에는 남편에 대한 원사가 많다.

 

寄夫江舍讀書(기부강사독서)

燕掠斜簷兩兩飛(연략사첨양양비) 제비는 비스듬한 처마에 쌍쌍이 날아들고

落花撩亂拍羅衣(낙화료란박라의) 떨어지는 꽃잎은 어지러이 비단옷을 스치네

洞房極目傷春意(동방극목상춘의) 깊은 규방에서 멀리 내다보며 봄뜻을 잃었는데

草綠江南人未歸(초록강남인미귀) 강남에 풀 푸르러도 임은 돌아오지 않네

 

이 시는 중국 『역대여자시집』과 『명시종』에는 실려 있으나, 『난설헌집』에는 음탕하다는 이유로 실리지 못했다. 화자는 꽃을 떨어뜨릴 정도로 서로를 부대끼며 처마 밑을 쌍쌍이 드나드는 제비의 모습을 보며 떠난 임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빈방에서 눈이 미치는 곳까지 멀리 내다보며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감각적이며 능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형태를 보니까 토굴 저장고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만들면 제대로 만들어 놓지 무늬만 토굴 저장고다. 예전엔 더 크게 있었는데 몇 년 전 홍수가 나서 무너져 새로 복원해 놓은 거라고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차라리 만들지나 말지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 이런 것들이 미관을 해친다.

 

 

 

디딜방아

 

밖에서 본 안채

 

안채 문 바로 앞에 이 화장실이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기념관에 화장실이 있는데 굳이 이곳에다 화장실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직원 아짐과 얘기 나누며 물어보니까 방앗간이 있던 자리인데 관람객이 화장실 멀다고 민원이 들어와 급조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언제부터 공무원들이 민원을 그렇게 잘 처리했었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민원을 넣고 항의했다고 방앗간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문 하나로 남녀가 같이 들어가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으니 요즘에 이런 화장실이 또 어디 있는지 황당했다.

 

 

 

 

1983년 전국 시비 건립 동호회가 허균 3남매가 태어난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교산 마을의 애일당 터에 교산 시비를 세운 것을 시초로 1991년 강릉시 여성 단체 협의회가 난설헌 시비를 세우고, 1994년 강릉 예총에서 난설헌 시비 옆에 교산 문학비를 세우는 등 허씨 가족 5문장가의 시비를 세워 허균·허난설헌을 기리는 시금석을 다진 후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을 통해 본격적인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 허씨 가족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가옥을 매입하여 허난설헌 생가 터를 복원하였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에 걸쳐 기념관 건립과 각종 자료와 유물을 수집하여 2007년 2월 1일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을 개관하면서 생가 터와 기념관을 갖춘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을 조성하였다.

 

애일당 터는 조선시대의 문인으로 예조참판을 지냈고, 대문장가 허엽의 장인이자 허균과 허난설헌의 외조부인 김광철의 집이다. 김광철은 아들을 얻기 전에는 외손이라도 자신의 집에서 잉태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출가한 첫째 딸이 애일당에서 허엽과 동침하여 허봉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생가 앞의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가는 길

 

기념관 전시실은 ㅁ자 형태로 되어있다.

 

 

허엽(1517년 12월 29일 ~ 1580년 2월 4일)은 조선중기의 문신, 성리학자로, 자는 태휘, 호는 초당, 본관은 양천이다. 허균과 허성, 허봉,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며 우성전의 장인이기도 하다. 일찍부터 영리하고 조숙하였으며 노수신에 의하면 7, 8세에 효우가 남달랐고 스승에게 나아가서는 번거로이 권독하지 않아도 월등히 진취하였다 한다. 나식, 이여,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언적을 사숙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명종 때 관직에 올랐으며 동서 분당 때는 동인에 가담하였다.

 

문과급제 후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 때 재물을 탐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559년 필선, 1560년 대사성, 1562년 지제교를 거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었다. 1562년 경연관 재직 중 윤근수, 구수담, 허자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다시 파직당했고 1563년초 복직되고 곧이어 삼척부사로 부임하였으나, 과격한 발언 때문에 문제가 되어 다시 파직되었다. 그 뒤 복직하여 1568년(선조 1) 진하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에 올라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시작될 때 동인에 가담했다. 이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나 재물 문제로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처가인 강원도 강릉에서 나는 특이한 맛의 샘물로 두부를 담가서 먹었는데, 그 맛이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허엽은 그 두부를 상품화하였고 이는 초당두부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비로서 장사를 한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 즉위 초 신진 사류의 한사람인 율곡 이이의 거침없는 발언과 비판에 염증을 느낀 사람 중에는 허엽도 있었다. 원로대신들 중 허엽과 이준경 등은 율곡 이이를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다. 율곡 이이가 서경덕은 도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하고,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정면 부정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자 그는 율곡 이이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다. 허균과 허봉, 허성,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며 의성 허준에게는 8촌 형이 된다.

 

 

 

 

 

 

 

 

 

 

 

 

 

 

국조시산, 허균의 시선집 1706년 간행된 목판본

하곡조천기 1707년 목판본

한정록. 1850년 필사본

 

 

 

 

난설헌집

 

교룡화

 

광한전백옥루상량문

 

 

 

 

명문재사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난설헌과 함께 중형의 벗인 이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조선 중기 삼당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재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허균이 조선 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홍길동전』의 주인공을 서자로 설정한 것은 직접 목격해 온 스승의 불행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이는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사회 문제를 과감하게 폭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 경포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