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에서 정오의 음악회를 관람하고 살방살방 장충단 공원으로 걸어내려왔다. 날씨가 뿌옇게 흐려서 그다지 상쾌하지는 않지만, 오랜 만에 걸으니 옛 생각도 나고 예전과 사뭇 달라진 장충단 공원을 보니 옛날 일이 더 그리워지고 마음이 짠하니 아리다.
무궁화는 근화라고도 하고 무궁화는 한자어지만 중국 문헌엔 나타나지 않고, 다만 《산해경》에 한국에 훈화초:무궁화)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3.1 독립운동 기념탑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류관순 열사,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과 어머니 이씨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영명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을 만났다. 그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충청남도는 그녀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유관순상을 제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수상자에게는 유관순횃불상을 수여한다.
이한응 조선 말기의 우국 열사, 한말의 외교관.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 통정대부, 서리공사가 되었다.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지고 대외적으로는 영·일동맹으로 한국정부의 지위가 떨어지자 이를 개탄, 음독자살하였다. 장충단에 배향되었다.
이준 열사, 한말의 독립운동가 이준(1859~1907)의 묘이다. 이준은 1907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압력과 방해로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1907년 7월 14일 숙소였던 데 용(De Jong)호텔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는 숨을 거두며 “나라를 구하시오. 일본이 끊임없이 유린하고 있소”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이준의 사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자결설, 병사설, 분사설(분에 못 이겨 죽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 서쪽 외곽에 있는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시립공동묘역에 묻혔다가 사후 56년이 되던 해인 1963년 고국으로 운구하여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의 현위치에 안장되었다
갈갱이, 랑미초라고도 하는 수크령
수표교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시기반시설을 위한 건설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조선 초 한양은 하수시설 미비로 장마 때마다 되풀이되는 홍수 피해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1년(1411)부터 세종 16년(1434)에 걸쳐 한양의 중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천(청계천)을 개설하여 백악·인왕·남산 등 주변의 물길을 한 군데로 모아 동대문 밖으로 흐르도록 했다.
이러한 개천의 건설로 인해 한양은 물의 범람으로 야기되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수표교는 이렇게 생겨난 청계천 위에 세워졌던 많은 다리 중 하나이다. 세종 2년(1420) 수표교가 처음 세워질 무렵에는 그 주변으로 소나 말을 매매하는 마전이 있다 하여 마전교라 불렸다. 그후 세종 23년(1441) 비가 올 때 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양수표를 세우는데, 이것은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방수 시설물로, 이때부터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기록되었다.
수표교
남산의 동북쪽 기슭에 있는 장충단 공원은 조선조 영조 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이 있던 자리이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들을 물리치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에 고종 황제는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00년 11월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는다.
그 자리가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이다. 이후 1908년까지 매년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 사당은 한국전쟁 중 파괴되고 사라져 버렸다. 1969년 장충단에 세워졌던 비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장충단이 공원으로 된 것은 1919년. 일제는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박문사라는 절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였으나 광복 후 일제가 세운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1984년 9월 22일 건설부고시 제374호로 근린공원이 된 장충단공원은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 합병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구역은 장충단공원이라는 예전의 이름 그대로 불리고 있다. 장충단공원 일대는 장충단비, 수표교, 승정전, 관성묘, 와룡묘 등 문화재를 비롯하여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와 유관순, 이준열사, 김용환 선생 동상 등이 있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애국충정이 깃든 민족공원이라 할 수 있다.
장충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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