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궁동 저수지와 정선옹주 묘역

智美 아줌마 2015. 9. 24. 02:45

S자 나무 테크 다리를 보고 궁동 저수지를 찾아갔다. 온수역 8번 출구에서 14번, 6616번을 타고 수궁동 복지회관이나 원각사 앞에 내리면 바로 찾을 수 있고 도보로는 20 여분 걸린 것 같았다. 도로 양쪽 저수지에 S자형 나무 다리가 예뻐서 사진 찍으러 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저수지 크기가 너무 작았지만, 나름대로 예뻤다. 오늘은 궁동 저수지와 온수역에서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항동 저수지를 갈 것이다.

 

 

궁동저수지는 구로구 궁동에 있는 저수지로 궁동저수지 자리에는 원래 ‘벼락구덩이 우물’이라고 불리는 게 있었다. 마치 ‘벼락을 맞아 생긴 것 같은 구덩이에서 샘이 솟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벼락구덩이 우물을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일제가 벼락구덩이 우물 자리에 저수지를 팠고, 우물에서 샘솟던 물이 저수지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고 한다. 저수지가 생기자 마을은 벼농사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풍수지리적으로는 산을 뒤에 업고 물을 품은 명당자리가 완성됐다.

 

농업용수로서의 궁동저수지 역할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현대화가 진행되고 마을에 연립 주택이 들어서면서 수궁동의 농업 인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해방되기 전 일본 사람이 소유했던 궁동저수지 땅은 해방 이후 국유지로 바뀌었다. 마을 사람들은 궁동저수지를 낚시터로 임대하고 수익금은 마을 기금으로 사용했다. 예부터 이곳에서 샘솟는 물은 마을의 생계를 책임지는 주요 수단이자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의 조건을 완성하는 요소였고 2008년 4월 궁동저수지가 포함된 궁동 45번지 일대 1만 205㎡에 조성된 궁동생태공원은 현재 주민들이 애용하는 쉼터로 자리 잡았다.

 

 

 

 

 

노랑어리연

 

 

 

 

 

 

 

 

 

 

 

 

 

 

 

 

 

 

 

 

 

 

 

 

정선옹주는 1594년(선조 27년) 음력 4월 1일 선조와 정빈 민씨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민사준이며, 같은 정빈 민씨를 어머니로 둔 형제로는 오빠 인성군, 언니 정인옹주, 여동생 정근옹주, 남동생 인흥군이 있다. 정선옹주는 영가 권씨(안동 권씨) 권협(權悏)의 손자이자 권신중의 아들 권대임과 혼인하였다. 권대임은 당시 부평부(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궁동 일대)에 살고 있었는데, 선조는 이곳으로 시집을 가는 정선옹주에게 해당 지역 인근의 땅을 하사하였다. 당시 권대임과 옹주의 집이 매우 크고 으리으리한 궁과 같다 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궁동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권대임은 정선옹주와 혼인한 후 길성위에 봉해졌으나 정선옹주는 1614년(광해군 6년) 음력 8월 1일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사후 궁동에 있는 시댁 식구들의 묘역에 묻혔으며[6], 1645년(인조 23년) 남편 권대임도 이곳에 같이 묻혔다[1]. 아들 권진은 돈녕부봉사를 지냈다. 정선옹주의 어머니 정빈 민씨는 성격이 어질고 예절을 잘 지켰는데, 옹주도 이러한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 항상 근신하고 부덕을 잘 지켰다고 한다.

 

 

 

 

 

맨 위에서 부터 권대협의 조부 예조판서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 최씨, 그 아래 길성군 권대임과 정선옹주, 그 아래 아버지 길흥군 권신중과 전주 이씨, 그 아래 권대임의 아들 권진과 남양 홍씨 묘 순으로 되어 있는데 많은 문중 묘역에서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묘 순서가 바뀌어 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