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정릉의 원찰 경국사

智美 아줌마 2015. 4. 24. 16:00

 

봉국사와 북한산 숲에 올라갔다가 이제 정릉3동에 있는 경국사로 간다. 9시 반에 집에서 나와 절집으로 공원으로 돌아다니면서 봉국사 광응전 계단에 앉아 쉬면서 간단히 요기한 게 다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늦은 점심을 먹고 들어가자. 경국사 앞 버스 정거장에 내리니까 돈까스집 안내판이 서 있기에 그곳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더니 얼레? 근방을 돌아봐도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먹을만한 식당도 마땅찮아 그냥 경국사로 들어가? 아니지, 건강하지도 않은 내 몸을 생각해서라도 먹어야 혀. 그렇다고 몸에 좋은 것 먹으려는 것도 아니면서, 게다가 절에 가면서 불경스럽게 고기를 먹겠다고? ㅎㅎㅎ 어쨌거나 지나가는 아짐에게 물어 찾아갔더니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식당이라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 봤을 때 주택가라고 생각하고 더 들어가지를 않았던 것인데 식당 주인(?)은 화살표 방향으로 돌아오면 되는데 그걸 못 찾아오느냐고, 자기들이야 주변을 훤히 아니까 어디에선들 못 찾아가겠냐 마는 외지인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찾아 식당에 들어가 1층 홀에 앉으려니까 대뜸 2층으로 올라가란다. woo ~ c 다리 아픈데 1층 두고 왜 2층으로 올라가래? 그럼 밖에 테이블에 앉을게요. 하니 몇 분이냐고 묻고는 혼자라니까 1층 홀에 그냥 앉으란다. 밥 한 끼 먹으려고 들어갔더니 기분 더럽게 한다. 전후 사정은 잊고 밥상을 받아 배부르게 먹고 경국사로 향한다. 오래전 경국사에 일 보러 잠깐 들어간 적이 있지만 어떤 곳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경국사 극락교

정릉천,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이다.

삼각산 경국사 일주문

극락교 가설기념비

 

 

천왕수 , 작은 전각이 이채롭다. 물은 약수로 사용하기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경국사 부도군

 

 

 

경국사 자운 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 지관 스님의 은사이신 자운(1911~1992) 대율사 사리탑은 2005년 조성된 것으로 2단 기단 위에 석조형 탑신을 올린 계단형 사리탑으로 지관 스님의 본관은 경주, 법명은 지관, 법호는 가산이며, 속명은 해붕, 족보명은 종붕이다. 1932년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 유계리의 경주이씨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병을 앓다가 '옴마니반메홈' 진언을 외워 치료한 일이 불문에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47년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 율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고, 1959년 구족계를 받았다. 1970년 해인사 주지가 되어 최연소 본사 주지의 기록을 남겼다. 1986년~1990년까지 동국대학교 제11대 총장을 역임하였고, 2005년 10월~2009년 11월 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제32대 총무원장을 지냈으며, 2012년 1월 2일 서울 경국사에서 세수 80세, 법랍 66세로 입적하였다

 

지관 스님 원력이 담긴 '불교대사림편찬발원문'

부도군 왼쪽에 있는 샘, 수각 위에 모셔진 삼존불, 뒤에는 나무아미타불 표석도 함께 세워져 있다.

 

경국시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본사 조계사의 말사이다. 1325년(충숙왕 12) 율사 정자가 창건하여 청암사라 하였고, 1330년경 무기가 머물면서 천태종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1331년 거사 채홍철이 선방을 증축하여 선승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하였다. 1352년(공민왕 1) 금강산 법기도량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 승려 지공이 주석한 뒤부터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도량으로서 전승되었다. 1507년(중종 2) 억불정책으로 법당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퇴락된 채 빈 절로 남아 있다가, 1545년 왕실의 도움으로 중건되었다.

 

1546년(명종 1) 명종의 즉위로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왕실의 시주로 건물을 전면 중수하고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그 때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라 개칭하였다. 1669년(현종 10) 조선태조의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 묘소인 정릉이 복원이 되면서 근처에 있던 약사사(봉국사), 흥천사와 함께 능묘의 원찰로 지정되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절에 들렀다가 보경스님의 인격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참다운 승가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고까지 칭송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1953년에는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도 한국문화의 참모습이 이곳에 있다고 하여 그를 절에 안내하기도 했다.
후일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방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근래에는 한국불교계의 대표적 학승(學僧)이면서, 32대 조계종총무원장이신 지관(智冠)스님이 1979년부터 주석하시면서 활발한 포교활동과 절의 내실을 다지기도 했다.

 

삼성보전에 함께 있던 범종각이 새로운 집을 얻었다. 범종각 현판 정산 주지스님 글씨

 

불교에서 쓰이는 중요한 기구 범종, 목어, 법고, 운판을 법구사물이라고 한다. 범종은 대개 아침 저녁으로 108번씩 치는데 이것은 백팔번뇌를 타파하고 무간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28번 타종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불교의 세계를 의미하고 종의 입구가 땅 밑을 향하고 있는 것은 종소리가 지옥으로 울려퍼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목어는 어고 또는 어판이라고도 부르는데 본래 중국의 선원에서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에는 밥을 먹었는데, 그 때마다 때를 알리는 신호기구로 쓰였던 것으로 모양이 길다랗고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근거는 없으나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떤 스님이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죽은 뒤에 물고기가 되어 그 등에서 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물고기의 형상은 둥근 모양으로 단순화 되었는데 목어가 처음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 데 대해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어느 날 스승이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갈 때, 한 마리의 물고기가 바다에서 나타나 전에 지었던 죄를 참회하며, 등에 자란 나무를 없애 주기를 애걸하므로, 스승이 수륙재를 베풀어 물고기 몸을 벗게 하고 그 나무로써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달아놓고 스님들을 경책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물고기는 밤낮 눈을 감지를 않으므로 수행자로 하여금 졸거나 자지 말고 늘 깨어서 꾸준히 수도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고기 모양으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둥근 것을 목탁이라 하고 긴 것은 목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법고는 각종 불교 의식에 쓰이고 말 그대로 법을 전하는 북으로, 특히 축생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법고는 종각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치지만 이것은 홍고 또는 대고라 하며, 염불 때 사용하는 법고는 소고라고 한다. 소고인 경우에는 승무의 필수품이 된다. 법고의 몸통은 잘 건조된 나무로 만들고 두드리는 양면은 소가죽으로 만든다. 한쪽은 수소, 다른 쪽은 암소의 가죽을 대야 좋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북소리도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몸체에는 용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고, 두드리는 부분에는 ‘만(卍)’자를 태극 모양으로 둥글게 그리기도 하며, 부처의 깨달음이나 서원을 적은 진언을 새기기도 한다.

 

운판은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구름 모양의 넓은 청동판으로서 두들겨 청아한 소리를 내게 하는 일종의 악기인, 운판 불전사물의 하나이다. 인도에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미상이나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종에서는 재당이나 부엌에 달아 두고 대중에게 끼니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기구로 사용되었다. 재료는 주로 청동을 사용하며 형상이 구름 모양을 하였으므로 운판이라 하고, 죽이나 밥을 끓일 때에 세 번 치므로 화판이라고도 하였으며, 끼니때에 길게 치므로 장판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끼니때에 치기보다는 아침·저녁 예불 때에 범종·법고· 목어와 함께 치는 의식용구로 되었다. 이들은 모두 중생교화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운판은 유독 허공에 날아다니는 짐승들을 위하여 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월당, 스님의 거처

 

보리수나무(수령 200년)와 1층 공양당, 2층 관음성전

2층 관음성전

 

 

 

목관음보살좌상, 1980년 새롭게 개금할 때 보살상 몸속에서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강희 42년(1703)에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서 색난(조선후기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장인)이 조성하였고, 월출산 도갑사 견성암에 옮겨 모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래 도갑사 암자에서 봉안되어 있던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는데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17세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보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제748호) 불화는 조선 후기 작품으로 아미타삼존상 뒤에 후불화로 봉안된 아미타 본존은 암석으로 표현된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연꽃무늬로 장식된 광배(光背)를 두르고 있다. 양 옆으로는 팔대 보살이 시립하고 있고, 상·하단으로 사천왕을 배치하고 있다. 아미타불이 중생들을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법하여 극락왕생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불화의 내용을 나무로 조각한 목각상으로 흔히 목각탱이라 부르며, 불화로 분류되면서 기법은 조각에 속한다.

 

 

삼성보전,  원래 범종각과  한 건물에 있었으나 범종각이 관음성전 앞에 만들면서 삼성보전만 단독으로 있게 되었다.

약사 3존불,  1939년 보경스님이 그린 약사회탱화, 칠성탱화, 미륵탱화가 있다.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 필체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이들 삼존불은 보경스님이 흙으로 직접 빚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화도 1935년에 보현스님께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주지 스님이 직접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리는 것은 흔치 않다고 한다.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 탱화, 영산전 삼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과 나한탱화가 나열되어있는데 이들도 보경스님이 만든 것으로 왼쪽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안쪽에 있는 신중탱화는 1966년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한 분의 나한상은 위 삼존불 옆에)

 

 

명부전은 극락보전 왼쪽에 북쪽을 향하고 있고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과 시왕, 판관 등 명부들이 봉안되어있다.

지장보살과 무독귀왕(좌)도명존자(우)

 

시왕상과 지장시왕도와 사자탱화, 시왕탱화가 걸려 있다. 불단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는데 비슷해 보이지만, 손짓이나 들고 있는 물건은 모두 다르다. 뒤에 시왕탱화가 1왕당 1폭씩 배치, 총 10폭을 이룬다.

 

 

지장보살

 

철조관음보살상, 경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1세기 거란족의 나라인 요나라에서 조성된으로 추정되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고있어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은 확실하나 언제 무슨 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문화재이지만 아직까지  문화재 등급이 지정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산신각

산신각의 산신탱화는 1980년 덕문스님이 조성한 것이고 앞에 작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라고 한다.

 

 

천태성전, 대개 산신각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경국사에는 독성(나반존자)을 모셔둔 독성각인 천태성전이 맨 위에 있다.

독성 탱화와 독성상, 독성 탱화는 1980년 덕문스님이  조성하고 앞에 독성상은 근래 봉안된 것이라고 한다.

천태성전 옆의 산철쭉

산신각에서 본 극락보전 지붕

종무소

종무소 뒤로 돌아가면 스님들의 거처 문수원이 있는데 외부인 출입금지인 줄 모르고 들어갔는데 제재하지는 않았다.

무우정사와 삼층석탑

 

경국사 전각들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부도군 아래 귀룽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천왕샘 옆의 산철쭉

경국사 일주문 꽃길이 예뻐 사진 한 장 남기려고 지나가는 애기 엄마와 아짐한테 부탁했더니 역시나 편집을 해도 사진이 그렇다.

 

경국사를 제대로 둘러보긴 이번이 처음이 이지만, 경국사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지 않았다. 보경스님과 지관스님의 업적을 생각하면 존경스러우나 이번 방문에도 좋은 이미지는 남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다. 오래전 30년 전쯤 되나? 경국사에 볼일이 있어 잠깐 들렸을 때 당시 스님이 어떤 분이 계셨는지는 모르지만, 내 기억 속엔 어린 시절 정월이면 우리 집에 시주하러 오시는 봉은사 스님이 계시다.

 

인자하시고 늘 평온해 보이시는 할아버지 스님이신데 늘 방문하시면 입가엔 미소가 잔잔하시던 분이라 살아오면서 스님은 막연히 그런 분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현실에서 만나는 스님들은 나의 동경을 무참히 깨는 분들이 있어서 실망스럽게 하곤 한다. 나는 불자도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라고 생각하고 절집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한다.

 

경국사에 들려 둘러보면서 극락보전 안을 들여다보며 살피는데 "사진 찍지 마세요." 퉁명스럽게 쏴붙이는 듯한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까 키가 작고 몸집이 빵빵하신 스님이 나한테 하는 말씀이셨다. 그러시면서 "어디에서 왔어요?" 어디서 오긴 어디서 와요? 봉국사에서 넘어 왔죠. 라고 하면 안 되겠지? 정릉 선덕왕후에 대해 자료 조사하다가 경국사도 정릉의 원찰이라고 해서 왔습니다. 하니 "선덕왕후가 누군데요?" 뭐시다냐? 정릉의 원찰이라고 하더니 선덕왕후도 모르시네. "태조의 계비 선덕왕후를 말합니다." 하니 "강씨요? " "네" "봉국사보다 우리 경국사가 먼저 원찰이 된 절이예요." 하시며 자리를 뜬다.

 

어느 절이 먼저 원찰이 되었든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스님께 한 말씀 드리고 싶었는데 참았다. 참고나니 아직도 마음이 찜찜해서 경국사 홈피가 있으면 글을 남길까 했더니 홈피가 없다. ㅎㅎㅎ 가끔 다른 지역에 있는 사찰을 방문해서 사진 촬영을 하면 유독 사진을 찍지 말라고 쏴 붙이는 절이 있다. 신성한 법당인데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불경스럽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나 그거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 차원을 떠나서 우리 문화재에 관심이 있어 찾아 온 사람한테 잡상인 쫓듯이 그렇게 내쳐야 하는지, 하긴 예전엔 경국사 입구에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푯말을 세웠다고 한다. 외부인이라면 누구? 나같은 사람? 그때는 선방을 운영하며 스님들 수행을 하는 곳이라 출입 제한을 했는지는 모르나? 그래도 절에 외부인 출입을 하지 말라는 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다행히 지금은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지만 . . .

 

"스님, 절에 찾아온 중생이 절에 와서 죄를 짓고 가면 되겠습니까? 사진 찍지 말라고 하셔도 찍어갈 사람은 몰래라도 다 찍어 갑니다. 절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발품 팔아가며 전각마다 찾아다니고 사진 찍겠습니까? 절에 관심 있는 사람이 전각마다 오르내리고 소장하고 싶어서 사진 찍는 것이니 절에 와서 몰래 사진 찍어가는 죄 짓지 않게 그냥 놔두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사진 찍지마라는 폭탄 말씀 대신에 우리 절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안내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신다면 불자가 아닌 중생이라도 감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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