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정릉 능침사찰 흥천사

智美 아줌마 2015. 4. 21. 16:00

 

정릉에서 나와 흥천사로 간다. 주택가 골목으로 나가야 하지만 이정표가 잘 되어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나 찾아 봐 ~ 라.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로 나오면 바로 흥천사 후문이 나오고 오른쪽에 흥천사 사내 암자 적조사가 있다.

흥천사는 불사를 넓히느라 여기 저기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고 생각보다 절 터가 넓었다. 서울 시내  이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는 것에 놀라웠다.

"손 잡고 오르는 집"이라고 되어있어 어떤 건물인가 하고 들여다 보려니 문이 잠겨있다.

 

영산홍

철쭉

꽃사과

 

흥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왕이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황화방 북원에 능지를 정릉에 조하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창건하기 시작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이 완성되었다. 창건과 함께 조계종의 본산이 되었고, 승당을 설치하여 항시 선을 주관하는 참선 도량으로 발전하였다. 1398년 왕명에 따라 절의 북쪽에 사리전을 세웠다.

 

1410년(태종 10) 절의 탑을 보수하고, 1416년 기신재를 지냈다. 1429년(세종 11)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아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고, 가뭄에는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왕실의 지원이 줄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사리전만이 화재를 면했는데 당시는 연산군의 악행과 폐불이 자행되던 때라 복구하지 못하고 불상과 기물만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로 옮겼다. 1510년(중종 5)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대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뒤 1569년(선조 2)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에는 승려 성민, 신 등이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846년(헌종 12) 구봉화상이 칠성각을 세우고, 1849년 승려 성혜가 적조암을 창건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법당을 중수하고 1855년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865년(고종 2)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 하였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수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와 ~ 절 가운데 아름드리 나무들이 넘 예쁘다. 절과 함께 오랜 세월 함께 하지 않았을까?

머저 독성각과 산신각으로 올라간다.

산신각은 바위 위에 진 것 같다. 요즘 계단 불사를 하는 것 같던데 . . .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가? 추위를 막아주는 가건물이 설치 되어있는데 미관상 보기는  안 좋다.

산신각

산신각 내부

 

1933년 독성각이 불타자 이듬해에 재건

 

독성각 내부

 

 

명부전, 흥천사 기록에 의하면 1853년(철종 4) 계장스님이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2년 후인 1855년(철종 6) 순기스님이 명부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명부전은 사후세계인 명부(지옥)를 관장하며 중생들을 교화,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신 불당으로 대부분 지상보살 좌우에 도명존좌, 시왕(십왕) 등을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1985년 12월 5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었다.

 

명부전의 극락왕생 흰등과 산철쭉

 

명부전 편액, 고종의 글씨

도명존자(좌), 본존 지장보살, 무독귀왕(우)

 

 

 

 

용화전은 미륵전 또는 미륵의 한문 의역인 자씨(慈氏)를 취하여 자씨전이라고도 한다. 이 불전은 미륵불이 주존불이다.

미륵불

 

 

맑은 물이 담겨 있는데 용도가 뭔가?

관세음보살상

산신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흥천사 기록에 의하면 1853년(철종 4) 계장스님이 중수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집으로 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 두 기둥 위에 돌출되어 있는 용머리 장식이 특징이다.

 

모란, 대나무 꽃살 무늬

국화, 목련 꽃살 무늬

포도 꽃살 무늬

 

극락보전, 아미타전, 극락전또는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봉안하고, 삼존불의 뒤쪽에 극락의 법회장면을 묘사한 극락회상도나 극락구품탱화를 걸어서 극락의 모습을 나타낸다.

 

관세음보살(좌), 주존 아미타불, 문수보살(우),

 

영친왕전하오세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세칭 영친왕이 5세에 쓴 글씨. 흥천사는 조선 말기 사대부를 비롯하여 궁궐의 상궁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이때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의민황태자가 다섯 살에 흥천사에 와서 쓴 글씨라고 한다. 흥천사는 조선 왕실의 피와 슬픔이 어린 사찰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흥천사에 머물기도 했다. 지금도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 있고,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극락구품연화도

 

 

조선 말기 고종 대에는 대웅전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대웅전과 마주하는 자리에 대방이라 부르는 커다란 건물을 짓고 대웅전과 대방 사이의 마당에서 큰 법회를 행했다. 이러한 실례로 흥천사에도 극락보전과 대방이 마주하고 있고 대방은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

 

 

 

 

만세루의 글씨는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하였고, 일진회를 이끌며 고종의 퇴위와 한일합병을 적극 추진한 대표적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인 송병준 아들인 송종헌의 글씨, 이 글을 쓴 해가 병인년이라 하니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쓴 글. 서선실 편액은 흥선대원군 친필

 

왼쪽 흥천사 편액은 흥성대원군의 예서체 친필과 오른쪽은 중국에서 온 어느 사신의 혜서체 편액

옥정루 편액 글씨도 흥선대원군의 친필

대방의 옆 면

종각의 편액은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친필, 한 사람은 독립을 위해 싸웠고 한 사람은 친일 행각을 벌였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황새냉이

 

 

 

 

 

 

 

 

 

 

자동차 차단기가 설치된 곳에 일주문이 있었는데 붕괴 되었다고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1년 전만 해도 일주문이 이 자리에 있었는데 자동차가 일주문 사이로 다니다 보니 진동으로 인해서 무너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각산 흥천사 일주문(자료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