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아리랑길 테마공원

智美 아줌마 2015. 4. 24. 18:00

봉국사, 북한산 동네 숲, 경국사를 들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잠시 들린 아리랑길 테마공원

 

아리랑 고개는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에는 정릉으로 가는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라 하였으나 1926년 나운규(1902~1937)가 이 고개에서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항거, 민족정신을 형상화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뒤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1935년경에는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급요정 청수관이 들어서면서 ‘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을 이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고객을 끌어들였다. 아리랑고개를 지나는 길은 지선도로로 서울시내 전체 가로명 가운데 대로나 로 · 길이 아닌 아리랑고개로 불리어지는 유일한 도로로서, 유서 깊고 친근한 고개로 남아있다.

 

 

아리랑 테마 공원이 조성된 경위에는 아리랑 고개가 교통 체증이 심해 도로 확장 공사를 진행하면서 아리랑고개의 유래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나운규의 영화가 촬영된 곳이라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수난, 항거의 상징이엇던 아리랑고개의 역사성을 되살리자는 취지에서 영화의 거리를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5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영화, 6번 출구로 나오면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일본 등 세계 각국 유명 영화의 동판이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 동판에 행인이 미끄러지는 사고가 발생, 그로인해 아리랑 테마공원은 축소되고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영화 "아리랑"의 주인공  영진이 살던 집을 복원

 

나운규(1902년 10월 17일 ~ 1937년 8월 9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영화인이다.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호는 춘사(春史)이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으며 1920년에는 독립군 지도자 중 한 명인 홍범도 장군 산하의 부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 1924년 일본인 관리 하의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하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가마꾼으로 출연하였다. 《농중조》라는 작품에 출연하여 배우로서 명성을 떨쳤다.

 

1926년에는 무성 영화인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대한민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나운규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겸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종로 단성사에서 상영한 이 작품은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다. 이후 영화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내고 대한민국 영화의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여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금붕어》, 《들쥐》, 《벙어리 삼룡》, 《오몽녀》 등이 있다.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차남 나봉한도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가 죽은 후 1993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故 윤봉춘과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문화사적으로나 사회사적으로 충격을 던진 일대 사건이었다. 상상을 초월한 흥행을 기록하면서 이 영화는 이후 2년 6개월에 걸쳐 전국 각처에서 상영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 같은 흥행에 힘입어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신아리랑」, 일명 '나운규의 아리랑'은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인 말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3·1운동 실패의 충격으로 앞길이 양양한 청년 영진은 불우한 현실 속에서 그만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미친 영진은 광인 특유의 사랑으로 여동생 영희를 아끼는데, 영진을 찾아온 영진의 친구 현구는 영희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다. 악덕지주의 머슴이자 악질 지주의 수족 노릇을 하는 친일파 기호는 농악제가 벌어지던 날 영희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를 본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기호와 난투극을벌인다.

 

실성한 영진은 오히려 이 모습을 재미있게 여긴다. 상대의 피를 보고서야 문득 정신이 돌아온 영진이 일본인 순경에게 붙잡혀 수갑을 찬 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던 그 마지막 장면, 바로 그 순간 흘러나오던 주제가인 「신아리랑」을 관객들은 뜨거운 공감의 눈물과 함께 소리죽여 합창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해 나운규가 몇 겹으로 걸쳐 놓은 영화 속 우의법은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더욱 절묘하게 파고들었고 응축된 감정은 마침내 주제가를 통해 분출된 것이다.

 

 

「신아리랑」은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그때까지 불리던 전통 민요의 가락이나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 3/4박자로 편곡된 신민요로서, 그 주제 또한 본래의 것에서 멀어져 비창감이 깃든 한()의 정서를 부각시켰다. 나운규의「신아리랑」이 '아리랑'의 정신을 잘못된 방향으로 확산시켰다는 부정적 평가가 한편에서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신아리랑」의 정조가 '아리랑'의 전부는 아니며 그 전체의 성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신아리랑」은, 19세기 이전부터 여러 갈래로 내용과 형식이 재창조되면서 성격을 형성해 온 중요한 구비문학으로서의 민요가, 일제 침탈의 시기인 20세기에 들어 영화라는 예술장르에 걸맞게 변형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나운규의 『아리랑』이, 당시까지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그리 보편화하지는 않았던 민요 '아리랑'을 역사와 사회의 표면으로 부각시키면서 확장기와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해숙 교수글에서)

 

 

주재소가 멀어서 화투치기 좋고요 님의 품이 넓어서 잠자리가 좋아라. -원주아리랑

속에다 불 담는 것은 시뉘 올캐 아니냐. 내 속 풀어 주는 그대는 낭군님이 아니냐. -정선아라리

 

 

아리랑 고개에 북소리 둥둥 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 날리네. - 광복군아리랑

만주야 봉천은 얼마나 조먼[좋으면] 꽃같은 각씨 두고 만주 봉천을 가는고. -진도아리랑

백석봉 겉이두야 [같이도] 두텁던 정이 풀잎에 이슬겉이두 다 떨어지네. - 정선아라리

 

 

문전의 옥토는 어찌 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인가.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거장 되네. 말깨나 하는 놈 재판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공동산 간다. 아깨나 낳을 년 갈보질하고 목도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 서울아리랑

 

패션 Fashion, 스타일 Style, 트랜디 Frendy의 이끌림 헤어삽,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쁜 아가씨들이 있어 한 컷!!

윤미숙 한복, 복잡한 상가들 속에 화사한 디스플레이가 눈에 띄어 또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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