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서계 박세당 고택 사랑채

智美 아줌마 2015. 4. 26. 14:00

장암역에서 본 도봉산

장암역 건너 수락산 자락 밑에 서계 박세당 선생 고택이 자리잡고 있고 그 길따라 들어가면 노강서원과 석림사가 있다.

개천 따라 들어가면 고택에 도착, 그런데 개천 주변이 너무 지저분하다. 개천을 살려 예쁘게 꾸며 놓을 수는 없을까?

 

입구에서 본 수락산, 수락산은 높이 638m. 서울과 의정부간의 국도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자리잡은 북한산(837m)과 도봉산(710m)을 마주보고 있다. 이 산은 북쪽의 의정부로부터 남쪽의 태릉까지 연결되며, 중간지점인 덕릉 고개를 중심으로 북쪽은 수락산, 남쪽은 불암산(508m)이다.

 

 

서쪽 사면에 쌍암사, 석림사, 남쪽 사면에 계림암, 흥국사, 동쪽 사면에 내원암 등이 있고, 이 암자의 뒤에는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m의 석조미륵입상이 있다고 하니 기회되면 찾아가봐야겠다.

 

 

어라? 고택 앞에 도착을 하니 문이 닫혀있다. 이런 낭패가 있나. 그러나 그냥 갈 내가 아니지. 용무가 있을 시 연락을 하라는 안내문이 있어 전화를 드렸더니 사전 예약을 하고 방문을 해야한다고 하셨지만, 혼자 고택 관람, 자료 수집하러 왔다고 하니 흔쾌히 방문을 허락하셨다. 오래 전 이곳을 지나갔을 때는 이런 문이 없었는데 울타리와 문이 설치 되어있다.

 

 

잠시 후 이 댁의 종부께서는 출타 중이시라 며느리인 예비 종부께서 나오셔서 맞아주신다.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으나 엄연히 개인 사유지이고 개인 사생활 터전인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불쑥불쑥 들어와 훼손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례가 빈번하자 특단의 조치로 문을 닫고 사전 관람 예약제를 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재를 대하는 국민 의식이 아직도 수준 이하라는 게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서계 선생의 후손이 생활하는 건물

 

곳곳에 아기자기 예쁘게 가꾸어져 있어 마치 공원에 와있는 것 같다. 예전엔 이 넓은 터에 사랑채 외에 여러 건물이 있었다는데 6.25 사변 당시 북괴뢰군이 아지트로 사용하면서 집을 부수고 그 건축 자재를 땔감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역사의 한 획을 남긴 것이다.

 

 

금낭화

작은 연못도 있고 . . .

 

 

 

 

조팝나무 꽃 너머로 사랑채가 보인다.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조선 후기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그 역사적 업적이 뛰어나다. 본관은 반남, 자는 계긍, 호는 서계, 잠수, 서계 초수등 이다. 이조 참판 박정과 관찰사 윤안국의 딸인 양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참판 박정의 아들로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을 받기도 했으나 1694년 갑술옥사에 소론이 득세하자 승지로 특진하였다.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판서를 지냈다. 또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그의 대표적인 농학서 『색경』을 저술했다.

 

 

의정부시 장암동에는 마당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마당바위 또는 장암이라 하였고, 석천이라고도 불렸는데, 이 장암동에 서계 박세당의 고택, 사랑채가 남아 있다. 원래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규모를 갖춘 고택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어 지금은 바깥사랑채만 남아 있다. 서계 박세당 선생의 사랑채는 저술 활동을 하던 건물로 선생은 조선 현종 1년(1660)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자리에 올랐으나 40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처음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를 갖춘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규모였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바깥 사랑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 반으로 누마루가 덧붙어 있어 乙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동쪽의 수락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향집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 보통 좌향의 배치에서는 남향이나 남서향, 남동향을 따르는 것에 비해 이 가옥은 방향보다 배산임수의 자연지세에 따라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남쪽으로부터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수락산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현재는 이 시냇물을 끼고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 남쪽으로 날개집 형식의 누마루가 덧붙여져 있는 '乙'자 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2칸 규모의 사랑방은 뒤쪽으로 반 칸 정도를 덧붙여 후원으로의 출입을 쉽게 했다.

 

 

왼쪽에는 다락으로 오르는 문이 있고, 다락 아래에는 아궁이가 있다. 사랑방 남동쪽으로 1칸 규모의 온돌방이 있고, 반 칸 돌출하여 누마루를 마주하고 있는 마루방이 있는데 이 방과 누마루는 주로 손님을 접대했던 곳으로 보인다. 누마루는 바닥면이 약 1자 반 정도 높고, 3면으로 머름을 둔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창호는 3면 모두 머름 위에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설치했다.

 

 

2칸 규모의 사랑방에는 정면으로 반 칸의 툇칸이 있다. 이 방과 누마루를 마주한 방 사이에 사랑대청이 있다. 사랑채의 주칸은 1칸이 모두 2,480㎜이다. 기단은 외벌대의 장대석 기단이고, 주춧돌은 네모 반듯한 다듬돌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석재의 치수나 가공수법이 장대하고 치밀하다. 기둥은 모두 한 변이 약 180㎜ 정도 되는 네모기둥이다. 가구는 오량가의 민도리집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틀이 짜임새가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기와는 약 10여 년 전에 한식에서 재래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당시의 한식기와가 사랑마당 앞에 쌓여 있는데 막새기와는 보이지 않는다

 

박세당 고택에서는 사랑채를 독채로 빌려주는 고택체험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계절에 따라 숙박 가능 여부가 달라지니 사전 확인 예약이 필수이고 숙박료는 30만 원, 사랑채 전체 사용, 취사 및 식사 불가하며 문의: 031-836-8600 로 하면 된다.

 

 

반남 박씨가(서계 종택)에 대대로 전해오던 고문서는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전해지는 거의 유일한 고문서로, 고문서 약 200여 점, 고서 150여 책, 초상화 4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300년 세월 속에서도 고스란히 잘 보전되어 왔던 자료들을 서계 선생의 11대손이신 박찬호씨가 한국학 중안 연구원에 기탁하여 관리하고 있다. 당쟁으로 아들 둘을 잃고 정치에 염증을 느껴 여생의 탈속을 추구했던 박세당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담은 필첩인 ‘서계유묵’은 장서각에 기탁한 후 2010년 보물 제1674호로 지정됐다. 박세당이 평소 동경하던 당나라 시인 이백 등의 시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누마루 내부, 누마루에 앉아 밖을 보면 도봉산이 한 눈에 보인다.

누마루 문으로 보이는 도봉산

사랑채 뒤로 돌아가면 사당이 있는데 지붕이 비가 새서 보수가 필요한데 예산이 부족해 흉물스럽게 천막을 덮어 높아서 미관을 해치고 있다.

 

영당은 서계 선생과  아버지 하석 박정 선생의 초상화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부자간의 초상화가 나란히 모셔진 것은 다른 문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데 이는 서계선생이 너무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 박정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을 후대 종손들이 잘 보살피기 위한 정성이란다.

 

담장 너머로 사당 건물인 영진각이 살짝 보인다.

 

에구 ~ 의정부시에서는 사당은 문화재로 등록이 안 되어있다고 예산 지원이 안 된다고 하니 안타깝다. 이번 서계 선생 고택을 방문하고 자료 수집하면서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서계 선생이 훌륭하신 분이고 그의 가문 또한 명문가 중의 명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수령이 450년 된 은행나무(의정부시 보호수 8호)

종가 안내를 해준 예비 종부

 

 

칼세올라리아, 주머니꽃이라고도 하는데 칠레, 멕시코, 뉴질랜드 등지에 약 200종이 분포한다. 한해살이풀 또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재배하는 종은 몇몇 종의 교배를 통해 만든 것으로 대부분 한해살이풀이다. 꽃은 입술 모양이고, 아랫입술꽃잎이 주머니 모양이다. 한국에서 재배하는 종류는 교잡종인 헤르베오히브리다(C. herbeohybrida)와 꽃이 큰 그란디플로라(C.grandiflora)인데, 이 두 종은 꽃이 적게 달리지만 멀티플로라 계통은 작은 꽃이 빽빽이 달린다. 근래에 와서는 꽃이 작은 계통의 종을 많이 심는다.

 

하늘매발톱꽃, 아래로 핀 꽃에서 위로 뻗은 긴 꽃뿔이 매의 발톱을 닮았다 해서 매발톱이다. 꽃말은 ‘우둔’이다.

종부께서 딸기꽃이라고 일러 주셨다. 지금 꽃이 피어서 언제 딸기가 달릴까?

이름이 생각날 듯, 말듯 . . .

 

이 댁에는 흰색 겹매화가 있다. 노란 겹매화는 흔히 볼 수 있지만, 흰색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꽃송이를 보니 신부 부우케가 떠오른다.

 

 

 

작은 연못도 있디. 서계선생은 집 주변의 샘을 석천이라 하고 아예 동네이름을 석천동이라 일컫고 바위에 ‘’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본가에서 200미터 산으로 올라가면 서계 선생 묘역이 있다. 예비 종부께 부탁해서 묘역 안내를 받고 관람하게 되었는데 종부께서 봉분에 들쥐나 두더지가 구멍을 파지 않을까 하고 살피러 가셨다가 등산객 남여가 봉분 뒤에서 그 짓거리를 하고 있는 현장을 보신 후 요즘에는 수시로 묘역을 살피러 올라가신다고 하니 창피할 노릇이다. 산에 갔으면 산행이나 즐겁게 하지 그 무슨 추잡한 짓인지, 모텔갈 능력도 안 되었나? 아님 그렇게 남의 묘역에서 불태울 정도로 급했나? 일부이겠지만, 그래서 난 떼로 몰려 다니는 산악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

 

숲 사이로 각시붓꽃이 보인다. 각시붓꽃은 햇살이 잘 들어오는 곳에 피지만 봄이 가기 전 하고현상(여름이 되면 꽃과 잎이 땅에서 모두 없어지는 현상)이 빨리 일어나 없어지고 만다. 옮겨 심는 것을 싫어하는 품종이어서 가급적 자생지에서 피어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좋다.

 

 

빨간 열매같은 충영, 밤나무에 빨간 꽃봉오리처럼 붙은 혹벌의 알집, 벌레혹이 형성된 부위에 작은 잎이 무리지어 생기고 가지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해 개화와 결실이 되지 않는다. 유충이 3~5월에 급속히 자라면서 벌레혹도 커지게 된다. 성충은 6월 하순~7월 상순에 벌레혹에서 탈출해 새눈에 3~6개씩 산란하고, 새로운 유충은 8월 상순~하순에 부화해 눈의 조직을 가해하지만 충영은 형성하지 않는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묘 4기가 있는데 서계 선생의 손자인 박필기 공을 비롯한 박사심, 박헌원 등 후손 묘소

 

서계 선생의 손자인 박필기 묘, 박필기는 1677년(숙종 3)∼1757년(영조 33). 본관은 반남. 자는 치규, 호는 무취옹. 세자시강원필선에 오른 박태창의 아들이다. 1702년(숙종 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4년(영조 즉위) 목릉참봉을 지낸 뒤, 1727년 증광시에 합격한 후, 1727년(영조 3) 지평을 시작으로 1729년 장령, 헌납, 지제교, 사간, 대사간, 다시 사간을 지냈고, 1730년에는 집의, 이후 고성군수를 지냈다.

 

1735년 사간, 집의를 거쳐, 1744년 교하군수를 지내고서 1746년 통정대부로 치사(致仕)하였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박필기는 성품이 본래 염아하여 형식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 끼친 사랑이 있었는데, 3품관으로서 나이를 이끌어 벼슬을 사양하였으니, 국조에서 일찍이 없었던 바이었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 집안에만 있으면서 잣나무 열매를 먹었으므로 강건하고 병이 없어서 나이 80이 넘어서야 사망하였다.”라고 하였다

 

콩제비꽃

양지꽃

이 언덕 오른쪽에 서계 선생 묘역이 있다.

 

조선 후기의 중농주의 실학자 서계 박세당(1629~1703)의 묘는 수락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서계 박세당 사랑채(경기도문화재자료 제93호)와 약 100m 떨어져 있다. 문헌에 따르면, 서계 종택에서 동쪽으로 수백 보를 가면 유궁(산소)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가 바로 부인 의령남씨의 산소로 원래 부인 의령남씨의 묘에 박세당이 합장되었고, 둘째 부인 정씨도 함께 묻힌 삼위합장묘이며, 봉분은 단분으로 호석을 두른 대형 사각형 봉토분이 특징적이며, 최근에 조성한 묘표와 신도비가 있다. 묘지 아래에 수 칸의 가옥을 짓고 정사라 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비석에는 자찬묘표가 새겨져 있고 2002년 9월 16일에 도 문화재자료 제113호로 지정됐다

 

 

 

그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장례를 지낸 후에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상식()을 설치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 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행동양식 표준으로 인식되어 오던 예론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서 당시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원래 부인 의령남씨의 묘에 박세당이 합장되었고, 둘째 부인 정씨도 함께 묻힌 삼위합장묘, 조강지처와 후처가 함께 묻힌 것이 아이러니하다.

 

서계 선생의 전처 남씨부인은 현령 남일성의 따님으로 숙종조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약천)은 그녀의 동생이다. 박세당은 1645년(인조 23) 부인과 혼인하면서 남씨의 친정인 정릉동에 살았다. 물론 박세당의 처가살이는 남귀여가혼의 유습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점에 대해 박세당은 조실부모에 따른 가난 때문이라 자술하였다.

결국 박세당은 혼인 이후 처가의 경제적 원조 속에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고, 처숙 남이성, 처남 남구만과의 활발한 학문 토론은 후일 그가 학자로 대성하는데 큰 발판이 되었다. 이후 박세당은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면서 서울 외곽의 양덕방에 신거를 마련하였으나 사실상의 신접살림을 시작한지 5개월 만에 남씨부인과 사별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자신이 과거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각종 여건을 조성해 주었던 부인이었기에 남씨부인의 사망은 박세당에 있어 엄청난 시련이었다.

 

 박세당은 부인을 지금의 서계종택이 있는 수락산 장자동에 안장하고는 아예 서울살이를 철거하여 이주를 단행하였다. 그 때가 그의 나이 40세 되던 1668년이었다. 이처럼 박세당이 수락산에 은거한 데에는 남씨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크게 작용했다. 박세당은 손수「망실숙인의녕남씨묘지명」을 지어 부인의 행적을 기리는 한편 광주정씨 정시무의 딸을 재취로 맞았다. 서계의 두 아들 태유·태보는 남씨의 소생이고, 막내아들 태한은 정씨 소생이다

 

묘역 주변에는 제비꽃과 양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그 사이 사이에 보랏빛 조개나물도 여기 저기 피어있다.

 

박세당은 1702년(숙종 28) 이경석의 신도비문을 찬술하면서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恣僞肆誕)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世有聞人)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梟鳳殊性)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했네.(載怒載嗔)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不善者惡) 군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君子何病)”

이 무슨 뜻인가.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 삼전도비문(청태종공덕비)을 쓴 이경석을 비난한 적이 있다.(1668년)
‘오랑캐에 아부해서 한평생 오래 살았다’는 뜻의 ‘수이강(壽而康)’이라고 표현한 것이다.(1668년)

이에 박세당은 바로 그 송시열의 비난을 두고 ‘군자(봉황·이경석)를 비난하는 소인배(올빼미)의 짓’이라 폄훼한 것이다. 그러니까 박세당은 이경석을 ‘노성인(老成人)’으로, 송시열을 그런 노성인을 업신여기고 보복하는 ‘불상인(不祥人)’으로 치부한 것이다. 이 사건은 무시무시한 파국으로  치닫는데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파상공세에 박세당의 소론측은 완패를 당했고 박세당이 사서삼경을 주석한 <사변록>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어  그의 저작물은 모두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1987년에 조성한 신도비

묘역 주변에는 보랏빛 제비꽃과 노란 양지꽃의 꽃밭이다.

제비꽃

 

각시붓꽃? 솔붓꽃?  각시붓꽃과 좀 다른 것 같아 살펴보니 솔붓꽃같이 꽃잎 가운데가 노란 선이 있는데 꽃대가 긴 것을 보면 각시붓꽃 같고 해서 그냥 각시붓꽃으로 생각한다. 난 제비꽃 전문 학자가 아니니까. ㅎㅎㅎ 

  

 

이 제비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제비꽃은 교잡종이 워낙 많아 100종이 넘는다고 하니 제비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는다면 제비꽃 종류를 다 안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고 심지어 제비꽃을 연구하는 사람조차 교잡이 계속 일어나 새로운 종이 발견되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한다.

 

제비꽃

조개나물은 경기 이남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 생육환경은 양지쪽에 토양이 비교적 메마른 곳, 즉 묘지 주변이나 잔디가 많은 곳에서 자란다.

제비꽃과 할미꽃

양지꽃이 지천으로 양지꽃 카펫트를 깔아 놓은 것 같다.

 

묘역에서 본 도봉산, 사랑채와 묘역까지 둘러 봤으니 이제 노강서원으로 가려고 나가니까 마당에 종부께서 나와 계셨다. 팔을 다치셔서 기브스를 하고 계셨는데도 친절히 맞아 주시고 서계 선생과 집안에 대한 궁금증도 설명해 주시고  함께 마당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부로 산다는 게 참으로 힘들고 고된 삶이실 텐데 넉넉한 품성으로 종가를 잘 이끌어 오신 것 같다. 개인의 집안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역사이고 문화재이니 오래도록 잘 보전 되어 후손에게도 좋은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명문 가문으로 오래도록 빛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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