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정재 박태보의 노강서원

智美 아줌마 2015. 4. 26. 15:00

서계 선생 고택 사랑채와 묘역을 둘러보고 노강서원으로 가는 길에 고택 울타리 넘어로 라일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궤산정이 보인다. 오래 전 이곳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올라가 있곤 했는데 그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나보다.

 

당초 서계의 석천 입거는 세사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학문적 온축을 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서계의 학행이 중외에 알려지면서 석천동은 박세당에게 가르침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만동(滿)의 복을 누리게 된다. 이에 제자들의 협력 속에 강학의 공간이 하나 둘씩 마련되었는데, 궤산정과 관란정이 바로 그것이다. 궤산정은 계곡 사이의 깨끗한 바윗돌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진 정자이다.

 

‘궤산’이란 이름은 『서경(書經)』의 “아홉길 산을 만드는데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면 안 된다(爲山九 , 功虧一)’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서계 박세당이 제자들에게 학문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기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름 지었다. 정자 밑 바위에는 ‘서계유거(西溪幽居)’ ‘취승대(聚勝臺)’, ‘석천동(石泉洞)’이라는 서계 유필(遺筆)의 암각이 뚜렷하다.

 

 

 

청풍정 주춧돌, 청풍정은 청절사 옆에 있는 정자로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청절사0의 완성은 이어 부속 건물의 건립을 수반하였다. 비록 서계선생이 사망한 이후였지만, 영당 옆에 정자가 없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서계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정자 건립의 논의가 일어났다. 논의가 합일되어 1729년(영조 5) 청절사 전방의 개울가에 작은 정자가 완성되었고, 이어 서계의 문인들은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덕수는 백이, 숙제에 비견될 만한 동봉 김시습의 청풍대절을 기려 정자 이름을 청풍정이라 명명하고, 당대의 명필 윤순(호 백하)으로 하여금 편액의 글씨를 쓰게 했다고 한다. 현재 청절사 자리에는 노강서원이 이건되어 있어 남아있지 않고 옆에 세워진 청풍정도 마찬가지로 남아있지 않다.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박태보는 호남 암행어사, 파주 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 죽었다. 학문에도 깊고 성품도 강직한 분으로 알려졌으며 죽은 뒤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숙종 21년(1695)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27년(1701)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박태보는 조선 중기 때의 문신. 본관은 반남 자는 사원 호는 정재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당이며, 어머니는 현령 남일성의 딸이다. 당숙인 세후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을 때 시관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에 부수찬 · 수찬 · 부교리 · 지평 · 정언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문묘 승출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를 질책한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환수를 청함에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에 선발, 사가독서를 마치고 나서 이천현감으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부수찬 · 교리 · 이조좌랑 ·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 그의 환수를 청해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일정 기간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이천현감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했으며, 호남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과 윤선거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 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시비를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한 적도 있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적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조지겸 · 임영 · 오도일 · 한태동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하여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해서 보여준 바와 같이 시비를 가리는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하였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 주서국편, 글씨로는 박임종비 · 예조참판박규표비 · 박상충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이다.

 

 

노강서원의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 고직사 등과 출입문이 있으며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동·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문이 닫혀있어 담장 밖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하고 한 바퀴 돌아본다.

담 너머로 보이는 사당

 

 

사당 뒤

 

 

 

사당 옆에 복사꽃을 보고 이제 마지막 방문지 석림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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