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효령대군 기념관

智美 아줌마 2014. 9. 11. 14:04

청권사 효령대군 기념관

 

 

입구에 방명록이 비치 되어있는데 난 안내 팜플렛만 챙기고 . . .

관악산 연주암 효령각에 봉안된 효령대군의 영정, 관악산 연주암 들렸을 때 자세히 보고올 것을, 산행시 사람이 워낙 많아서 . . .

 

조선 1대 왕 태조의 어진, 태조(재위 1392∼1398)는 성 이. 휘 성계로 우군도통사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조선을 세우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우군도통사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세웠으며, 자신은 수시중으로서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음해 정도전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1

 

390년(공양왕 2) 삼사영사로 승진하였고, 1391년 삼군도총제사로서 조준 등과 함께 구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구신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고, 그의 일파인 신진세력은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를 제거, 그 해 7월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이듬해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태조 3)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과에게 선위한 뒤 상왕이 되고, 1400년 방원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되었다. 1402년 왕자들의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심뇌로 동북면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왔고 불가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냈다. 능은 동구릉의 견원릉이다.

 

 

조선 3대 왕 태종 어진, 효령대군의 부왕으로 원본 어진은 6.25 전쟁 중에 소실되어 헌릉(태종.원경왕후)  봉향회에서 2013년 새롭게 만들었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에 방원(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했다.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해, 그들을 살해했다. 곧이어 방석·방번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해 방과로 결정했다. 태조는 방석·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자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이 세제로 책립되었다. 곧이어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방원)이 즉위한 뒤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했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그 차사를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에 의탁했다. 덕안전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풍남문과 풍패지관,  조선시대에는 전주를 풍패지향이라고 하였다. 풍패란 건국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로 한나라를 건립한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유래하였고 풍남문은 전주 부성의 남문으로 1767년 영조 43년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축조하였다. 이때 풍패의 풍자를 따서 남문을 풍남문으로 서문은 풍패의 패를 따서 패서문이라고 하였다. 전주객사는 객관으로 출장을 나온 관원이나 외국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는데  ‘풍패지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효령대군은 숭유억불의 이념과 정책을 일관되게 고수해온 조선왕조에서 깊은 불심으로 불교 배척의 방패막이 역활을 하였다.

세종대왕이 효령대군에게 하사한 옥배

 

 

대공덕주는 공덕을 베푼 시주를 가르킨다. 효령대군은 그 ㅁ맥이 끊기지 않도록 불교에 많은 공덕을 베풀었는데 금강산의 유점사, 양주의 회암사, 오대산의 상원사, 강진의 백련사 중창에 대시주로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는데 현재 전남 곡성 태안사에 보존 되어있는 태안사 바라에  효령대군이 대공덕주로 추대된 것을 명시 되어있다.

 

오대산 상원사, 속리산 복찬암, 강진 백련사, 관악산 연주암

 

 

 

 

원각사 대종 모형, 원각사 대종은 1467년(새조13년) 효령대군이 도제조가 되어 주조한 종으로 세조가 원각사 대종의 소리를 그토록 좋아하여 본인이 행차할 때마다 반드시 37번씩 종을 울리게 했다고 전해진 원각사 대종은 다행히 그 몸체가 온전히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엔 총 5개의 대종이 주조되었는데 현재는 두 개만 그 실물이 남아 있다. 하나는 지금 덕수궁에 놓여 있는 흥천사(정릉사) 종이고 또 하나가 바로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원각사의 대종인 보신각종이다.

 

이 동종은 폐허가 된 원각사 터에서 방치되고 있다 1536년 (중종 31년) 4월 9일 보루각 도제조였던 김안로의 건의에 의해 숭례문에 옮겨지게 됐다. 당시 지금의 종각 자리에 있던 보루에선 불교의 우주관인 28계 33천의 원리인 파루(오전 4시)와 인정(오후 10시)에 각각 33번과 28번씩 종을 울려 도성의 문을 여닫는 시각을 알리는 데 쓰였다. 그런데 종루에 있던 종소리가 멀리까지 들리지 않는 폐단을 지적해 정릉에 있던 흥천사 종은 흥인문에 달고 원각사 종은 숭례문에 달아 경복궁 보루각에서부터 창경궁 보루까지 봉화대 원리인 도미노식으로 종을 울리자고 건의한 것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김안로의 죽음으로 종이 걸리지 못하자 원각사 대종은 다시 남대문 옆 풀숲에 긴 시간 동안 방치되고 만다. 명종 18년엔(11월 16일) 이 두 개의 종을 내수사에 보내 총통을 만드는 데 쓰라는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다행히 두 종 모두 살아남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각자의 질긴 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후부터 이 원각사 대종이 언제 어떻게 지금의 보신각에 걸리게 됐는진 오리무중이다. 현재 알려진 대로라면 임진왜란 이후 1594년(선조 27)에 숭례문의 종을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는 기록(동국여지비고)과 선조 30년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이라는 명례동으로 옮겨졌다가 광해군 11년에야 지금의 자리를 찾았다고 하는데 모두 추측일뿐 확실 하지는 않다.

 

 

나 찾아 봐 ~ 라.

 

 

희우정은 효령대군이 짓고 거닐던 정자로 당초에는 합강정이란 이름이었는데 가뭄에 세종대왕이 농사를 살피기 위해 거동할 때 단비가 내려 희우정喜雨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는 망원정으로 불리는데 서울시 기념물 제9호로 등록되어 있고 효령대군이 제천정과 함께 외국사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당시 망원동 주변에는 청운정, 수일루, 평초정, 낙수정, 호인정, 탁영정, 안류정, 팔관정 등 많은 정자가 있었으며 한강변에서는 조선왕조 개국이래 수군들이 훈련을 하였는데 태종 임금은 종종 이곳에 행차하여 수군의 훈련을 살피고 겸하여 백성들의 농사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태종 임금이 이 정자에 행차하였는데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마침 그 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하던 터라 모두들 비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차에 임금의 행차와 함께 많은 비가 내렸으므로 임금은 이를 흡족히 여겨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 후 성종 때 월산대군 이정의 소유가 되어 이 정자의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꾸었다. 현재 한강변의 망원정 옛 터는 보수 정화되어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왕비 간택 참여, 실록을 보면 효령대군이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비와 후궁을 간택하는나라의 중대사에  왕실의 어른으로서 효령대군이 참여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효령대군은 왕실에 큰 어른이자 나라의 어른으로 활동하였다.

 

 

왕실연회 참여, 조선오아조실록에 효령대군이 왕실 연회에 자주 나왔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왕실연회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뿌리가 되는 왕실의 화합과 기틀을 다지며 정치의 한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외국 사신 영접, 효령대군이 외국 사신응 영접한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매우 큰 일임을 짐작, 이렇듯 중요한 나라 일에 참여하여 도움 주었다.

 

조선왕조신록에 국가 정책 자문, 세조께서 신하들과 효령대군을 불러 규형을 연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규형은 세조께서 명하여 만든 것으로 땅의 원근을 재는 물건이다.

 

선원계보기략 및 계보 목판, 1897년(광무1년) 시조 한으로부터 순종과 영친왕까지 기록된 선원계보기략 목판 32개와 수권의 책

 

9대손 이적 교지,  숙종 때 효령대군 9대손인 이적을 진사문과 홍문관 교리, 동정대부 행대도찰, 예조좌랑, 결성현감 등으로 국왕이 임명하면서 발급해준 교지이다.

6대손 이정 교지, 1623년(인조 1년) 왕이 6대손 이정을 동훈대부행 과천현감으로 임명한 교지이다.

열녀비 기원의 글,  효령대의 13세손 이동환의 부인 안동 이씨가 죽은 남편을 기리며 쓴 글

 

 

 

 

효령대군에게 쓰는 편지 코너, 아이들과 함께 오면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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