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야기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립다고도 말 못 하네.

智美 아줌마 2017. 5. 6.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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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피스 병실에 계실 때 사드린 조끼를 입으시고 찍은 사진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엄니 사진입니다.

 

이제 이틀이 지나면 어버이날이다.

내겐 가슴에 예쁜 카네이션 한 송이라도 달아 드릴 부모님이 안 계시니

어버이날이라 해도 그다지 의미 있는 날은 아니다.

 

내게 자식이 있어도 부족한 어미고, 내가 울 엄니께 효를 다하지 못한 불효한 자식이니

어찌 어버이날이라고 내 자식에게 바라며 부모라고 내세우며 살겠는가.

그저 어버이날엔 가슴 아파, 너무 아프게 저려와 그립다고도 말 못 하고

엄니 생각날 때면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울컥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문득 이 글을 쓰며 헤아려 보니 어느새 엄니 가신지 10년 세월이 훌쩍 흘러 있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다 늙고 병들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고 이 세상을 떠나지만,

울 엄니는 죽음마저도 자식을 위해 당신이 선택하고 우리 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엄니 가시기 전 해, 어느 날, 오라버니께 전화가 왔다.

엄니가 암이란다. 1년 밖에 못 사신단다. 이게 말이 되니? 이걸 어떻게 믿냐며 울먹였다.

오라버니와 함께 동생 셋이 한걸음에 달려가 이 병원, 저 병원 쫓아다녀 봤지만, 결과는 다 같았는데

엄니께서는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듯이 덤덤하게 살 만큼 살았다며 괜찮다고 하셨다.

그때 연세가 겨우 일흔 여섯이셨는데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엄니께서 혼자 병원에 가셨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몇 년 전에 말했다는데 엄니는 그 후로 그것 때문에는 병원엘 가시지도 않았고

자식에게도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온몸에 암이 퍼져 말기 암이 되어서야 우리가 알게 하셨다.

 

이 어찌, 이 어찌, 이렇게 불효하게 하셨는지, 서른아홉 살에 청상과부 되어

절망 속에서도 자식 뒷바라지하시며 일생을 사셨는데

수술하면 더 사실 수 있었다는 데도 자식 힘들게 할까 봐 삶을 포기하시다니,

그런데 얼마 남지 않은 목숨마저도 당신이 스스로 마무리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말기 암 환자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한다.

암 진단받고 1년이 가까워질 무렵, 엄니 목욕이며, 빨래며 필요한 것 해드리려

안산 친정에 일주일, 열흘 간격으로 엄니 필요한 것, 드시고 싶다는 것 사 들고 드나들었다.

드시고 싶다고 하신 것은 당신 어렸을 때 드셨던 음식이라 경동시장을 돌아다니며 찾아야 했다.

 

올케가 있지만, 살갑지 못한 성품이라 병든 엄니 병구완을 맡기기엔 편찮아서

당신 혼자 하시기에 힘들어하실 때부터 내가 드나들면서 목욕시켜 드렸는데,

갈 때마다 야위어가는 엄니 몸을 볼 때면 금세 주저앉을 것만 같은 앙상한 다리, 그 뽀얀 살은 다 어디 가고,

찢어질 것만 같은 가슴이 메와 울음이 솟구치지만, 엄니 마음 아프실까 봐 속으로 꾹꾹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두 달 넘짓 다니는 중에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신규 지점 일을 좀 해줬으면 하는 러브콜이 왔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일할 기회가 왔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매니저로.

그래서 7월 4일에 오픈 일이 잡혀 본사로 교육받으러 다니면서 엄니한테 다녀오곤 했는데

6월 말에 마지막 목욕시켜드리러 간 날은 여느 날과 달리 내 손을 꼭 잡으시며 우셨다.

 

"이제 또 언제 보노? 또 볼 수 있겠나?  "하시기에" 엄니, 다음 주에 올게. "

"다음 주에?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때는 니 출근할 텐데" 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

"엄마야, 많이 아파서 그러나? 왜 그런 생각이 드나? 그럼 내일이라도 올까? 쉬는 날 오면 된다. "

그런 말을 주고받고는 못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엄니의 마지막 손을 놓고 돌아서 왔다.

 

그런데 그다음 날, 그리고 하루가 지난 이른 아침에 오라버니께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엄니가 이상하셔서 안산 고대 병원으로 모셨다고, 빨리 오라고,

아침 출근 시간이었지만, 지하철 안에서 제발 울 엄니 살려 달라고 엉엉 울었다.

달리 빨리 갈 수도 없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했고, 병원에 도착해서 엄니를 본 순간

처참한 몰골에 눈동자 마저 생기를 잃은 모습에 난 놀라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해야만 했다.

 

그저께 내가 갔을 때 당신 스스로 목욕탕까지 걸어 들어가시고 나오셨는데

하루아침에 왜 이런 모습이냐고, 어떻게 해서 그러냐고, 오라버니 부부에게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그런데 임종을 앞둔 두 시간 전에 잠깐 의식이 돌아오셔서 마지막 말씀하시고 눈을 감으셨다는데,

 

"내가 너무 고통스럽고, 그런 모습을 너희 오래비가 조석 간으로 봐야 하는 게 가슴 아프고

나 목욕시키러 그 먼 데서 오게 하는 것도 마음 아프고, 내 자식들 더는 힘들게 하기 싫어 약 먹었다. "

그 말에 우리는 기암을 했고, "엄니, 무슨 약을 드셨어요? 약이 어디 있어서요? " 했더니

고혈압약을 들고 계셨는데 가지고 있던 고혈압약을 한 움큼 드셨단다.

 

갑자기 엄니가 왜 가시게 되었는지, 너희에게 말은 해주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얘기해주는 거라고

그리고 이젠 너희들 다 힘들지 않게 살게 되었으니 마음 놓고 너희 아버지한테 가신다는

말씀하시고 이내 의식을 잃으셨고 두어 시간 지나 우리와 긴긴 이별을 하게 되었다.

당신 자식들, 손주까지 다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고운 얼굴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 죽음마저도 자식을 위해 당신 스스로 마감하시게 했으니 이보다 더 큰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이보다 더 크나큰 어머니의 사랑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출근하기 전에 서둘러 가시기로 마음먹게 했으니 이런 죄인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살아서도 죽음마저도 자식을 위한 삶이셨으니, 이 어찌 아픈 가슴에서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가시게 했는데 어찌 어버이날이라고 내 자식에게 무얼 더 바라겠는가.

무탈하게 잘 커서 자기 앞가림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이지. 바라면 안 되는 것이지.

 

이 밤, 그리운 부모님 사진 올리기를 보며 문득 엄니 생각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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