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연 나들이

국립무용단 향연

智美 아줌마 2017. 2. 8. 22:24

오늘은 국립극장에서 국립무용단의 향연 공연이 있는 날이다. 초연, 재공연을 못 봐서 올해 공연은 잊지 않고 꼭 챙겨 보려고 작년 8월에 예매해놓고 반년을 기다린 끝에 보게 된 공연으로 연말에 정금 언니와 옥영이랑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 를 보고 온 후에 한 달 열흘 만에 국립극장을 가게 되었다. 1, 2월엔 보고 싶은 공연이 없다 보니 오랜만에 공연 보러 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여느 공연 시간보다 늦은 8시 공연이라 한겨울보다 해가 1시간 정도 길어진 것 같지만, 아직 많이 어두운 날이다.

 

늦은 시간 공연이라 왠지 여유 있는 것보다 공연 시간을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자꾸 시간을 확인하게 되어 준비하는 대로 바로 나갔다. 얼굴 본지도 여러 날 되어 약도 살 겸 약국에 잠깐 들렀다 가자 하고 나갔는데 약국에 들러 10여 분 얘기 나누고 출발했는데도 동대입구역에 도착하니 1시간 20분이나 여유 있다. 그래서 오랜만에 태극당 들러 빵도 사고 커피 한 잔도 마시면서 있다가 공연 40분 전쯤 되어 셔틀버스 타는 곳으로 가니까 벌써 줄을 서서 기다리고들 있다. 오늘 공연이 국립무용단의 향연 말고 또 있나? 했는데 향연 공연 첫날이고 다른 공연은 없었다.

 

국립무용단의 향연. 아, 정말 품격있는 공연이었다. 화려하게 삼원색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움직이는 듯 멈춘 듯, 절제된 듯한 춤사위에 가슴이 뛰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마치 오르골의 인형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발의 움직임이 어찌나 사뿐사뿐 내딛는지, 우아한 자태에 보는 내내 황홀하였다. 우리 전통 무용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막연히 우리 고전 무용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봤는데 오늘 국립무용단의 향연을 보고 우리 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세계 방방곡곡 널리 알리고 자랑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사람만 보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본 국립무용단의 향연으로 인해 우리 춤에 대해 공부(?) 좀 하니까 우리가 모르고 있는 춤의 종류도 참 많았다.

 

장충단 공원의 밤, 8시 공연이라 날이 어둡다.

 

향연 공연 전 무대

커튼콜 촬영

인사하는 자태도 단아하니 곱다.

김상덕 예술감독님과 조흥동 안무 선생님께서 단원과 무대 인사

 

공연 전에 포토월을 찍으려고 했더니 다른 사람이 찍든 말든 너 나 할 것 없이 아랑 곳 않고 들어가 찍어댄다. 그래서 공연 후에 사람들 빠져나가면 찍으려고 했더니 몇몇 무용단원들의 사인회를 하느라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 아쉽지만, 그대로 한 컷 찍고 왔다. 태극당에 들리지 않고 바로 왔으면 한가하게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편히 몇 컷 찍었을 텐데, 단원들의 가족도 온 것 같고 예측한 것보다 사람들이 일찍 온 것 같았다.

 

국립극장 마당 공사가 끝나서 해오름 극장 전체가 가리지 않고 잘 보인다. 이렇게 야경 사진은 처음 찍는 것 같다.

KB 하늘극장

사진 몇 컷 찍디 보니 셔틀버스가 다 떠나서 무지개길로 걸어내려간다.

 

 

국립무용단이 2월 8일(수)부터 11일(토)까지 대표 레퍼토리 ‘향연’을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전통춤의 대가 조흥동 님이 안무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방면에서 창작자로 활동하는 정구호 님이 연출을 맡은 ‘향연’은 한국 전통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한데 모아 세련된 감각을 입힌 작품이다. 2015년 12월 초연 당시 전회 매진된 데 이어 지난해 4월 재공연에서는 개막 전 매진으로 인해 한 회를 추가했다. 뮤지컬·클래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팬 층이 얇은 한국 전통무용의 이례적인 현상으로 평단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전통 춤사위의 원형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감각에 맞춰 춤 구성을 새롭게 하고 무대·의상 등에 세련미를 불어넣은 것이 주효했던 가운데, 특히 ‘향연’은 20·30 젊은 관객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향연’에서 궁중무용·종교무용·민속무용은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사계절 속에 새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난다. 1막(봄)은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궁중무용, 2막(여름)은 기원의식을 바탕으로 한 종교무용, 3막(가을)은 다양한 민속무용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4막(겨울)에는 ‘신태평무’를 배치함으로써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기존 한국무용 작품에서는 여성 무용수의 춤이 중심을 이뤘다면 ‘향연’에서는 ‘선비춤’ ‘소고춤’ 등 기존 남성 춤은 물론 ‘바라춤’ ‘태평무’ 등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춤을 동등하게 배치해 에너지와 역동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우리 춤 원류에서 뿜어 나오는 몸짓과 디딤새, 신명을 풀어내는 춤사위로 이 시대 관객과 호흡을 같이할 것”이라 밝혔다.

 

 

 

제의(전폐희문)

 

전폐례에서 희문(보태평 11곡 중 첫 번째 음악)의 선율이 연주되므로, 의례 절차명 ‘전폐’와 악곡명 ‘희문’을 결합하여 ‘전폐희문’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이 음악은 연주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선율 자체는 종묘제례 중 영신(신을 모시는 절차)에서 연주되는 ‘영신희문’, 종묘제례 중 초헌례(첫 번째 술을 올리는 절차)에서 연주되는 ‘희문’의 멜로디와 같다. ‘전폐희문’은 등가라는 악대에 의해 느린 한배[tempo]로 연주되는 차별성을 지닌다. 전폐희문은 영신례의 희문과 같은 곡이지만 전폐희문의 템포가 훨씬 느리다. 도창(노래부르는 이)은 전폐희문의 악장을 노래하고, 일무는 문무를 춘다. 종묘제례악을 무대에 올릴 때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진연(가인전목단)

 

가인전목단은 조선 말기에 창작된 향악정재의 하나이다. 순조의 아들인 익종이 동궁대리로 있을 때 아버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각종 궁중연회 때 추어졌고, 현재까지도 전승되어오는 춤이다. 『연감유함』에 의하면, 송나라 악무 십대 중 그 네 번째가 가인전목단이다. 춤의 내용은 팔모가 난 소반 위에 삼지화(三枝花)를 꽂은 꽃병을 놓고, 그 가운데 4명은 꽃병에 꽂힌 삼지화의 모란을 꺾으며 즐기고, 사이사이에 낀 4명은 꽃은 꺾지 않고 춤만 함께 춘다. 꽃을 꺾은 무원은 원무라 하고, 나머지는 협무라고 한다. 무원 수가 4명 10명·12명·14명·18명으로 증원되기도 하는데 현재는 8명이 춘다. 가인전목단은 교선무, 원화무, 환화무, 회선무, 부열무의 순으로 추고, 향악정재이기 때문에 당악정재처럼 죽간자나 구호 치어가 없고 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한시로 부르는 창사가 있다. 반주음악은 <향당교주>이다.

 

무의(정대업지무)

 

정대업지무는 조선시대 무무를 상징하는 정대업지무는 문무를 상징하는 보태평지무와 한 짝을 이루었다. 본래 세종(1418~1450) 시절 회례연 때 공연한 정대업지무는 1464년(세조 10)부터 종묘제향 때 아헌과 종헌에 연행됐다. 정대업지무는 초헌 때 추는 보태평지무와 한 짝을 이루었다. 정대업지무의 무원 36명은 각각 검, 창, 궁시를 쥐고, 아헌과 종헌 때 정대업지무를 춘다. 『악학궤범』이래로 정대업지무는 36명으로 구성된 육일무였으나,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64명의 팔일무였다가 1910년 이래 일제강점기에는 육일무로 됐다가 해방 후 팔일무로 환원되어 현재까지 팔일무가 전승되고 있다. 정대업지무를 추는 무원은 피변을 쓰고 남색주의를 입고 적상흡주에 적말대를 띠고 백포말에 오피리를 신는다. 춤을 출 때 창과 검을 들고 춤을 춘다. 조선초기에 정대업의 무원들은 창검과 궁시를 들고 일무를 추었으나, 현재에는 창과 검만을 들고 춤을 춘다. 정대업지무를 출 때 앞 열의 무원들은 창을 들고 춤을 추고, 뒷 열의 무원들은 검을 들고 춤을 춘다. 일제강점기 정대업지무의 명칭이 형만년지무로 개칭됐다가 해방 후 원래대로 복원됐다고 장사훈의 『한국전통무용연구』에 나온다.

 

 

바라춤

 

바라춤은 불교 의식에서 재를 올릴 때 추는 춤인 작법 중 하나. 양손에 바라를 쥐고 배꼽을 중심으로 머리 위로 들어 올리거나 좌우로 돌리면서 빠른 동작으로 전진, 후퇴, 회전하며 추는 춤이다. 복장은 장삼에 붉은 가사를 두르며 징, 북 호적 또는 범패에 맞추어 춤사위를 펼친다. 그 종류에 ‘관욕게바라, 사다라니바라, 내림게바라, 막바라, 명바라, 천수바라’가 있다. 의식을 행할 때, 불법을 수호하고 의식을 행하는 장소를 청정하게 한다는 뜻으로 추며. 가사와 장삼을 입은 여러 명의 승려가 바라를 들고 다라니를 외우면서 추는데, 반주는 범패·호적·태징 등으로 한다.

 

살풀이춤

 

살풀이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벌였던 굿판에서 무당이 나뿐 기운을 풀기 위해 추는 즉흥적인 춤을 말하며, ‘도살풀이춤’ 또는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 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 저고리를 입으며, 멋스러움과 감정을 한껏 나타내기 위해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지금의 살풀이춤은 경기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계승된 춤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문화가 활발히 전개되면서부터 광대들의 춤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굿이 금지되자, 무당들 중 일부가 집단을 만들어 춤을 다듬으면서 점차 예술적 형태를 갖추게 되어 오늘날 한국춤의 대표로 정착하였다.

 

현재는 살을 풀기 위한 종교적 춤보다는 살풀이가락에 맞추어 추는 무대화된 전통춤으로 발전했다. 대표적으로 이매방류는 동작이 섬세하고 교태미를 강조하는데 김정녀, 정명숙, 김명자 등이 전승하고 있다. 한영숙류는 품위가 있고 정숙하다. 한성준에게 배웠으며, 이애주, 정재만, 정승희, 손경순 등에게 전승하고 있다. 김숙자류는 도살풀이춤이라 하는데 경기 도당굿의 굿장단에 맞추어 추며 매우 긴 수건을 양 손에 들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김운선, 양길순, 이정희 등이 잇고 있다.

 

 

진쇠춤

 

진쇠춤은 경기도 도당굿의 진쇠장단에 맞추어 추는 남자의 춤. 경기도 남부지방의 무당이나 재인청 출신의 광대들에 의하여 전해온다. 문헌기록은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나라에 경사가 났을 때, 또는 풍년이 들었을 때 왕이 각 지방의 원님을 불러 향연을 베풀고 만조백관이 보는 가운데 원님들에게 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 춤이 진쇠춤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경기도 지방의 도당굿에서도 굿 사이에 추게 되었고, 또 재인청 광대들에 의하여 경기도 지방의 민속춤으로 남게 되었다. 진쇠춤은 무속의식의 춤 중에서 유일하게 궁중무용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춤사위가 비교적 우아하고 유연하여, 마치 궁중무용의 한삼춤에서 볼 수 있는 기법과 비슷한 동작이 나타난다.

 

이 춤은 도당굿 중 군웅굿에서 군웅마마에 정교할 때 추어진 춤으로 일종의 오신(娛神)행위로 군응님께 바치는 춤이다. 굿상을 굿당 중앙에 설치하고 군웅마마를 그 상 앞에 안좌시키는 가운데 그 앞에서 마주보고 두 사람이 대무하거나, 네 사람이 사방을 돌면서 한삼춤을 추는 것이다. 쓰이는 장단은 진쇠장단으로 느리게 추다가 조임채, 넘김채 겹마치로 점차 빨라지며 마지막에는 덩덕궁이(잦은 굿거리) 장단으로 끝난다. 이 춤의 복식은 철릭(앞가슴에는 학수배, 등에는 용수배)을 입고 사모를 쓰며 목화(木靴)를 신는다. 이 춤은 처음에 장중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나 뒤로 가면서 가벼운 움직임을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선비춤

 

한량무는 경남 진주 지방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교방 계통의 무용극. 한량이란 양반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 또는 노상 놀고먹는 사람을 이른다. 한량무는 한량과 승려가 한 여인을 유혹하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한 무언무용극으로 원래 이 춤은 조선 중기 이후 남사당패(南寺黨牌) 중 무동들에 의해 놀았던 것인데 그 후 조선 말까지 계속해서 연행되었으나 남사당패가 분산되면서 1910년 이후 이 춤은 어른의 무용으로 기방에서 주로 추어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각 지역마다 각기 이 한량무와 유사한 춤들이 행하여졌으나 거의 소멸되고 진주에서만 1979년도에 재연되어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진주 한량무는 양산권번의 춤 선생이었던 김농주에게 사사받은 김덕명에 의하여 현재 진주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동래학춤은 동래지방에서 전승되어오는 학춤이다. 주로 정월대보름날 동래야류나 줄다리기를 할 때 추던 춤으로, 어떤 춤꾼이 도포에 갓을 쓰고서 덧배기 춤을 추는 모습이 “학이 춤추는 것과 같다”라고 한데서 학춤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동래학춤은 의상을 따로 갖추지 않고 일상의 옷인 도포에 갓을 쓰고 바지저고리, 버선과 미투리를 신고 즉흥적으로 춘다. 반주악기는 꽹과리와 장구, 징, 북 등의 농악편성으로 되어 있고 장단은 굿거리 장단이다. 춤사위에는 양손을 너울거리는 날아가는 사위, 한 발 들고 서 있는 발 드는 사위, 학이 날개를 폈다가 오므리는 모습의 펴는 사위와 오므리는 사위, 좌우 상하를 바라보는 보는 사위, 왼발은 무릎을 굽혀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은 뒤로 편 상태에서 좌우로 흔들거나 상하로 가볍게 움직이는 배김새 사위 등이 있다. 구성을 보면, 일반 민속춤과 같이 일정한 순서로 짜여져 있지 않고, 자유분방한 즉흥성과 개인적 멋이 강조되고 있다. 예능보유자 유금선(구음), 예능보유자후보 이성훈(무수) 등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구춤

 

장구춤은 장구를 어깨에다 비스듬히 둘러메고 여러가지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 원래는 호남농악의 우도굿 가운데 농악의 개인놀이인 구정놀이에서 출발하여, 1930년대에 일본에서 현대무용을 배우고 돌아온 최승희에 의하여 본격적인 무대예술무용으로 형성되어 현재는 새로운 형태의 독립된 무용장르로 정착되었다. 형식은 독무 또는 군무로 추어지고 있으며, 처음 부분에는 대체로 <태평가> 등 민요에 맞추어 장구를 치면서 흥청거리며 춤을 추다가, 민요가 끝나면 구정놀이 그대로 설장구를 삽입하여 빠른 장단으로 몰아 도약하면서 흥을 돋우다가 끝을 맺는다.

 

소고춤

 

소고춤은 농악에서 소고치배들이 추거나, 교방춤에서 입춤이나 교방춤 끝에 춘다. 농악에서 추는 소고춤은 고깔소고춤과 채상소고춤으로 나뉜다. 공히 판굿에서 뒷배를 받쳐주며, 판을 너울거리고 출렁거리게 한다. 고깔소고춤은 주로 전라우도 농악에서 볼 수 있다. 소고가 약간 크며, 손잡이가 달린 소고도 있고 끈이 달린 소고도 있다. 고깔을 쓰고 추며, 소고를 놀리면서 추는데 발림(춤, 몸짓)이 좋아야 한다. 기본 구성은 이채 덩더쿵, 굿거리, 반굿거리, 된굿거리장단에 맞게 진행되며, 소고를 돌리는 기본동작인 꾸리북과 좌우치기, 물푸기, 연풍대, 밤술까기, 지게북, 가쟁이소고, 엇박배기 등의 동작이 있다. 각 장단별 매도지에서 춤사위가 특징적이다.

 

채상소고춤은 채상모를 쓰고 작은 소고를 들고 추는데 주로 채상모(彩象毛) 끝에 달린 길고 흰 띠를 돌리면서 춤을 춘다. 상모춤이라고도 한다. 호남좌도농악, 경기충청농악, 경상농악에서 볼 수 있다. 세 지역의 채상소고춤이 약간 달랐으나, 현재는 거의 같은 춤사위를 구사한다. 채상모 소고춤은 외사, 양사, 퍼넘기기가 기본동작이고, 나비상, 차고 앉는상, 지게북, 물푸기, 벌려겹치기, 솟을법구, 자반뒤지기 등의 동작이 있다. 12발 상모춤도 채상소고춤에 포함할 수 있다. 채상소고춤은 판굿의 일정한 대목에서 판을 몰아쳐 판굿의 흥을 돋군다.

 

오고무

 

 

 

오고무를 창안한 이매방 님은192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옆집에 살던 목포 권번(기생조합)의 권번장 함국향의 권유로 7세에 권번학교에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6년간 권번 기생들 틈에 끼여 전통 춤의 기본을 익힌 그는 광주 권번의 박영구·이창조로부터 승무와 북놀이 등 전통무용을 본격적으로 익혔다. 한국무용가로는 이례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15세 때 판소리 명창 임방울의 공연에서 승무를 춘 것을 계기로 대중에게 알려져 전국에서 춤판을 벌이며 실력을 쌓았으며 1960년대 인기를 끈 삼고무, 오고무 등을 창안했다.

 

불교의식에서 영향받은 우리나라 대표 춤인 '승무' 예능보유자로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가 되었고, 무당들이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에서 추는 즉흥적인 춤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가 되었다. 그의 승무는 전라지역을 중심으로 한 '호남형 승무'가 특징이다. 고고하고 단아한 정중동의 춤사위로 인간의 희열과 인욕의 세계를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매방은 당시 목포의 광대 출신인 고 이대조, 고 박영구 등으로부터 승무와 북놀이, 검무 등 춤의 기본기를 배운 뒤, 5년간 중국에 머물며 춤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메이란팡(매란방)으로부터 칼춤과 등불춤을 배웠다. 이후 본명은 이규태였는데 매란방 선생의 이름을 따서 나중에 이름을 이매방으로 개명하였다.

 

 

신태평무

 

태평무는 나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리는 뜻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1900년대의 무용가이며 명고수였던 한성준이 경기 무속춤을 재구성하여 추었던 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남녀가 왕과 왕비의 복장을 하여 궁중풍의 웅장하고 화려함을 보여 주며, 춤장단은 진쇠, 낙궁, 터벌림, 도살풀이 등으로 다른 춤장단에 비해 구성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장단의 변화와 함께 겹걸음, 잔걸음, 무릎들어 걷기, 뒷꿈치 꺾기 등 디딤새의 기교가 현란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절제미를 보여준다. 동작이 섬세하고 우아하며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는데, 이동안류의 춤은 서민적인 소박함과 귀족적인 정서가 혼합된 형태로 흥과 멋, 장중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강선영류의 춤은 엄숙함과 장중함이 배어 있고 율동이 크면서도 팔사위가 우아하고 화려하여 춤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

 

 

 

2016년 4월 향연

 

향연을 선사한 자랑스러운 국립무용단원의 얼굴

향연 출연자 명단에 윤성철 님이 없어서 왜지? 했더니 프로그램북을 보니 조안무를 하셨다.

 

                                                                                                                                        객원 신원국               객원 김관지

 

 

 

 

 

 

※ 우리 무용의 아름다움과 정보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올렸습니다. 이미지 사용함에 문제가 된다면 내릴 것이나 양해바랍니다.

'영화 공연 나들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극 옥탑방 고양이  (0) 2017.02.13
마이펫 오지 시사회  (0) 2017.02.09
영화 더 킹  (0) 2017.02.07
영화 컨택트  (0) 2017.02.05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0) 2017.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