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왕벚꽃 흐드러진 선암사

智美 아줌마 2016. 4. 26. 08:08

 

전날 화순 운주사를 둘러 보고 순천으로 와서, 순천역 오른쪽에 있는 찜질방 지오스파에서 여독을 풀고 다음 날 5시 30분에 선암사를 가기 위해 나오니 어느새 순천역 뒤로 동이 터서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선암사를 가기 위해서는 순천역 바로 앞에서 1번 버스를 타고 40여 분 가야 한다. 아무래도 왕벚꽃 보러 오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일찍 출발하려고 하는데 아직 시간이 여유 있어 길 건너 농협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버스를 기다렸다.

 

순천역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으니까 엉덩이가 따뜻해진다. 순천시가 2014년 12월에 버스 기다리는 이용객을 위해 설치한 발열의자라고하는데 발열의자는 전기 사용량 등 유지비용이 저렴한 탄소섬유를 소재로 제작됐고 길이 3m, 폭 35㎝, 높이 45㎝로 개당 2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월 4만원의 전기요금이 드는데 한겨울에도 평균 30도를 유지하며 버스 운행시간 오전 5시 30분부터 오후 11시까지 운영하고 바깥 온도가 20도 이상 되면 자동으로 작동이 멈춘다고 한다. 순천 시장이 누구야? 작은 부분이지만, 큰 효과를 얻은 굿 아이디어 행정을 실행했네.

 

 

그렇게 따끈따끈한 의자에 앉아 15분 정도 기다리니 1번 버스가 왔다. 버스 안에서 본 바깥 풍경, 이른 아침이라 햇살 살갑고 가는 곳곳 마다 붉은 영산홍이 많이 눈에 띈다. 영산홍 꽃이 화려하고 예쁘다 보니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곳도 있고 어린 묘목도 많이 키우는 것 같다.

 

산자락에 만든 도로여서인지, S자로 계속 구불구불하게 내려가는 대구리에서 월계리 구간 길이 예쁘다.

 

 

 

 

이제 이 길만 돌아가면 선암사에 도착한다.

버스 종점인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나무들

 

선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 선암사사적기에 따르면 542년(진흥왕 3) 아도가 비로암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한다.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창하였고, 영조 때의 화재로 폐사된 것을 1824년(순조 24) 해붕이 다시 중창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당우만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 9동, 요 25동, 누문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이 절은 선종, 교종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천년 고찰인 선암사가 몇 십년째 법쟁 분쟁을 치르고 있다니 놀랄 일이지 않은가. 선암사는 조계종과 태고종 분규의 뿌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올라간다. 일제가 정책적으로 대처승 제도를 장려하자 비구승들은 해방 직후부터 `왜색불교 타파'라는 구호 아래 이른바 정화운동(태고종에서는 법난이라고 부름)에 나서기 시작했고 "대처승들은 모두 절에서 떠나라"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계기로 피비린내나는 사찰 쟁탈전이 벌어졌다. 62년에 이르러 정부가 중재에 나서 이른바 통합종단이 출범했으나 주도권 다툼과 법통성 논쟁이 격화돼 결국 대처승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70년에 태고종을 창종하고 갈라져나갔다.

 

그래서 1972년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선암사 주지였던 윤모스님이 문화공보부장관으로부터 ‘선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라는 내용의 사실증명원을 발급받아 선암사 부동산에 대한 등기명의인을 ‘대한불교조계종 선암사’로 등옥했다. 그 뒤로도 물리력을 동원한 공방전과 법정 다툼은 끊이지 않았으나 법원이 조계종의 전통사찰 소유권을 인정해 대부분의 전통사찰은 조계종에 등록된 상태이다. 그래서 1970년 문화공보부는 선암사 소유권을 놓고 조계종과 태고종간 분쟁이 빚어지자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선암사에 대한 재산관리권을 순천시에 위탁했고, 지금까지 순천시가 선암사를 관리해 왔다.

 

그런데 2016년 7월 22일에 수십 년간 순천 선암사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벌이는 가운데 최근 법원이 이번엔 태고종의 손을 들어줬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제2민사부는 지난 14일 태고종 선암사가 조계종 선암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등기명의인표시변경등기말소’ 소송에 대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이번 사건 부동산의 진정한 소유자는 태고종 선암사라 할 것이므로 조계종 선암사는 원고에게 소유권보존등기의 말소등기절차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했다. 이렇게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은 계속 하게 생겼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나라 불교 역사를 비추어 볼 때 조계종이어야 하지 않을까. 일제감정기에 일본이 대처승 제도를 장려한 것은 우리 불교 문화 정신을 훼손하기 위해 그런 것이 라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 고유의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의 의미는 대처승에게도 똑같은 의미를 두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승려라 함은 색욕을 멀리해야 하는네 그렇게 속세의 인연을 맺게 되면 파계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대처승이라고 명칭을합리화한다고 다 같은 승려는 아니라고 본다. 욕정을 불사르고 자식을 낳는 승려를 어떻게 다 같은 승려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 불교에서의 승려는 고된 수련과 행자 생활을 거쳐 사미, 사미니승, 비구승, 비구니승이 된다고 했다. 속세의 인연을 끊지 않고 누리고 살면서 승려가 될 수 없으니 파계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불자도 아니고 법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지만, 적어도 내가 배운 불교의 기본에서는 그렇다. 승려는 경제 활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이 태고종 선암사만 해도 주지가 되겠다고 동료 스님한테 금품 살포했다는 뉴스가 올라오지 않았는가. 조계종이든 태고종이든 한해 들어오는 수익이 얼만데 그걸 쉽게 내놓으려고 하겠는가.

 

그렇게 밥그릇 싸움하는 동안 유물 60점은 도둑의 손에 의해 훼손되고 사라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빚어졌는데도 도난 당한 유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책임 소지를 가릴 생각도 않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조계종이든, 태고종이든 아무리 자기 종파가 소유한 유물이라고 해도 누구 개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엄밀히 말해 우리 국가의 재산이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문화재가 아닌가. 그러므로 문화재 보존을 위해 나라에서 돈들여 보수를 하고 지원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선암사의 길고 긴 싸움에 중생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선암교 너머로 왕벚꽃이 눈길을 끈다. 오늘 왕벚꽃 핀 선암사 절 구경 왔으니 왕벚꽃이 얼마나 예쁠런지 기대하면서 출발 ~

 

여느 절과 마찮가지로 이런 숲길을 1.5km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가면서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도 듣고 멋드러진 나무도 보고 부도군을 지나고 그 유명한 승선교, 강선루을 지나 삼인당 연못, 전통 야생차 체험관도 둘러 보면서 가다 보니 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무들이 같은 방향으로 팔을 뻗고 있네.

 

부도군

 

부도비

 

왼쪽에서 두 번째 삐뚤게 서있는 비석은 선암사에서 일생을 보낸 18세기 고승 상월대사의 부도비인데 정작 상월대사가 입적한 곳은 선암사가 아니라 묘향산 보현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상월대사 입적 후 나온 사리 세 과로 세 곳에 부도비를 세웠고 그 중 선암사 부도비는 보현사를 향하게 했다고 한다. 

 

『전통 야생차 체험관도 송사에 휘말려 있는데 순천시는 태고종 선암사 주지(지허 스님)의 토지 사용 승락을 얻어 2004년 3월 선암사 경내 약 4,995㎡ 토지에 모두 8개동의 전통 야생차 문화 체험관을 시공해 2007년 6월 준공한 후 순천시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왔다. 순천시는 당시 등기부등본상 토지 소유권자인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 선암사 주지의 동의를 얻어 건물을 완공하고 시의 재산으로 등록했다.

이에 조계종은 종단의 허가 없이 태고종의 토지사용 승낙만으로 차 체험관을 건립 운영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지난 2011년 순천시를 상대로 철거 소송을 제기했다. 순천시는 당시 조계종과 태고종의 선암사 소유권 분쟁으로 순천시장이 재산관리인이었던 만큼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법원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조계종의 손을 들어줬다. 』

 

이 전통 야생차 체험관 건축함에 있어 순천시가 잘못한 행정인 것 같다. 어찌 되었든 법적 소유권이 조계종에 있는데 태고종의 허락하에 건물을 짓고 순천시 재산으로 등록한게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두 종파가 팽팽하게 싸우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문제가 될 게 뻔한데 그런 체험관을 지어야만 했을까. 정말 이해 안 되는 행정이다. 엄연히 법적으로 땅 주인이 있는데 그 땅에서 사는 사람한테 허락을 받은 꼴이 되었으니 분쟁의 불씨를 더 불살라 놓은 격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운영

병꽃나무

 

전통 야생차 체험관, 시간이 일러서인지 문이 굳게 닫혀있어 되돌아 내려간다.

 

 

 

승선교는 보물 제400호 높이 7m, 길이 14m, 너비 3.5m. 길다란 화강암으로 다듬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반원형의 홍예를 쌓았는데, 결구 솜씨가 정교하여 홍예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한다.

 

2개의 승선교를 만들어서 계곡을 건너고 또다시 건너게 한 것은 현세와 선계를 구분하려는 의미이라고 한다.

승선교

첫 번째 다리를 건너 이제 두 번째 다리고 간다.

금창초는 금란초라고도 한다.

승선교에서 본 아래 다리

 

승선교, 기단부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관음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원통전을 말한다.

 

 

 

 

승선교

선녀가 하강했다고 하는 강선루

 

 

 

 

 

강선루는 선암사에 오르는 이들에게 출입용 문루역할을 하는 팔작지붕의 중층누각이다. 승선교와 더불어 선계(仙界)를 연상케 하여 도가적 위기를 연출하는 건물로 순천 송광사의 우화각이나 청량각, 곡성 태안사의 능파각, 옥과 관음사의 금란각 등 남도의 누교에서 유사한 사례를 볼수 있으나 누각형태의 건물은 아니다. 지리산 천은사의 수홍루가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선루 상량문에 의하면 강선루는 불기 2959년(1929년)에 지어 졌으며 화주는 이월영스님이다. 건물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좁은 계류위에 선원교라는 작은 돌다리를 두고 그 위에 세워져서 일종의 누교인 셈이다. 아래는 정면 1칸, 측면 1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목조팔작집이다. 2층 난간은 계자난간이며 우물마루 위 가늘고 낮은 기둥을 얹어 세웠다. 출목 이익공형식으 공포로 중앙간에만 귀면형 화반을 1구씩을 두어 장식하였다. 승선교와 쌍으로 이루는 풍광은 선암사뿐 아니라 국애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절경이다.

 

앞쪽 현판은 근대 명필 성당 김돈희(1871~1936) 글씨

뒤쪽 현판은 서예가 석방 윤용구(1853~1936) 글씨

누각 아래 작은 돌다리 선원교

 

 

 

 

 

삼인당, 인공섬 삼인당은 전라남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도선 국사가 불교의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등 삼법인을 상징하여 만물은 변해서 그대로인 것이 없으며, 이것을 알게 되면 열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862년(경문왕 2) 도선(827~898)이 축조한 장타원형의 연못인데, 이연못 안에 있는 섬은 ‘자이이타’, 밖의 장타원형은 ‘자각각타’를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여름엔 노란어리연이 가득 핀다.

 

 

하마비

 

 

성보 박물관 뒤

 

성보 박물관은 10시부터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 2144점이 보관 전시되어있는데 1753년에 제작된 괘불 (보물 제 1419호)을 비롯하여 105점에 이르는 다양한 불화를 소장하고 있고 우리나라에 40여점밖에 남아있지 않는 각황전철불을 비롯하여 130여점,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순치 14년명동종(유형문화제 제 263호) 을 비롯하여, 전 대각국사가사(중요민속자료 제 244호) 등 140여점의 의식구가 소장되어 있다.

 

 

일주문은 전남 지방문화재 96호로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2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 중간에서 보조 기둥을 잘랐다. 이는 기둥 양 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 하며, 다른 일주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배치되는 공간포를 앞면에 3구, 옆면에 1구씩 두어 공포로 꽉 차 있는 듯하다.

 

기둥 위에는 용 머리를 조각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선암사 일주문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전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조선시대 일주문의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 사천왕문을 세우는 일반사찰과 달리 천왕문이 없는데, 이것은 조계산 장군봉이 사천왕처럼 선암사를 지켜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쪽 현판엔 조계산 선암사로 되어있다.

 

뒤쪽현판엔 고청량산해천사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르는 중심축선상에 위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종루이다. 범종루상량문에 의하여 1935년에 건립되었다. 8단의 계단을 오르는 높은 기단 위에 사다리꼴 모양을 한 초석을 놓고 건물 아래층에 세운 기둥인 누하주을 세웠다. 누하주는 건물에 비하여 다소 가는 느낌이다. 2층은 우물마루를 깔고 누하주 보다 굵은 누상주를 세웠으나 높이가 다소 낮다. 공포는 직절이익공으로 간결하게 꾸몄으며 직사각형의 판형 화반을 설치하였다. 측면에서 대들보로 연결된 충량은 조각된 용두를 두지 않고 용두를 그린 판재를 붙여 장식하여 다소 특이한 모습이다. 이 범종루 자리에 예전에는 7간의 문루가 있었으며 이는 대각국사중창건도기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전남대학교의 발굴조사에서도 그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라는 편액은 60대 초반 호남대 미술과 목인 전종주 교수의 글씨

 

자산홍은 진달래과의 철쭉의 일종으로 붉은 꽃은 영산홍, 진분홍 꽃은 자산홍이라고 한다. 선암사의 자산홍도 많이 알려져 있다.

 

 

범종각

 

만세루, 대웅전을 마주하고 자리한 강당건물로 선운사의 만세루 처럼 누각의 형태가 아니고 평지에 자리한 단층건물이다. 만세루는 '선암사정문상량문'에 의하면 1825년 초창되었다. 만세루의 배면에는 '六朝故寺'라는 편액(김익겸 글씨)이 걸려 있는데 <六祖古寺>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하나 다른 이설도 있다고 한다. 측면 2칸, 정면 5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인 목조건물로 경사지에 단을 두고 세워졌다. 구조상 대웅전을 면하는 쪽이 전면으로 외벌대의 낮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배면은 막돌로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외벌대 기단을 두었다. 공포는 초익공이며 좌우 뺄목이 길게 벋어져 활주를 세워 받치고 있다. 통칸의 넓은 공간을 단일부재인 커다란 대들보로 처리한 강건하고 간결한 건물이다.

설선당(왼쪽)과  만세루 사이로 대웅전 마당으로 들어간다.

 

 

대웅전은 보물 1311호로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석가모니불

뒤에서 본 대웅전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서있다. 보물 제395호로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 구경을 즐겨 다니지만, 절에 가서 불전을 내지는 않지만, 가끔 무료 공양을 받거나 아이들 주려고 보시하는 마음으로 염주를 사오곤 한다. 그런데 이번 선암사에 와서 내가 계획에도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참나, 짱구가 한전 공채에 합격하여 취업했는데 아무래도 관리직이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 마음이 편치 못해서일까. 종무 일을 보는 보살께서 등 하나 달고 가라는 말에 그래, 짱구 것 하나 달아주자 했더니 짱구만 자식인가? 싸가지는 자식이 아니야? 그래서 짱구 것과 싸가지 것을 달자 했더니 밴댕이가 걸리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런 짓(?)은 하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아이들을 위한 마음에 선뜻? 아니 약간 고민하고 가족 등을 달아 달라고 했다.

 

에구 에구 ~ 나 정신 나간 겨? ㅎㅎㅎ 그래도 마음이 가서 한 일이고 보시하는 마음으로 한 것이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 종무소로 따라가 접수하고 등 하나 달았다. 아, 그런데 내 생에 처음 등을 달았는데 인증 샷을 하지 않고 왔네. 아이들 보여 줘야 하는데 아쉽게도 깜박하고 왔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가슴 설레고 막 그래서 잊은 겨? ㅎㅎㅎ

 

 

1986년 3층석탑 중 동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1층의 하부에서 사리 구멍이 발견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로 나온 유물은 사리 장엄구로서 청자항아리와 백자항아리 각 1점씩, 사리 장치로는 금동사리탑과 수정용기 및 사리 1과 등이 발견되어 보물 955호 지정되었다.(문화재청)

 

 

 

설선당은 “선암사승당양간록”의 기록에 의하면 1825년에 건립되었다. 대각국사중창건도기에 동일한 자리에 유사한 형태의 건물이 묘사된 것으로 보아 역대 대방터임을  알 수 있다. 설선당은 사찰의 중심축에서 좌측에 위치한다. 중층인 口자형 건물로 심검당과 비슷한 기능과 형태를 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스님들이 공양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낮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아 두리기둥을 세우고 초익공 형식을 한 단촐한 건물이다. 맞배지붕이 이어져 口자를 이루고 중앙의 조그마한 마당을 향해 건물이 집중 배치된다.

 

외부에서는 단층 건물로 보이나 내부에서는 중층건물이다. 1층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방이고 2층은 수장공간으로 활용한다. 내부는 조그마한 중정을 향하고 있어 개방적이나 외부로는 문이 별로 없고, 창으로 돌려져 다소 폐쇄적인 성향을 갖는다. 대웅전 마당쪽에 면한 대방 옆으로 판장문이 있고 그 문 안쪽에는 커다란 부엌이 있다. 부엌 남측으로 문이 있으며 그 문 밖으로는 장독대가 담장을로 둘러져 설치되어 있다. 거물 서측(후면)으로 마각이 설치되고 북측, 남측, 서측이 담장으로 연결되어 외부와 공간을 경계한다.

 

응향각, 댜웅전 왼쪽에 있는 전각으로 요사채로 대웅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

왼쪽 설선당과 응향각 사잇길

 

지장전은 대웅전을 바라보고 우측에 대웅전을 향하여 있는 건물이다. “선암사제육창건기“에의하면 1823년 소실되어 1824년에 복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장보살과 명부의 십대왕이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명부의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 지장보살로 원래 인도의 지신신앙에서 유래했다. 명부란 사후세계를 말하며 여기서 십대왕의 심판을 받아 전생의 업보에 따라 내생을 받게된다.
지장전은 명부전, 시왕전으로도 불리 우고 영혼을 기원한다는 뜻에서 영원전이라고도 부른다.

 

지장보살과 명부의 십대왕

지장보살

 

심검당, 대웅전의 중심축 오른쪽에 위치한 요사채 건물이며 일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심검당의 상량문인 “선암사선당상량문”에 의하면 1825년에 축조된 건물임을 밝히고 있다. 중앙에 조그마한 마당을 두고 口자형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중층으로 하여 하층는 승방으로 하고 2층에는 사찰에서 사용할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음식, 곡물들을 보관한다. 외부에서 보아서는 1층 건물로 보이나 내부구조는 2층으로 살림집을 연상할 정도로 단촐하다. 원형기둥으로 익공형식을 하였고 팔작지붕이 이어져 口자형을 이룬다. 이 건물에 대칭을 이루어 설선당이라는 비슷한 형태와 기능을 하는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내부로는 조그마한 중정을 두어 개방적이나 외부로는 창문과 벽으로 둘러져 폐쇄적인 기능을 갖는 것이 흥미롭다. 외부에 水나 海등의 글자가 있어 불을 경계하는 상징적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무량수전과 500년된 와송

 

삼성각은 불교의 신이 아닌 우리 고유의 토속 신앙과 합쳐 생긴 신앙 형태로 칠성을 중심으로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

 

칠성

산신도

독성 나반존자

 

 

 

 

장경각

삼나무

 

장경각은 현재는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이나 본디 축성전으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팔작집으로 대웅전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 의하면 중층건물이었으나 사중 구전에 의하면 왜정이후 중수시에 중층구조를 현재와 같이 단층으로 수리하였다 한다. 내부에는 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나 축성전이었던 시절을 증명하듯 내부 벽화에는 감실부 좌우에 좌청룡과 우백호, 건물 내벽에 화조화 및 문무백관이  인물화가 그려져 있어 과거 성수전이었던 송광사의 관음전과 비교된다. 중앙 감실에 모셔졌전 전패가 현재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다. 장경각 편액은 염제 송태회 선생의 글씨이다

 

조계종 선암사 자료사진

조선고적도보의 장경각(문화재청)

 

 

 

조사당

 

 

 

 

 

 

 

불조전은 정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집으로 사역내의 여러 전각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건립된 조선후기 건물로 건립 연대에 관한 자료가 확인되고 가구는 보조가구재를 채용하여 구조적 안정성을 증대시켰고, 공포는 출목익공의 중요한 사례로써 사내 다른 전각의 것과 함께 건축학적으로 충분한 연구가치가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팔상전은 정유재란(1597)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 24년(1698)에 약휴대사가 다시 지은 후, 순조 24년(1824) 해봉대사·눌암대사 등이 다시 지었는데 팔상전도 이때 지은 것이다. 선암사 팔상전은 석가여래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인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계이다. 원래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계 건물이던 것을 나중에 수리하면서, 앞면의 공포만 다포양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여진다. 내부에는 팔상도 외에 도선·서산·무학·지공·나옹 등 우리나라 고승과 33조사(祖師)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원통전은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169호로 조선 현종 1년(1660)에 경준, 경잠, 문정대사가 처음 지었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고쳐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24년(1824)에 다시 고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설치한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기둥 사이에는 꽃받침 모양의 재료를 놓아 그 위쪽의 재료들을 받치고 있다. 건물 앞쪽으로 기둥 2개를 내어 건물 평면이 T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보조 기둥(활주)이 지붕 추녀 부분을 받치고 있다. 선암사 원통전은 아담한 크기의 건물로 사찰건축에서 보기 드문 T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어 주목 받는 건물이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있어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스님께서 예불 중이시라 멀리서 쭉 당겨 살짝 ~                                            `

 

 

지난 주말쯤 왔으면 꽃 빛깔이 더 예뻤을 것 같다. 때를 맞춰 왔다고 온 건데 이삼일 더 앞 당겨 왔으면 좋았을 뻔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자산홍

상선원, 호남제일선원

 

응진당

달마전과 벽안당은 ㄱ자로 붙어있는 건물로 요사와 선방으로 사용한다.

진영당은 영각이라고도 하고 선암사의 중창주나 크게 깨달은 스님의 진영을 모셔 놓은 곳이다.

자산홍

 

 

 

종정원은 문이 닫혀있어 밖에서만 한 컷!!

 

 

 

 

 

 

 

 

 

 

설선당의 장독대

왼쪽 적묵당

 

선암사의 대변소 건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지나 대각암 가는 길에 있는 해천당 옆에 위치해 있다.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으로 처리되었다. 정(丁)자 모양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건물은 북쪽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칸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보기 드문 구성을 하고 있다.

 

 

 

출입구에 설치된 풍판은 이 건물의 특징으로, 풍판 아래부분의 가운데와 양 끝을 약간 들린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이렇게 곡선으로 처리된 입구의 모습은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여주는 한편 드나드는 사람의 머리높이를 생각하여 배려하고 있는 듯하다. 범종루와 이 건물이 있는 해천당 사이에는 지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하여 상부층과 하부층으로 지혜롭게 분리하여 이 건물을 지었다. 건물의 짜임새도 튼튼하고 옛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보존 상태 또한 비교적 좋은 편이다. 선암사의 측간은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920년 이전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남 지방에서 이와 같은 평면구성을 하고 있는 측간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그 가치가 높다.

 

지금도 사용하능한 뒤깐, 그래도 문화재라는 생각에 사진만 찍고 나와 조계산 산행 전 아래 있는 화장실을 이용했다.

 

선암사 /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뒤깐의 뒤

해천당

 

선암사에는 전각이 많아 둘러 보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 되었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은 이른 아침에 와서  그나마 시간이 덜 걸렸지만, 이제 조계산을 넘어 천자암과 송광사를 가야 한다. 가는 길에 그 유명한 보리밥 한 그릇도 사 먹고 가려면 10시 반이 넘고 있어 송광사에서 순천 나가는 버스를 탈 수 있어야 하는데 워낙 거북이라 서둘러 조계산 등산로 가자. 10km 남짓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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