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박물관 같은 화순 운주사

智美 아줌마 2016. 4. 25. 21:06

사진 정리가 너무 늦었다. 화순, 순천 여행 다녀온 지가 언제야? 얼마 전 여행 일지가 있던 스마트 폰이 열 받아 dg는 바람에 여행길의 이야기는 기억이 희미해진 상태인데, 이번 화순 운주사와 순천 선암사 여행 사진을 정리함에 그날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야 한다. 4월 25일 용산역에서 06시 30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고 가기 위해서는 새벽을 여는 사람으로 인해 붐비는 04시 첫 버스 150번을 타고 가야 하는데, 이 첫차는 진짜 사람이 많아 빈자리는커녕 서서 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노선이 없을까? 하고 나오면서 문득 생각나 우리 집 주변 버스 노선을 확인하니까 새벽 4시 즈음에 지나가는 심야 N 버스 15번이 있다. 게다가 150번 버스와 같이 신용산역으로 가는 게 아닌가. 왜 진작에 이 버스를 생각 못 했을까? 늘 기차 여행을 할 때마다 붐비는 첫차 150번만 타고 다녔고 솔직히 N 버스가 다니는 것을 알았어도 일반 버스가 새벽 4시부터 운행을 하니까 종점으로 들어오는 N 버스만 있을 거로 생각했지, 그 시간에도 나오는 N 버스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그 N 15번 버스는 탈 생각도 못 하고 버스 정류장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좀 번거롭더라도 시간을 단축할 방법으로 택시를 타고 미아사거리로 나가서 우이동 방면에서 나오는 버스 중에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용산역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버스를 갈아타고 신용산에 도착하니 평소 도착시각보다 10여 분 더 일찍 도착해서 여유 있었고, 첫차였던 150번 버스는 네 정거장 뒤에 오고 있었다.

 

그렇게 번거로움을 불사하고 새벽 댓바람부터 설치고 다닌 후, 용산역에서 6시 30분 출발한 기차는 광주역에 11시 10분쯤 도착, 광주 유스퀘어 앞 광천 터미널로 먼저 간다. 광천 터미널에서 화순 운주사 가는 버스가 있는데 일단 버스를 타기 전에 먼저 점심을 먹고 이동하기로 했다. 조선 곰탕? 식당 안을 들여다 보니 꽤 크고 깔끔하다. 여기서 곰탕 한 그릇 먹고 길 건너 광천 터미널로 가서 12시 15분에 오는 218번 버스를 타고 운주사로 간다. 다행히 밥을 먹고 터미널 정류장에 왔더니 운주사 가는 버스를 10분 정도 기다렸나? 여행 길에서는 군내 버스로 1시간 이상 가도 지루하지가 않다. 도시와 달리 탁트인 풍경 속을 달리기 때문일까? 여행이 즐거워서 일까? 1시간 20분 정도 소요 되었는데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라남도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자주 보게 된다. 운주사 가는 길에도 제법 긴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어 버스 안에서 찰칵!! 평소에나 여행을 다닐 때나 나는 늘 앞문 맨 앞자리에 앉는다. 시야가 탁 트여 구경하며 가기 좋고, 이렇게 사진도 찍을 수 있어서다.

 

 

버스는 1시간 넘게 달려 드디어 운주사 앞에 도착했다. 이제 살방살방 구경하며 600m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입구에 작은 연못이 있고

꽃양귀비

 

이 안내도와 같이 조성이 된다고 한다. 그럼 운주사와 같이 둘러 보면 더 좋은 볼거리를 제공할 것 같다.

천불 천탑 문화관, 아직 전시된 것이 없고 공사 중인데 개방해놔서 화장실은 이용할 수 있다.

미륵 정원

 

이제 운주사로 들어간다. 붉은 단풍나무가 곳곳에 있어 봄이지만, 가을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지금은 봄이예요. 봄.

 

유채꽃

홍가시나무는 어린 잎이 나올 때는 붉은빛이 띠다가 점자라면서 녹색이 되었다가 가을에 다시 붉은색으로 단풍든다.

운주사 주차장

 

운주사는 규모는 그다지 큰 절은 아니지만, 가운데 탑과 석불, 대웅전이 있는 평지와 양쪽 산자락까지 다 둘러 봐야 한다.

 

죽순은 순(笋), 죽태, 죽자, 탁룡, 죽아, 죽손, 용손, 초황 등으로 말하기도 했다. 한 달을 초순·중순·하순으로 열흘씩 묶어 순(旬)으로 표시하는데 대나무순을 죽순(竹筍)이라 하는 것은 싹이 나와서 열흘일(순)이면 대나무로 자라기 때문에 빨리 서둘지 않으면 못 먹게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죽순이 하루에 120㎝씩 자라는 놀라운 성장 속도를 표현한 이름이다. 죽순은 여러 영양분과 독특한 섬유질을 가진 고급식품이다. 조선시대 문헌인 《증보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에는 죽순밥·죽순정과·죽순나물 등 다양한 죽순 요리법이 수록되어 있다.

 

 

맹종죽은 주로 죽순을 먹기 위해 재배한다고 한다. 맹종죽은 중국 양자강 남쪽에서 자라므로 강남죽이라고도 하고 먹는 대나무라고 하여 식용죽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1898년에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맹종죽이 많이 자라는 곳에서는 죽순맛을 한번 보면 상장도 부수어 먹는다는 말이 있다. 찬영의 《죽보(竹譜)》에는 "죽순 요리는 잘 하면 사람에 이로우나 잘못하면 오히려 해를 끼치는 일이 있다. 죽순을 캘 때에는 바람이 없는 날을 택하고, 캐낸 죽순은 햇볕을 못 보게 하는 것이 좋고 죽피를 붙인 그대로 물에 넣어 오래오래 삶는 것이 좋다.

 

또 죽순은 소갈에 좋고 눈을 맑게 하고 열기를 없앤다고 하며 각기에도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죽순이 흉작인 해는 벼농사도 흉작이고 죽순이 잘 나오면 풍년이 든다고 했으며 또 죽순이 많이 나오는 해는 비가 많다고도 하여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새로 나온 대나무가 묵은 모주母株보다 키가 작게 자라면 그해는 큰바람이 불고 묵은 대보다 크게 자라면 바람이 없을 것이라고 점치기도 했다고 한다. 꿈에 죽순을 보면 길몽으로서 자식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속신이다. 또 꿈에 죽순을 꺾어서 돌아오면 외손자를 얻을 태몽이라 했다.

 

운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도선이 세웠다는 설과 운주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 김여수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 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박태기 꽃

운주사 일주문 양쪽에는 오색 연등이 줄지어 있고 박태기 꽃과 영산홍이 예쁘게 피어있는 꽃길이다.

운주사 일주문 현판, 영귀산 운주사로 되어있다. 영귀산은 거북이 산을 칭한다고 한다.

영산홍

 

 

 

경내로 들어가는 길

큰개불알꽃과 꽃마리(위)

뱀딸기꽃

 

동백

 

일주문을 들어가면 왼쪽 나무 아래 석불이 모여있다. 모양도 다르고 얼굴 표정도 다 다른데, 대부분 석불이 두 손을 모은 합장을 취하고 있다.

이곳의 4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없이 깨끗하나 오른쪽 끝에 있는 석불을 보면 오래된 것 같다.

 

 

 

 

 

 

 

 

 

 

 

 

 

 

이 별자리를 통해 보면 와불은 북극성에 해당된다고 한다. (자료 사진 박종철 박사의 별 이야기 중에서)

 

가운데 9층 석탑, 7층 석탑을 둘러 보고 오른쪽 산자락에 있는 5층 거지 석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산책로를 따라 둘러 보고 다시 내려와 석불조감과 원형 다층 떡탑, 대웅전과 지장전을 보고 공사 바위를 거쳐 마애여래좌상 앞을 지나 와불이 있왼쪽 산자락으로 올라간다.

 

 

 

연장 바위, 이 바위는 운주사의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다. 천불과 천탑을 하루만에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하여 석공들과 동자승이 천불천탑을 하루만에 세우고 있었다. 이때 일하기를 싫어한 동자승이 일부러 닭 소리를 내자 석동들이 날이 샌줄 알고 연장을 이 바위에 두고 갔다고 하여 이 바위를 연장바위라고 한다. 연장바위 앞에는 운주사 안 여기저기에 있던 석재 중 원반형 옥개석 1개와 활주초석(건물 모서리에 설치된 보조기둥인 활주의 기초가 되는 석재) 1개 등을 모아 놓았다.

 

연장 바위 왼쪽 산자락, 모터 소리가 난다 했더니 와불 쪽 산을 순찰하는 경비 드론 같다. 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거지탑이라고 하는 5층 석탑과 그 아래 석불이 나란히 서 있다.

 

암벽은 높이 약 8m, 너비 약 20m이며 수직 단애면에 대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셨다. 현재는 좌불 1구와 입상 5구가 있는데 입상 1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좌대를 갖추고 있다. 석불군은 두 손을 합장한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나머지 불상이 배치되어 있다. 1984년 발굴조사 시 맨 오른쪽 불상대좌 뒤편에서 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상과 여래 입상이 출퇴되었다.

 

 

9층 석탑 보물 제 796호, 탑 높이 1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화사하고 수려한 탑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 세련미가 느껴진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형식과 같아서 백제계 석탑이라 한다. 탑신석 안에 겹마름모꼴의 기하학적 무늬와 네잎의 꽃잎 문양은 유일하게 운주사의 탑만이 간직하고 있다. 이 탑을 운주사 중심탑이라하여 돛대탑이라 부르기도한다.

 

겹마름모꼴의 기하학적 무늬와 네잎의 꽃잎 문양

 

 

 

7층 석탑 유형문화재 제 276호,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우람한 옥개석의 인상이 신라탑의 원형인 감포 감은사지 석탑과 유형이 닮아서 탑의 형식적 분류상 신라탑이라고 한다. 예전 백제땅인데 왜 이곳에 신라탑이 함께 조형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운주사 탑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매우 파격적이다. 반듯한 기단부와 우람한 옥개석이 연이어 오른 모습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내의 웅혼한 기상이 넘쳐 흐르는 듯 하다.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

 

7층 석탑 유형문화재 277호, 탑신에 개성적인 마름모꼴의 연속 교차문양을 갖고있는 날렵한 인상의 칠층석탑이다. 기단석도 잘 다듬어서 이곳으로 운반하여 그 위에 직사각형으로 돋을 새김하여 탑을 세웠다. 운주사의 탑의 기단부나 탑신부는 네 개의 직사각형 돌을 반듯하게 다듬어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지붕돌)을 올려 놓은 형식으로 건립하였다. 때문에 그 가운데는 텅비어 있다. 네개의 돌판을 이어 올려 육중한 옥개석의 무게 중심을 지탱하고 있는 그 신비로운 건축술을 생각해보면 조상들의 지혜가 어떠한것인가를 가늠해보게 한다.

 

연속 쌍교차 무늬(XX)와 측면의 마름모꼴(◇)의 문양으로 국내석탑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제작시기는 고려시대이다.

 

 

 

광배를 갖춘 불상 유형문화재 제 274호,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을 하고 있는 사다리꼴형의 판석에 돋을 새김하여 새겼다. 가늘고 길게 솟은 코, 두툼한 입술 크고 긴 귓바퀴가 선명하다. 육계는 솟아 있으며 합장한 수인과 법의 자락은 그저 선만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광배를 갖춘 불상은 매우 특이한 유형이다.

 

 

운주사의 다양한 석불과 석탑은 잘 바스라지는 응회암으로 만들어져 있어 화강암질의 강한 대리석보다 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석공이 아니면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고 한다. 그 석질로 빚어만든 탑이 이렇게 수많은 세월의 풍상을 버티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이곳의 조형자들의 기술이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는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고 한다.

 

민들레

 

 

 

 

수시로 계속 드론이 날고 있는데 대부분이 와불쪽 하늘을 날고 있다. 오른쪽 산은 훤히 보이는데 왼쪽 저 산자락 너머에 와불이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아 그런 것 같다. 2008년 4월 6일에 와불 아래 칠성 바위 부근에서 산불이 났다고 하니 더 경비를 하는 것 같다.

 

불가사의한 신비를 가지고 있는 운주사에서도 인증 샷!! 연장 바위 위에 카메라를 올려 놓고 뛰어 ~

탑을 배경으로 찍었더니 내가 너무 작네. 그래서 클로즈업!!

이제 오른족 거지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거지탑 5층 석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5층 석탑, 거지탑으로 불린다는데 거지탑은 돌을 다듬지 않고 원래 모양대로 탑신에 올려 놓은 못생긴 탑을 말하며 거지탑, 걸레탑, 동양치탑이라고 한다.

탑 아래에도 석불이 있다.

아직 나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철쭉이 그래도 꽃을 피었네.

탑 아래 석불을 보고 올라 오는데 각시붓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다.

건너 와불이 있는 산

아래 9층탑이 내려다 보이고 . . .

5층 탑에서 위로 나무 계단이 있어 올라가 본다.

계던 위에서 내려다 본 5층 석탑

전망대와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

건너 산에 탑과 둥근 돌이 보이네.

운주사 전각 지붕들이 보인다. 이 길 따라 가다 보면 내려가는 길이 있겠지?

작은 다리도 건너고 . . .

 

7층 석탑 문화재자료 제257호, 수직문 칠층석탑 운주사 산중턱의 높직한 암반위에 있는 석탑이다. 지대석 등의 별 다른 시설없이 암반 위에 방형단을 만들어 기단부를 대신하고 탑신부를 얹었다. 모서리 기둥 사이의 면석에는 가늘게 층에 따라 7~11선의 수직 종선문을 음각하였는데 각 층이 똑같은 형태이다. 각 층의 옥개석 하면에는 받침을 생략하고 대신 마름모꼴을 음각하였다. 현재 6층까지 탑신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7층이었을 것으로 추전된다. 전체 높이는 7.2m이며 제작 시기는 고려시대이다.

 

 

내가 왔던 길도 돌아 보고 . . .

나무 계단이네. 가을 같은 단풍 길이다. 가을 아니예요. 지금은 봄입니다.

 

 

가운데 중앙에는 사각형 연화대좌를 갖춘 불좌상이 있고 그 위에 입상의 석불이 배치되어 있다.

 

중앙의 석불은 두 손의 형태는 없어졌으나 다른 불상들보다 입체감 있게 묘사되었는데 얼굴에는 긴 귀와 코의 흔적이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두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의 법의를 걸쳤다. 또 복련(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이 묘사된 사각형의 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좌우 석불은 다른 불상군의 석불과 마찬가지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9층 탑과 7층 탑, 광배석불좌상이 있는 방향

 

7층석탑 유형문화재 278호, 다른 석탑이 방형 지대석을 설치하여 기단을 대신한 것과 달리 규모가 작고 낮은 지대석 위에 1단 괴임을 마련하여 탑을 세웠다. 옥개석의 층급 받침은 약하며 상면에 탑신괴임이 생략되었다. 넓고 평평한 옥개석과 그 윗면 네 귀퉁이의 우동마루가 예리한 선을 이루지 않고 두툼하게 표현된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기법이어서 주목된다. 또한 옥개석의 폭과 탑신 높이의 체감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탑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라 추정된다.

 

 

석조불감 보물 제797호,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그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단독으로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인 예이다. 운주사에 산재한 다양한 형태의 석탑과 석불 중 석조불감은 골짜기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앞뒤로 각각 탑이 1기씩 있어 야외 불당의 주존불 구실을 하는 배치를 보이고 있다.

 

불감은 팔작형태의 지붕을 갖추고 그 위에 용마루 등이 조각되어 있는 목조 건축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감실 내부는 남북으로 통하게 하여 불상 2구가 등을 맞댄 형태로 배치하였다. 이들 좌상은 단순화된 형태를 보이는데 경직되고 도식적인 평면화된 표현은 고려시대의 지방화 된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사례를 찾을 수 없으며 등을 맞댄 쌍배불상 또한 유례가 없는 특이한 형식으로 주목된다.

 

 

석재 위아래 양쪽에 동그랗게 홈이 파여있어 아마도 문을 설치했을거라 짐작이 된다.

 

원형 다층석탑(연화탑) 보물 제798호,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원형석탑이다. 탑의 구성은 하나의 돌로 된 거북이 모양의 지대석 위에 두툼한 원형 단을 만들고 탑을 세웠다. 기단 면석은 5매석을 조립하여 8각을 이루고 원형의 갑석에는 연꽃을 선으로 표현하였다. 원형의 탑신과 옥개석은 모두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이색적인 면이 보이는 이 원형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5.8m이다.

 

거북 모양의 지대석 위에 16장의 연꽃잎으로 장식된 연화탑

 

 

지혜당(서점, 찻집)

보제루(종무소)

3층석탑

실패탑

범종루

 

4층석탑 유형문화재 제 280호, 탑신은 4층의 옥개석까지 남아있고 그 이상 부재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지붕돌인 옥개석 상부는 일반적인 탑의 곡선 형태가 아니고 전탑과 같은 3단의 층급형으로 이뤄진 모전석탑 유형이다. 즉 돌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것이 아니라 통들을 계단형으로 깍은 것이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드문 예로서 각 층 옥개석의 모서리 부분에서는 가벼운 반전이 있으며 강진 월남사지 모전석탑과 비교된다. 전체 높이는 3.23m이며 제작시기는 고려시대이다.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

 

미륵번

 

 

발형 다층석탑 유형문화재 제 282호, 바루탑, 원구탑, 항아리탑, 오가리탑, 시루탑으로 불리며, 대웅전 뒤편에 있는 탑으로 매우 독특한 모양의 탑이다. 1층부터 4층까지의 형태가 주판알 같은 모습이다. 현재는 석괴가 4석이나 "조선고적도보"에 따르면 원래는 7석의 괴석이 얹혀 있었다고 한다. 아래쪽부터 사각형과 원형, 원구형이 중첩된 평면인데도 조화가 잘 된다. 독특한 형태의 석탑이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고 기발한 조영기법을 보이는 석탑으로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석탑이다.

 

 

법당에서 약 20m 떨어진 불사(공사) 바위 아래에 있는 암벽 남쪽에 있다. 암벽은 높이 15m, 너비 20m로 나애여래좌상이 새겨진 암반과 연결되며 중앙부와 하단을 깍아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감실 형태를 이루고 있다. 주존불은 상대, 중대, 하대를 모두 갖추었고 대형 석불입상은 왼팔만 가슴에 댄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원래는 다른 석불군과 마찬가지로 암벽 아래에 좌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입불을 배치한 석불군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군에는 암벽과 방향이 같은 좌상과 그 오른쪽에 소형 좌상 1구, 중앙에 구멍이 있는 불두의 조각과 서로 어깨를 기댄 입상 2구가 있다.

묘음 보살

불사 바위로 올라가는 길

불사 바위로 올라가면서 본 운주사 전각 지붕들

 

와 ~ 멀리 9층 탑, 7층 탑들이 보인다.

탑이 있는 곳을 당겨 찍어 보고

 

조선총독부간행 조선고적도보 수록자료 1918년 운주사 전경(문화재청), 조선고적도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우리나라 고적의 도판을 모은 책. 15첩, 31.2×42.1cm. 총독부 후원으로 일본인 학자 세키노 다다시, 다니이 사이이치, 구리야마 슌이치 등이 1915년부터 35년까지 20년간에 걸쳐 펴냈다. 낙랑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적과 각종 유물들의 도판을 모아놓았다.

 

 

불사(공사) 바위는 운주사의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다. 도선국사가 운주사에 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들 당시 이곳에 앉아 운주사를 내려다 보며 공사감독을 했다고 해서 불사바위라 부른다. 바위 이곳 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 바위라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공사 바위에 올라갔다가 구멍들은 찍지 못하고 다시 전각이 있는 곳으로 다시 내려 간다. 사람들이 내려가기 기다리는데 또 올라오기에 포기!!

 

 

 

마애 여래 좌상이 있는 곳

 

마애 여래 좌상 유형문화재 제 275호, 거대한 바위벼랑 암벽의 요철부분을 그대로 살려 부조로 새긴 불상이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있으나 머리와 이마가 거의 없고 희미한 눈썹과 귀는 양각되었으며 귓바퀴까지 음각되었다. 타원형으로 부드럽게 부조된 상호는 눈과 입이 희미하다.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 최근에도 바위가 균열되어 떨어지는 등 파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마애여래좌상 위에 바위구멍이 뚫어진 걸로 보아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운주사 석불군 가운데 유일한 마애불이며 광배나 좌대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5.16m로 규모가 크다.

 

 

명당탑, 운주사의 주산인 거북이산(영귀산) 머리 정수리에 위치한 탑으로써 넓적한 하대석에 사각형의 기단면석 위에 놓인 둥근 원반형 석탑이다. 운주사의 석질은 이렇게 시루떡처럼 잘 갈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특이한 형식의 석탑 제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넓고 둥근 돌을 둥근 탑신을 세운 그 위에 층층이 올려 놓았다. 그러나 옥개석 밑면을 보면 연화무늬가 둥그렇게 새겨져 있다. 지금 남은 탑은 자세히 보면 그 석질이 서로 다른면을 발견할수 있다. 이곳이 천년을 지배할 황제가 태어날 천년 군황지혈이라 하여 명당을 찾는 무리들에 의하여 그 훼손의 정도가 남다르다. ↓아래의 4층 석탑도 훼손의 정도가 극심하다. 석탑의 기본 구조는 단층 기반위에 탑신부를 만든 것인데 4매의 판석으로 짜인 기단 중석은 남면의 1매가 없어졌다. 운주사에는 이 탑 이외에도 몇기의 원형탑이 있으나 모두 서로 형태가 달라서 주목된다.

 

조선총독부간행 조선고적도보 수록자료 1918년 명당탑 사진(문화재청)

 

4층 석탑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단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부를 올린 형식의 탑이다. 이 석탑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부재를 혼합한 흔적이 있어 본래의 석탑과는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경내로 내려가는 길

대웅전 아래 감로수

 

이제 와불이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숨가쁘게 올라가니까 탑 두 개가 있다.

 

거북 바위 오층석탑 문화재자료 256호,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위에 1매의 방형판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탑신부를 세웠다. 초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짜맞추었는데 각 면의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뚜렷하며 상면에 탑신괴임이 생략되었다. 상륜부는 복발형의 부재가 안치되고 그 위에 보주가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치석의 기법이나 각 부재의 비례가 안정된 탑으로 제작시기는 고려시대로 보인다. 전체 높이는 5.57m이다.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 유형문화재 279호, 거북바위라 부르는 경사진 암반을 완만하게 다듬어 기단부 없이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부를 세웠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의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 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다. 2층에서 7층까지 탑신 4면에 X자문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 상면의 우동마루가 두툼하게 튀어나오는 등 한국석탑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 탑이다. 이러한 기법은 모두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 것이며 고려시대에 나타난 백제계 석탑의 특징으로 전체높이는 7.17.m이다.

와불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

 

서쪽 산기슭에 있는 와불로 가는 길 중간의 거북 바위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 산자락에는 석불군이 다섯이 있는 것에 비해 반대편인 이곳에는 석불군이 한곳 뿐이다. 암벽의 크기는 높이 5m, 너비 15m이고 공간의 넓이는 일부 암반이 떨어져 나가 3mX4mX2m이다. 이는 너무 깊게 암벽 감실을 조성하려다 상부 암반이 무너져 내린 결과로 추정된다. 암벽에는 높이 4m 지점에 지름 1m정도의 암벽을 다듬은 흔적이 보여 석불군 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대형 불상을 모시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은 중앙에 좌상, 그 주위에 입상들이 배열되어 있다. 불상은 9구이나 대좌는 12개이다. 이로 보아 불상 3구가 다은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간행 조선고적도보 1930년 수록자료 (문화재청)

거북 바위 위의 7층 석탑과 석불들

와불 있는 곳으로 올라가자.

올라가면서 내려다 본 거북 바위

 

 

시위불, 와불아래 시위불로 불리는 석불 입상이 있는데 운주사 일대의 석불 중 가장 전형적이며 특히 운주사와 관련된 설화의 중심부분이기도 하다. 와불을 중심으로 주불이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좌협시불이 석가모니불, 우협시불이 노사나불이다 .

 

 

와불,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좌불 12.7미터, 입상 10.26미터의 대단히 큰 불상이다.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천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운주사의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한 삼불 신앙의 형태로서 떼어서 어딘가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과연 어디다 세우려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역사의 기록에서 이런 대단위 불사가 사라진 까닭을 생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전설에 따르면 하룻밤 새 천불천탑을 다 세우고 와불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동자승의 거짓 새벽닭 우는 소리에 중단했다고 한다.

 

와불을 알현했으니 이제 건너편에서 본 산길로 내려가자.

 

채석장, 운주사의 많은 석불과 석탑이 이곳의 석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석재의 결을 따라 구멍을 일렬로 뚫고 그 곳에 쐐기를 박아 돌을 쪼갰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채석장에서 본 풍경

 

건너편 전망대에서 본 칠성바위와 7층 석탑

안내 표지판 자료 사진

 

7층 석탑 유형문화재 281호, 칠성 바위라 불리는 곳의 큰 암반위에 서있는 탑이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등의 별다른 시설 없이 자연 암반 위에 탑신부만을 건립하였다. 탑신석 각면에는 양쪽 귀퉁이에서 넓직한 우주가 두드러지게 모각되어 약간은 둔중한 느낌이 든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뚜렷하며 상면에 탑신 괴임이 생략되었다. 대체적으로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이고 네 귀퉁이에 반전이 나타나며 낙수면도 평박한 편이다. 7층 옥개석 정상에는 1석으로 조성된 상륜부가 얹혀져 있다. 전체 높이는 7m이고 제작시기는 고려시대이다.

 

 

칠성 바위, 북두칠성을 표현한 바위인데 그 크기가 엄청 크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돌의 배열과 북두칠성의 방위각과 실제 밝기와 돌의 크기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1999년 4월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새롭게 밝혀지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에서 운주사의 탑 배치가 일등성별의 배치와 닮아있다는 주장이 펼쳐졌는데 그때 출현했던 김일권 교수는 문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에 있다는 것이 소중한 것이지 ‘옳다 그르다’ 의 문제가 아닌 거 같다라고 했단다. 어찌 되었든 어떻게 기계로 다듬은 것처럼 저렇게 동그랄까? 시멘트로 메꾼 부분이 있다더니, 설마 저렇게 매끄럽게 덧바르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2008년 4월 6일 이곳 산자락에 불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경비용 드론이 수시로 계속 날았나 보다.

 

 

 

운주사를 한 바퀴 다 돌고 9층 석탑이 있는 가운데로 내려왔다. 운주사를 둘러 보니 전체가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항간에는 운주사 구역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만큼 귀한 유물인 것 같아서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다만 너무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훼손되지 않게 잘 보호했으면 한다. 이제 화순역으로 가서 순천으로 간다.

 

 

자운영

영산홍

 

나가면서 본 일주문 안쪽의 편액, 천불 천탑 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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