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길동무와 함께 남산 걷기

智美 아줌마 2016. 4. 17. 18:43

어제 북한산 둘레길 마지막 한 구간 남은 15구간 안골 길을 걷고 있는데 고흥에 사는 언니가 서울에 와 있다고 문자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하고 내일 시간이 된다고 해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지난번에 지인들과 남산 순환도로 걸을 때 너무 예뻐서 언니랑 다시 걸을 생각에 동대입구역에서 12시에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내 기억엔 장충단 공원 앞이 동대입구역 6번 출구인 것 같았지만, 지금 산행 중이니까 확실하게 몇 번 출구인지 집에 가서 알아보고 문자 넣어 줄게 했다. 그리고 오늘 약속 날 아침, 출발 전에 남산 트레킹 하게 편한 복장으로 6번 출구로 나오라고 문자를 했는데 답장이 없어 그래도 알아서 오겠지 하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갔다.

 

"언니, 어디쯤 왔어? " 도착해서 전화하니, 언니는 내가 몇 번 출구인지 알아서 문자 넣어준다고 한 걸 깜박하고, 산행 마치고 집에 가서 전화한다고 했으니 연락 오겠지 하고는 약속은 잊은 채, 일요일이라 아침에 성당엘 갔다고 한다. 뭔 일이여? 다행히 서울 집이 금호동이라 멀지 않아서 사진 찍으며 기다리면 될 것 같아 천천히 오라고 했다. 20여 분 지나 헐레벌떡 도착한 언니, "언니, 남산 걷자고 하니 복장이 이게 뭐꼬? " 내 전화 받고, 아우가 기다리는데 언제 집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오느냐며 성당에서 바로 왔다고 한다. 이젠 우리 나이에 이런 헤프닝이 비일비재함에 서글프지만, 어쩌겠는가? 웃고 말아야지. 그렇게 언니를 만나 점심 먹고 장충단 공원에서 남산 순환도로를 걸어 옛 어린이 회관까지 걸었다.

 

고흥 사는 언니는 여행길에서 만난 나보다 한 살 많은 길동무다. 대부분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언니랑은 인연의 끈을 맺은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깜박 증세가 나보다 더 중증이지만, 경위 바르고 심성이 따뜻해 남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언니와 내가 사는 곳이 너무 멀다는 것, 가까이에 살면 정말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을 텐데 너.무.멀.어.요.

 

 

 

 

 

수표교, 얼마  전, 지인들과 왔을 때보다 꽃이 많이 피어있어서 더 예쁜 장충단 공원

 

 

 

 

 

 

 

고흥 사는 언니

 

 

할미꽃

 

 

돌단풍

 

 

외솔 최현배 기념비

 

최현배 선생은 본관 경주. 호 외솔. 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10년부터 3년간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19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원자격증을 받았으나 관공립 고등 보통학교 교원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 확보를 위하여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에 다시 수학, 이어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1925년 동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하였다. 1926년 연희전문 교수가 되고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강제 사직하였다.

 

그 동안 이화여자전문 교수도 겸직하였는데 실직한 동안 한글 연구의 완성을 위해 《한글갈正音學》을 발간하였고 1941년 연희전문에 복직, 도서관에 근무하였다. 조선어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8·15광복 때까지 3년간 복역하였다. 8·15광복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교과서 행정을 담당, 그 기틀을 잡았으며 이어 한글학회 상무이사·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1년 다시 문교부 편수국장이 되었다가 1954년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로 돌아가 교수·문과대학장·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에 《우리말본》《한글갈》《글자의 혁명》《나라 사랑의 길》 등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수수꽃다리

 

복사꽃

사진 찍는 동안 혼자 올라가는 언니, 언니야 같이 가자.

복사꽃

 

 

명자꽃

 

 

 

남산 순환도로로 올라왔다.

 

요즘 나무에 자꾸에 눈길이 간다. 볼 수록 마음이 끌린다.

 

 

 

 

와우 ~ 우째 이런 사진이 찍혔을까?

 

남산에 이런 계곡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 물길이 어디서 왔을까?

현호색

전에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길을 걸을 때 어떤 농원에도 이 꽃이 있었는데 쥔장도 꽃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너 이름이 뭐니?

미국제비꽃인 종지나물

아이리스

철쭉

가을 단풍처럼 빛깔이 고운 단풍 나무, 나무야 지금 봄이거든.

키가 큰 겹 벚꽃

귀룽나무 꽃

 

금낭화

 

튤립

와 ~ 이 튤립은 특이하게 생겼네.

디모르포세카

앵초

조팝나무

 

와룡묘는 중국 삼국시대 당시의 정치가였던 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이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조 38년(1605) 평안도 영유현에 공식으로 와룡묘를 짓게 하였고, 그 후부터 왕들이 관원을 보내어 제를 올리거나 제문을 지어 보낸 예도 있으며, 사액의 예도 전하는데, 이 와룡묘와의 연관성은 확실치 않다. 기와 지붕을 얹은 건물로, 내부로 들어가면 2m 크기의 제갈공명 석고상과 함께 2.5m 높이의 관운장의 석고상이 있고, 그밖에 대북, 소북, 종 등 의식용 악기들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고종의 후궁이 된 엄상궁이 처음 세웠다고 전하는데, 1924년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1934년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단군묘, 제석전, 약사전, 삼성각, 요사, 문신각 등이 함께 있어, 와룡묘가 중국 도교계의 신령을 모신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우리의 토속신앙과 결합된 무속신앙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나는 종이꽃

 

 

목멱산방, 남산의 옛 이름 목멱산의 이름으로 상호를 정한 식당

목멱산방 옆의 작은 폭포

언니가 찍어 준 인증 샷!!

 

 

오늘 하루 고흥 사는 언니랑 예쁜 꽃길, 남산 순환도로를 걷고 옛 어린이 회관 아래서 버스를 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진은 2010년 11월 30일 채경이 아우와 남산 트레킹 때 찍은 사진이다. 벌써 채경이와 남산 걸은 지가 5년이 넘어 6년이 되어가네. 세월 참 빠르다. 오래전 학창 시절에 어린이 회관 바로 아래 지금 버스 정거장 건너편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그곳에 사랑의 종이 있어 매일 밤 10시에 남산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도 집에 돌아가도록 발길을 재촉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갑시다. " 1970년 4월 24일부터 종을 치기 시작했다고 하는 데 진작에 없어졌겠지? 그때야 통행금지 시간이 있을 때였지만, 지금은 밤낮 구별 없이 거리를 누비며 사는 세상이니 살기 편해졌다고 해야 하나?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악행이 난무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 같아 안타깝다. 더불어 사는 세상, 범죄가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