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와 헤어져 이젠 혼자 팔랑포로 내려가 옥포 해안으로 간다. 지금 1시 40분, 옥포항에 도착하면 다시 장승포 터미널로 가야 하는데 4시 50분 서울 가는 버스표를 예매한 상태라 늦어도 4시 3, 40분까지 장승포 터미널에 가야 한다. 팔랑포에서 옥포항까지 2, 4km니까 쉬엄쉬엄 간다고 해도 3시 반쯤이면 옥포항에 도착하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 시각에 도착했고 옥포항에서 장승포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거장을 찾아가는 중에 옥포 새마을 동산이라는 곳이 있어 잠시 들렸다가 옥포 사거리 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다행히 장승포 터미널 가는 버스가 바로 와서 여유 있게 터미널로 갈 수 있었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김영삼 대통령 생가는 들리지 않고 장승포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애광원 에빈하우스를 가려고 했다. 터미널과 가까워 서울 가는 버스 시간 맞추며 둘러 보기 괜찮을 것 같아서 마지막 일정을 애광원으로 했는데 애광원은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버스 타고 장승포로 가면서 시간을 보니까 서울행 버스를 타려면 40분 정도 시간이 남을 것 같아 터미널 가기 전에 애광원에 잠깐 들릴까 하다가 그리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라서 자칫 차 시간 맞추려 허둥대야 할 것 같았고 스마트폰 베터리도 충전해야 하고 또 쉬고 싶어 바로 터미널 앞에 있는 롯데리아로 갔다. 폰 충전하면서 아이스 커피 한 잔 먹으면서 편하게 쉬다가 2박 3일 거제도 지심도 여행 일정을 마치게 되었다.
옥포대첩 기념공원 못미쳐 팔랑포로 내려가는 입구
멀리 대우조선 해양
뱀딸기
이운룡 장군(1562∼1610)은 청도 출신의 무신으로 자는 경명이고, 호는 동계이다. 1585년(선조 18)에 24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유성룡의 천거로 1587년(선조 20)에 선전관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 옥포만호로 많은 공을 세운 후 응천 현감에 승진되었다. 그 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순신의 순국 후 도총부 부총관, 포도대장, 함경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에 49세로 세상을 뜬 후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가는 곳마다 동백나무를 보게 되는 거제도
말티 강아지를 안고 가는 아저씨, 계단은 걸어내려가지 않으려고 해서 안고 내려간다고 한다.
옥포 해안 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명칭으로 1구간은 옥포항에서 팔랑포 마을까지 1. 95km, 2구간은 팔랑포 마을에서 덕포 해수욕장까지 3. 45km, 3구간은 덕포 해수욕장에서 김영삼 대통령 생가까지 2. 9km로 약 8. 3km로 되어있는데 내가 걸을 길은 1구간이다.
팔랑포 마을
마을회관 왼쪽으로 간다.
도시에나 있을 법한 예쁜 집
홍매화
벚꽃도 아닌 것이 넌 앵두나무니? 뭐니?
팔랑포로 내려오면서 보였던 팔각정이 아니라 사각정이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산으로 올라간다.
고깔제비꽃인가?
중간 중간 벤취가 있고 정자도 있어 쉬어가며 걷기에 좋은 길이다.
양지꽃
이곳에 벚꽃이 활짝
아고 ~ 귀여워라. 너도 나무라고 열매까지 달렸네. ㅎㅎㅎ
바위에 그림이?
솜나물 꽃
정운 장군은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남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에서 훈련참군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에 28세로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 등을 거치고 함경도 거산찰방을 거쳐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여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만호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 ”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라 공을 세웠다. 당포, 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이 적의 대포는 바로 붙잡힌 조선 포로가 쏜 대포라고 한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저 바위를 두륨바위라고 하나?
앗!! 깜짝이야 시커먼 개가 이 산 중에? 설마 떠돌이 개? 좀 있으니까 쥔네가 따라왔는데 이봐요, 개 목줄 묶고 다녀야지요. 개도 크구먼.
가운데 산봉우리 오른쪽으로 내려와 옥포대첩 기념탑 상단부가 보이고 산봉우리 바로 아래가 팔랑포 마을
어라? 나무 테크 길인가 본데 공사 중이라니, 그곳이 궁금해서 살짝 내려가 보았다.
와우 ~ 내려오길 잘했다. 바로 밑에 두륨바위인지 뭔 바위인지가 있고
아, 이 부분이 훼손이 되었나 보다. 정자까지 내려갈 수는 있지만, 가지말라니까 되돌아올라 왔다.
다시 올라와 가던 길로 이어서 간다.
아까 정자 아래 그 부분이 조금 망가졌는데 이곳까지 출입 금지다.
조선 업계가 다 힘들다고 하는데 빨리 전과 같이 힘차게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등대풀
출입금지 구간 나무 테크 길이 보인다.
바위 위에서 자라는 소나무들
옥포항 400m
갯바위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있네. 낚시하고 제발 깨끗하게 치우고 가세요.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 보고 . . .
옥포여객터미널
옥포 해전은 1592년(선조 25) 5월 7일 옥포(지금의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의 기세에 밀려 많은 군사를 잃었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의 목줄인 옥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휘하의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당포 앞바다에서 합세하였다. 이때 원균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70여 척의 전선을 모두 잃고 겨우 6척(판옥선 4척, 협선 2척)으로 합세하였다.
5월 7일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해서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의 결과 아군은 별 피해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려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이어 합포(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적선 5척, 다음날 적진포(통영시 광도면)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커다란 이 둥근 철통은 무엇일까?
옥포항의 풍경
옥포항에서 장승포 가는 버스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옥포해양안전서에 가서 길을 묻고 간다.
옥포 새마을 동산
거북선은 설치 작업 중인데 들어가 볼 수 있을 만큼 크다.
롯데마트 거제점, 옥포사거리 버스 정거장에서 10번 버스를 타고 장승포 터미널로 간다. 옥포항에서 옥포사거리 버스 정거장까지 꽤 거리가 있다. 지도에서 찾아보니까 대략 700m 정도였는데 직선 길이 아니라서 중간에 행인에게 물어보고 찾아갔다. 장승포에 도착 후 롯데리아에서 쉬다가 2박 3일 거제 지심도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go go go . . .
'나 홀로 떠나는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랗게 물든 띠띠미 마을 (0) | 2016.04.08 |
---|---|
남산 벚꽃 길 걷기 (0) | 2016.04.04 |
김영삼 대통령 생가와 기록 전시관 (0) | 2016.03.29 |
거제 옥포대첩 기념공원 (0) | 2016.03.29 |
거제도 옥포 중앙공원 (0) | 2016.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