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서울 동관왕묘

智美 아줌마 2016. 3. 14. 14:31

서울대 병원 오전 진료가 있는 날이라 나간 김에 동묘와 벼룩시장 구경하고 왔는데 예전엔 밴댕이가 자주 데리고 나갔던 별천지 같은 황학동 벼룩시장이다. 이곳 벼룩시장에선 탱크도 만들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없는 게 없다고 그렇게 표현한다. 설마, 탱크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느냐마는 그 정도로 수만만 가지가 있는 만물상이라는 것이겠지. 벌써 몇 년이 지났나? 전에 가니까 보수 공사 중이라 관람하지 못해서 종로구에 문의한 적이 있다. 원하면 관람할 수 있게 조처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공사 자재가 널려 있고 일하시는 분들께 폐를 끼치게 될까 봐 다음에 관람하겠다고 되돌아 왔다. 마음먹고 갔을 때 보고 오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서 모임 장소도 알아볼 겸해서 동대문으로 나가 동묘부터 둘러 봤다.

동묘 외삼문

당간지주

 

동묘는 보물 제142호인 동묘는『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시는 묘우로 조선 말기에는 관왕을 관제라고 높여 불러 관제묘라고도 불렀으며, 문선왕(공자)을 모시는 문묘에 대응해 무안왕인 관우를 모신다 하여 무묘라고도 일컬었다. 이곳 외에도 관우를 받드는 사당으로는 선조 31년(1598)에 남관왕묘가, 고종 20년(1883)에는 북묘가, 광무 6년(1902)에는 서묘가 세워졌었는데 지금은 동묘만이 남아 있다. 동묘는 이들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제대로 격식을 갖춘 대표적인 관우의 사당이다.

 

그런데 왜 중국 촉한의 장군을 사당까지 만들어가며 모시게 된 걸까?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원병을 이끌고 참전한 명나라 장수 진인은 관우의 숭배자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겨울, 그는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을 공격하다 부상을 입고 한양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완쾌 뒤 그는 관우의 음덕이 있었다 하여 관우의 소상을 개인적으로 봉안하여 받들었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함께 참전했던 명의 여러 장수가 돈을 내고 우리 조정에서도 건립 비용을 보태 1598년 5월에 사당을 완공하였다. 이것이 남관왕묘다.

 

 

전쟁이 끝난 뒤 명의 신종은 사신 편에 “관공은 원래 영령이 비범하여 임진왜란 때 귀국을 음으로 도움이 지대하였으니 묘를 세워 그 공을 갚는 것이 마땅하다”는 조서와 4천 금의 건립 기금을 보내와 묘우 설립을 강력하게 종용하였다. 이에 우리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동대문 밖에 터를 잡아 관왕묘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것이 지금의 동묘이다. 선조 35년(1602) 봄의 일이었다. 관왕묘가 자리를 잡자 이제는 관우를 숭배하는 현상이 차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급기야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가 무속이나 민간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변모하듯 섬김의 내용이 바뀌면서 1920년대에는 관성교라는 종교단체까지 등장하였다.

 

이런 연고로 전국 곳곳에 관우를 섬기는 사당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조선 말기 서울에 세워진 북묘와 서묘는 다분히 이런 흐름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묘는 우리의 의지보다는 중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해 세워진 까닭에 설립 뒤 한동안 방치되다시피 관리되었다. 그러다가 숙종이 정릉(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을 다녀오는 길에 친히 참배한 이래 영조부터 철종까지 역대 임금이 모두 능행길에 동묘에 들를 만큼 관심을 갖기에 이른다. 특히 정조는 자신을 포함한 네 임금, 즉 숙종과 영조, 뒷날 장조로 추존된 아버지 사도세자가 지은 관우를 찬양하는 글을 새긴 비석, 이른바 사조어제무안왕묘비(四祖御製武安王廟碑)를 남묘와 이곳 동묘에 세운다.

 

내삼문

정전

서무

 

 

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비 앞면의 “大漢朝忠節武安王贊揚銘”(대한조충절무안왕찬양명)이라고 전서로 쓴 전액과 행서의 본문은 숙종의 글과 글씨이며, 뒷면의 “顯靈昭德武安王廟”(현령소덕무안왕묘)라는 해서의 비액과 가벼운 흘림이 있는 해서체 본문은 영조의 글과 글씨이다.

 

 

동무

 

종로구의 아름다운 나무, 수령 210년의 향나무

 

 

동묘는 장방형 대지에 건물을 남북축선상에 배치하여 남쪽에 대문이 놓이고 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네모나게 쌓은 석단이 있고, 그 옆에 제사를 모시는 사람의 거처가 있으며 대문 뒤에는 축선에 맞추어 중문이 놓인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정전이 놓이고 그 앞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놓여 있다. 정전은 정면 5칸, 측면 6칸의 익공양식으로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넓은 기단 위에 다시 한단을 높인 건물기단을 두고 둥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익공계 형식이며 화반(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같은 후기양식을 보이고 있다.

 

내부는 본실과 전실로 구분하였으며, 건물 전면을 제외하고는 3면에 좁은 툇간을 두고 열주를 세웠다. 본실과 전실 사이에는 문짝을 달아 막았으며, 외부로 보아 좌우측면과 후면은 전벽으로 전체를 막고 뒷면 중앙에만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측 벽에는 작은 홍예를 틀어 개구부를 마련하였고, 정면에는 전체에 특이한 양식의 살창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본실에는 중앙 뒤쪽에 단을 만들어 관우의 본상을 안치하였으며, 그 앞 탁자 좌우에는 그의 권속인 관평, 주창 등 네 사람의 상이 있다.

 

축문을 태우는 망료대?

정전의 내무, 살창문 사이로 스마트폰을 넣고 착칵!!

 

관우는 삼국 촉한의 명장군으로 중국문화사상 충의와 용무의 상징처럼 인식되는데, 민중들은 그를 존경하여 관공, 관노야라고 불렀다. 여러 차례 후대 제왕들의 추봉을 받았는데, 바로 ‘무제’과 관련이 있다. ‘관성제군’ ‘관성제’, ‘관제군’, ‘관제’ 등등으로 추대되었다. 도교에서도 받들어져 ‘문형성제’, 혹은 ‘협천대제’, ‘익한천존’이라 하였다. 불교계에서도 호법신으로 받들어져 ‘가람보살’이라 하였다. 민간에 "삼국연의"의 영향으로 관우와 유비, 장비는 결의형제로 알려져 있고, 그 중에 서열이 둘째로 인식되어 속칭 ‘관이야’, ‘관이가’ 등으로도 불렸다.

 

관우 상의 양쪽에는 이런 게 똑같이 있는데 설명이 없다.

 

건물의 둥근 기둥

 

지붕은 이 집의 특수한 평면에 따라 만들어져 용마루가 T자형태인데, 전실의 지붕 양옆은 맞배의 박공을 가설하였고, 본실의 지붕은 팔작을 이루어 이들이 같이 연결된 형식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은 중국 묘사 건축의 영향을 받아 중국풍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평면에서 정면보다 측면이 길게 되어 안으로 깊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평면구성은 중국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 나라 건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모습이다.

 

 

 

정전의 용마루

 

정전에서 본 외삼문

내삼문에서 본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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