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율곡 이이를 잉태한 봉산서재

智美 아줌마 2015. 9. 14. 14:00

봉평에서 1시 35분 장평가는 버스를 타고 장평 가는 길에 봉산 서재가 있어 잠시 들렸다가 2시 50분 다음 버스를 타고 장평으로 간다.

봉산 서재

 

 

 

2006년에 지은 재실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계단을 오르면 멋드러지게 가지를 내린 소나무

 

 

봉산 서재는 율곡 이이(1536~1584)의 부친인 이원수가 수운판관으로 이곳에 거주할 때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사당이다. 1661년(현종 2)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 5리를 봉산서재의 위토로 하사 받아 율곡 이이의 위업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다. 1895년 이곳의 유학자인 홍재홍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1906년 유생들의 성금으로 중건되었다.

 

원래 봉산재라 하였으나 한말의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이 이곳에서 의병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서(書)’자를 넣었다. 한편 이곳을 창건할 때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인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태은 추성구 등이 조직한 강수계의 노력이 컸다고 하여 강수재(講修齋)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당문이 닫혀있어 안을 못 보고 오나 했더니 자물통이 걸려있어 살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강수재, 의암 유인석이 쓴 글씨

여러 개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까막눈이라 알 수 없으니 . . .

 

 

 

사당 내부

 

율곡 이이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와 사임당 신씨(申氏)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1548년(명종 3) 진사시에 13세의 나이로 합격했으며, 조광조의 문인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에게 학문을 배웠고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이다.

 

 

화서 이항로는 정조 16년(1792) ~ 고종 7년(1868)학자로서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본간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서 이조참판 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이항로는 고종이 즉위한 후 1864년 73세에 조두순의 천거로 장원서 별제에 임명되고 전라도 도사, 사헌부 지평, 사헌부 장령 등을 차례로 제수받았지만 사퇴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나,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한 병인상소와 만동묘 재건 상소 등으로 인해 대원군으로부터 배척당했다.

 

 

사당 건물이 한 채밖에 없어 나무 그늘에 앉아 쉬다가 버스 놓치게 될까 내려가 재실 툇마루에 앉아서 봉산서재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길동무한 고흥 언니 성품이 무난하니 따뜻한 성격인 것 같아서 함께 다녀도 불편함은 없었지만, 혼자 다녔으면 신경 쓰일 일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사진 찍는 나를 기다리게 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율곡 선생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 율곡선생의 아버지인 이원수공이 인천지방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산수가 아름다운 봉평에 4년간을 살았었다. 인천에 있던 율곡선생의 아버지가 여가를 틈타 본가로 오던 중 평창군 대화면 반정(상안미)에 이르렀을때 날이 저물고 피로에 지쳐 하루 밤을 쉬어 가려고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일찍기 혼자 몸이 되어 홀로 주막을 경영하던 주모의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므로 이상히 여겨 홀연 꿈을 깨고 일어나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주모는 이것이 틀림없이 잉태할 꿈이며 비범한 인물을 하늘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을 얻을 기회가 왔구나 하였다. 주모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니 혼자 몸이요, 그날 밤 대상이 될 사람은 주막에 묵고 있는 원수공 뿐이라 여러 모로 살핀 끝에 그 분이 예사 사람이 아니므로 여자의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십시오."하니 놀란 원수공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내 그대를 행실 바른 여인으로 알고 묵으려 했는데 이러면 되겠오."하고 달래니 "손님 아무 말씀 마시고 하루밤만 정을 맺게 해 주십시오."하고 애걸 하였으나 원수공이 완강히 뿌리치고 말아 주모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부끄럽고도 서운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는데 원수공의 얼굴에는 범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 있는것을 보고 이는 도저히 내 운수가 아니구나 하며 체념하였다. 그 무렵 율곡선생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는 강릉 오죽헌 언니집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하루밤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는 꿈을 꾸고 나서 즉시 귀가하려고 하였다. 언니는 며칠 더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사임당 신씨는 이를 뿌리치고 그날로 140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마침 원수공이 도착했다. 신씨는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대하여 반기기는 고사하고 말도 않고 표정에 변화도 없이 묵묵히 남편을 대하였다.

 

부인의 성품이 남다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원수공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율곡선생을 잉태하게 되었고, 그 후 9개월만에 강릉 오죽헌으로 이사하여 율곡선생을 낳았다 한다. 한편 원수공은 며칠을 이곳에서 머물다 임지로 돌아가던 길에 또 다시 반정 주막에 들게 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청을 못 들어 준 것이 마음에 걸려 "여보시오 주모, 내 전날에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오. 오늘 밤 당신과 정을 맺을까 하오."하니 "어르신네의 말씀은 대단히 고마우나 지난번 하루 밤 모시고자 한 것은 홀로 사는 아낙네에게 하늘이 점시하신 비범한 영재를 얻고자 함이었는데 오늘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상서로운 기운이 없어졌으므로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말을 이어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틀림없이 인시에 낳을 것이니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호랑이한테 해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당황하여"그 무슨 말이요,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앞일을 예견하는 당신께서는 그 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 것이니 제발 묘법을 가르켜 주시오." 했다. 그러자 주모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그러면 돌아가 사람을 천 명 살리는 셈치고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십시오. 그랬다가 아이가 다섯살 되는 해 아무 날에 금강산에서 어떤 늙은 중이 와서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기는 절대로 보이시지 말고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아기를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버티시고 덕을 쌓은 것을 보자고 하거든 밤나무 천 그루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해 12월 26일 인시에 사임당이 아들을 낳으니 원수공은 주모의 말이 맞았구나 싶어 강릉에서 남쪽으로 백리 쯤 되는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그 후 율곡이 다섯 살이 되는 해 주막 여인이 말한 바로 그날 늙은 중 한 사람이 나타나 "금강산에서 살고 있는 중인데 이댁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왔읍니다."하니 원수공이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하자 중이 "무슨 덕을 쌓았다는 것입니까?"하고 반문했다. 이원수공이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하니 중이 "그렇다면 그것을 보여 주십시오."했다.

 

이원수공이 중을 데리고 산으로 가 밤나무를 하나하나 세는데 아무리 헤아려도 천 그루에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원수공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늙은 중이 "한 그루가 모자라니 기어코 아드님을 데려 가야겠읍니다."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하고 소리치자 늙은 중이 혼비백산하여 큰 호랑이로 둔갑하여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한편 현종 3년 나라에서는 판관대가 이율곡선생을 잉태한 영지라고 하여 이 지역 산과 전답을 포함하여 사방 5리를 하사하고 감관을 파견하여 관리하고 제향을 드리도록 했으나 일제 후 잘 시행될 수 없었다 한다.

 

이제 버스 올 시간이 돼가는 것 같아 차도로 내려가 있다가 다음 버스를 타고 장평으로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평창 터미널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