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이화장과 잘살기 기념관

智美 아줌마 2015. 4. 9. 15:30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에 쓴  "경천애인"을 새긴 돌이 이화장  언덕 위 낙산 공원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데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한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는지 자료를 보고나서 알게 되어 참으로 놀라웠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두 분께서는 이승만 대통령 묘에 참배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유영호의 역사 기행에서 발췌)

 

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이 북한 괴뢰군을 잘 막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정작 자신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마치 358년 전 선조가 의주로 도망쳤듯이 그는 부산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미군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겨버린 것이다.

 

이로써 이승만 정부는 군사적 권한을 잃은 채 경찰 및 특무대를 중심으로 제2전선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제2전선에서 이승만정부가 한 일이란 인민군과의 싸움이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전부였다. 전쟁 초기 후퇴과정에서 도보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해 약 20만 명가량을 죽인 일명 <보도연맹사건>이 첫 번째이다.

 

또 미군의 지원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갔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는 1.4후퇴 때 서울조차 재 철수가 불가피해지자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하여 남쪽으로 호송하며 이들을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다. 이것이 바로 민간인 학살의 두 번째 사건인 <국민방위군사건>이다. 이는 이들에게 배급되어야 할 식량과 옷 등이 부패한 정권으로 인하여 벌어진 학살이다. 이에 사람들은 이 국민방위군대열을 '죽음의 대열', '해골의 대열'로 불렀다.

 

이러한 이승만정권의 제2전선에서의 학살은 전선이 38선 지역에서 교착된 1951년 2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전선이 교착되자 그 해 2월 거창일대 함양, 산청을 포함한 일명 <거창양민학살>이 바로 세 번째 학살이다. 이런 대규모적인 민간인 학살사건 외에도 중소규모의 민간인 학살은 거의 매일같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쟁이 끝나고도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방법으로 그는 장기집권을 꾀한 것이다. 사전을 찾아서 확인하기 전에는 이것들이 어떻게 전개된 것인지 쉽게 알기 어려운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칙적 방법을 통한 12년간의 장기집권에도 1960년 부정선거에서 국민들은 폭발하였고 거대한 4월혁명의 물결을 이루면서 그는 결국 경무대에서 쫓겨나 이곳 <이화장>으로 돌아온 것.

 

 

이화장은 조선시대 건물로 8ㆍ15 광복 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이 살기도 한 곳이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7년 10월 18일부터 이듬해 8월 12일까지, 4ㆍ19혁명으로 하야한 1960년 4월 28일부터 하와이로 망명한 5월 29일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이화장은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초대 내각을 구성하였던 정부의 조각 본부(1948년 7월 21일∼8월 4일)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공간(1948년 7월 24일∼8월 12일)으로도 쓰인 장소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서울 경교장(京橋莊)과 함께 해방 이후 한국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현재 이화장 관람이 안 되고 있는데 폭우로 산사태가 나 지금까지도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향후 2016년에나 개방될 것 같다고 한다.

 

 

‘잘살기기념관’(관장 마대복)이 낙산공원 입구를 지키고 있다. 이는 60~80년대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케 하는 벽화와 기념품이 전시된 공간

 

‘잘살기 기념관’(관장 마대복)은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건물이지만 최근 이곳을 찾는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낡은 건물이 임동선씨 등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학생들의 재능기부로 벽화가 그려지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한 이유도 있지만 마대복 관장의 따뜻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이화 벽화마을의 ‘명물’이 됐기 때문이다.

마 관장은 경희대 학생 시절이던 1965년 ‘잘살기 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야학을 열고,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에게 집과 동사무소, 전주 아래에서 공부를 가르쳤다. 아이들이 워낙 가난해 책과 노트도 사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는 직접 구두닦이에 나서기도 했다. 뼈저린 경험을 통해 ‘가난’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아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는 참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루는 학교 본관에서 교복을 입은 채 구두닦이를 하다가 당시 조영식 총장 눈에 띄었고, 사연을 알게 된 조 총장은 음대 학생들에게 자선음악회를 열게 하고 모금을 해 야학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 이 사연은 당시 언론에 보도됐고, 급기야 청와대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청와대에서 사람이 찾아왔고, 며칠 후 박정희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초청해 친필로 쓴 현판과 함께 현금 20만원을 전달했다. 또 서울대 관리부지인 종로구 이화동에 교실을 마련하도록 820여㎡의 땅을 제공했다. 그렇게 해서 야학 ‘잘살기 학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그는 학생, 교사들과 함께 직접 흙벽돌을 찍어 6개 교실을 지었다. 그후 문을 닫을 때까지 3천600여명의 학생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가난으로 정식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이들이지만 대학교수, 목사, 소설가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됐다. 하지만 ‘잘살기 학원’은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1987년 문을 닫았다.

 

그후 20년 넘도록 사람의 발길이 끊겼던 이곳이 ‘잘살기 기념관’으로 재탄생했다. 일반 고등학교로 옮겨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마 관장이 대구로 내려와 극장 관리 일을 하던 중 고희를 기념해 그 시절을 회상하며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가 계기가 됐다.

영남일보 ‘동네늬우스’에 에세이와 함께 그의 삶이 소개되고, KBS 아침마당에도 출연했다. 신문과 TV를 본 제자들이 연락을 해오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지난 1월 대구 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간 그는 제자들에게 자서전을 나눠 주면서 영남일보 기사가 실린 신문을 오려 함께 넣어 주었다고 한다.

마 관장은 “서울 종로 5· 6가 라도균 동장을 비롯한 제자들의 권유가 있었다. 3천600명의 졸업생과 당시의 힘들었던 순간을 함께 기억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60년대 근대화 시기 어려웠던 교육 환경을 보여주고 알리고 싶어서 이 기념관을 만들게 됐다”며 “앞으로는 가족상담 및 청소년상담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남일보 천윤자 시민기자  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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