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 사진은 먼저 돌아가신 분의 순서대로 정리해 올렸는데 원래 현충원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뵙는 분은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 그리고 창빈 안씨 묘역, 창빈 안씨 묘역 바로 왼쪽 옆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계시고 왼쪽으로 쭉 올라가서 장군 묘역 건너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계시다.
1577년(선조 10) 왕이 창빈묘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창빈의 원찰을 삼아 조포사찰로 정하고 갈궁사에서 화장사로 고쳐 부르다가 지금의 호국지장사가 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조포사’와 ‘조포소’라는 사찰과 기관이 있었는데, ‘조포사’는 왕릉이나 원에 딸려 제향에 쓰는 '두부'를 맡아 만드는 절이었고, ‘조포소’는 관가에 '두부'를 만들어 바치던 기관이었다.
신도비,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1683년(숙종 9) 12월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이 지었고, 글씨는 판돈녕부사 이정영이 썼으며 머리전서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평군 이항이 썼다.
창빈 안씨 묘소는 원래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 서쪽의 장흥리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인 과천 동작리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때부터 '동작릉'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 계단 위로 올라가면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이 계신 묘역이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본관은 전주. 초명은 승룡. 호는 우남. 황해도 평산 출신.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아버지는 경선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이다. 1877년 서울에 이사하여, 낙동과 도동에 있는 서당에서 과거 지향의 한학을 공부하다가 1894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듬해 4월 배재학당에 입학, 영어와 신학문을 연마하였다. 1910년까지 5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및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이수한 끝에 1910년 7월에 프린스턴대학에서<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하였다.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미국으로 귀환한 그는 뉴욕에서 1934년 10월에 제네바에서 만났던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총선거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한 다음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1948년 5월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된 다음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그는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으로서 그는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하여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1948년 5월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장에 오른 뒤, 7월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철저한 반공정책을 폈다. 한국전쟁 때는 휴전을 반대하였고, 1952년에는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였고,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여당(자유당)과 정부가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4선되었으나,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짐으로써 4 · 19혁명이 발발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망명생활 중 사망하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는 (1900년 6월 15일 ~ 1992년 3월 19일)는 대한민국의 제1, 2, 3대 대통령 이승만의 두 번째 아내로, 한번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1931년 빈 회의에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났다가 그와 재혼하였다. 1960년 이승만의 하야 이후 함께 하와이에 망명하였고, 이승만 사후에는 오스트리아로 가 있다가 1970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로 귀국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귀화인으로 대한민국의 1번째 영부인이었다. 한국어 이름은 이금순 또는 이부란이다. 별칭은 호주댁이다
박대통령 내외분을 뵈러 이 계단을 올라간다. 잘잘못을 떠나 두 분의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 경상북도 구미 출생. 빈농인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26년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하였고 그해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졸업하였다. 사범학교 졸업후 경상북도 문경에 소재한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부임하여 1940년 2월까지 근무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중에 5·16군사정변을 주도하여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 초기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국민적 전개로 농어촌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의 심화와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 국민들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으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약화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내치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획기성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당했다. 이러한 정권의 위기는 결국 '부마민주항쟁'을 야기시켰으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하였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께서는 1925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출생하였다. 1942년 배화여고를 졸업하였고 옥천여중 교사를 지냈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란 중일 때 육군 중령 박 대통령과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근혜·근영 등 1남 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장군이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을 들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 극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되어 서거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1924년 1월 6일에 아버지 김운식 씨와 어머니 장수금 씨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4년 4년제 하의공립보통학교(현 하의초등학교)와 목포 제일보통학교를 거쳐 39년 수석으로 중학교를 졸업해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다. 이후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김대중은 서울고등사범학교와 만주 건국대학에 합격했지만, 일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 대신 목포상선회사에 1944년 입사하게 된다. 이후 흥국해운 창업(1946년), 전남 선박 목포조합장(1948년) 등을 거치는 등 성공한 사업가로 부상한다.
전쟁 직후인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계에 뛰어든 김대중은 낙선하게 된다. 이후 1961년 4ㆍ19혁명으로 5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지만 5ㆍ16군사 쿠데타로 당선 3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19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에 출마해 당선된 김대중은 1971년 7대 대선을 앞두고 신민당 대선 후보 지명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꺾고 대선 후보가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 속에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대선에서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 정권에게 석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8대 총선(5월 25일)의 지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후보 차량으로 14t 대형 트럭이 돌진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사고로 김대중은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1971년 대선을 시작으로 대선에 도전한 지 네 번째인 1997년 처음으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며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재임기간 동안 외환위기 극복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으며 사회복지제도 정비, 노사관계 안정 등의 공적을 이뤘다. 특히 통일 분야에 있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6ㆍ15 공동선언에 합의해,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2003년 2월 24일 퇴임한 그는 2006년 10월에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하자 햇볕정책이 공격당하고 있다며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등 활동을 해오다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85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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