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오른쪽 외곽 순환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호국지장사가 나온다. 현충원 안에 절이 있다는 건 이번에 순환로를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역사는 꽤 오래된 절이었다. 어찌보면 현충원 안에 절이 있다는 게 호국영령들에게 위안의 안식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큰아버지도 현충원에 계시지만, 어른들 다 돌아가시고 나니 어딘지 몰라서도 못 찾아갔는데 요즘엔 성함과 나이, 기본 정보만 알아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보호수 345년된 느티나무
올라가면서 본 나무
위에서 본 나무
호국지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의 말사로 신라 말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즉 도선스님이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서기가 퍼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므로 토굴을 짓고 갈궁사라 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 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고쳐 화장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안진호 스님이 편찬한 『봉은본말사지』에는 사기를 인용하여 “1577년(선조 10) 왕이 창빈묘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창빈의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것이다(朝鮮宣祖十年 ?寺於昌嬪墓附近山麓 爲昌嬪願刹 是葛弓寺)”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창빈의 묘는 1578년 즉 선조 즉위 11년에야 양주 장흥리에서 이곳 동작리로 옮겨졌다. 그래서인지 안진호 스님은 창건에 대한 여러 설을 언급하며 이 시기에 지장사가 창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현재로서는 화장사가 언제 처음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내용은 보인 스님의 중창이후 1577년(선조 10)에 선조의 생조모인 창빈 안씨의 묘를 절 부근에 모시게 되자 그 원찰로 삼고 화장사로 고쳐 불렀으며, 창빈묘의 조포사찰로 지정하였다는 것이다. 이후의 연혁은 『봉은본말사지』에 자세히 전한다. 화장사는 1663년(현종 4)에 중수를 하는 등 꾸준히 사세를 유지해왔는데,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에도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在銅雀里縣北十五里)”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862년(철종 13)에는 운담과 경해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운담과 경해 두 스님이 경파루를 새로 지었으며, 1878년(고종 15)에는 주지 서월 스님과 경해 스님이 큰방 등을 수리하였다. 1893년(고종 30)에는 화주 경운·계향 스님이 불상을 개금·개분하고 구품탱·지장탱·현왕탱·독성탱·산신탱을 봉안하였고,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화주 풍곡 스님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단청하고 후불탱·신중탱·감로탱·신중탱·칠성탱 등을 봉안하였다.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2500여 좌(座)의 지장보살을 봉안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말사로 편입이 되었다. 1920년에는 주지 원옹 스님과 명진 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 스님이 능인전을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유가족들이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 뒤 1983년에는 혜성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호국지장사로 다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암석을 그대로 비켜 조성된 지장 보살전
작은 지장 보살상 마다 이름이 적혀있다. 아마 호국 영령들의 이름이 아닐까.
극락전
삼성각, 독성도(문화재 자료 6호), 산신도(문화재자료 제7호), 1906년에 조성한 치렁도(문화재5호)가 모셔져 있다.
대웅전과 경주 남산에서 옮겨 온 통일신라 양식의 3층 석탑
대웅전의 철불좌상은 높이 98cm, 폭 70cm의 크기의 철불로 고려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이 철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한강에 사는 한 어부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불상이 나타나 빛을 보게 해달라고 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다음날 어부가 그곳에 가보니 불상이 녹슨 채 있었고 어부는 그 불상을 가져와 깨끗이 닦아 집에 모셔두었다. 그러나 그후로 고기가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계속되자 어부는 불상을 화장사로 옮겼다.
요사채와 종무소
선조 때 이항복과 이덕형이 과거시험을 준비한 절로도 알려져 있다. 이들이 함께 공부할 때 측신이 두 소년의 아랫도리를 움켜잡고 ‘대감’이라고 불러서 미래를 예언했다는 설화가 전하고 지장사가 자리한 곳은 일찍이 이승만 대통령이 들렀다가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할만큼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옹스님이 쓰신 범종각 편액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 스님이 능인전을 중수, 철불여래좌상(서울 유형문화재 제75호), 약사후불탱화(문화재 제3호), 신중탱화(문화재 제4호)가 모셔져 있다.
비석과 사리탑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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