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도 약간 꺾인 것 같아 지난번 무수골까지갔다와서 이번엔 도봉 옛길까지 가보기로 했다.
하늘이 많이 파래지고 높아진 것 같다. 사람의 얼굴도 사진을 찍어보면 나이 듦이 나타나는데 계절도 사진을 찍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뜨거운 여름 내내 꼿꼿하게 서서 피고지더니 아직도 화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 . .
녹음은 짙어 시원한 숲길을 만들어 준다.
선조께서 코스모스를 살사리꽃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 같이 살금살금 긴 목을 빼고 바람에 실려 춤춘다.
왕원추리
이제 방학길에서 무수골로, 도봉 옛길로 가자.
며칠 전 비가 온 뒤라서인지 여기저기 이름 모를 버섯이 많이 눈에 띈다.
이 샘이 바가지 약수인가? 왜 이런 이름이 지어졌을까?
샘터 옆에 작은 도서대, 누구나 읽으라고 안내 글이 있는데 난 패 ~ 스
주먹만한 버섯이 꼭 소보로 빵같이 생겼다. 빵순이라 그렇게 보이나? ㅎㅎㅎ
나무 토막에도 버섯이 줄 지어 자라고 있고 . . .
오잉? 이게 뭐지? 씨방같기도 하고 버섯 같기도 해서 살펴보니 버섯인 것 같다. 참 희안하게 생겼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 위에서 잠시 요기도 하며 바람이 시원해 쉬어간다.
뭐 눈엔 뭔만 보인다고 했나? 빵순이 떡보 아니랄까 백설기 떡한 쪽 잘라 놓은 것 같다는 생각 . . . ㅎㅎㅎ
산행 중에 계단은 싫지만 이곳엔 완만해서 계단 길도 괜찮다.
드디어 쌍둥이 전망대에 도착, 전망대 올라가서 북한산과 도봉산 주봉들을 두루 감상하고 전망대 그늘 벤치에 누워 있으니 넘 좋다.
→ 칼바위, 병풍바위, 주봉, 뜀바위, 신선대(703m), 자운봉(740m), 만장봉(718m), 선인봉(708m), 포대정상
도봉산 주봉들도 시야가 맑아 깨끗하게 보인다.
가운데 우이암 밑에 원통사가 보이고 멀리에서 보니까 숲에 가려 암릉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도봉산 왼쪽엔 북한산의 주봉인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오른쪽에 상장 능선이 보인다.
군사 시설이 있어 통제 중인 상장 능선의 크라운봉, 비탐방로지만 불법 산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돼, 안돼!!
성북구 방향
불암산 방향
수락산 방향
한참 쉬었으니 다시 도봉 옛길을 찾아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산책삼아 둘레길을 걷기에도 길이 예쁘고 좋다.
무수골, 도봉 옛길은 왼쪽으로 . . .
어라? 물소리가 나네. 주변을 살펴보니 샘이 있다. 지난번에는 못봤는데 . . .
이 길만 나가면 무수골
어라? 이곳에 계측기까지?
한적한 시골 마을길 같다는 생각
와 ~ 맨드라미가 엄청 크다.
배초향, 보통은 방아, 방애 등으로 부른다. 토종 허브로 오래전부터 약초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곽향이 바로 이 배초향을 말린 것이다
마을길로 조금 들어가니 묘한 분위기의 건물이 나온다 교회 건물?
마을 빠져나오니 묘역이 나오고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게 뉘집의 묘인지 명당 자리인 것 같다.
묘역 왼쪽으로 가면 도봉 옛길로 이어진다.
멀리 우이암이 보이네. 도봉산을 모르는 사람은 우이암을 작은 암자로 생각하고 절집을 찾기도 한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백일홍
허수아비 대신에 우산을? 밭일 하다가 우산 그늘에서 잠시 쉬기도 하면 좋겠다.
이곳부터 길이 참 좋다. 어떤 여자 산객의 전화 통화 소리가 거슬리기도 하였지만 마음에 쏙 드는 길이다.
아, 이런 ~ 쥔없는 묘가? 주변을 살펴보니 이런 묘가 여러 기가 있고 잘 가꾸어 놓은 묘가 여러 기가 있다.
증 영의정 진주 유공 휘양문집시비
넘 깨끗하고 앙증맞은 버섯
빨간 꽃이 핀 것같은 버섯도 있고 . . .
이곳에서 산악회 사람들이 술판에 고스톱 판을 벌리고 있어 어떤 산행인이 사진을 찍어 올린 걸 봤다. 정 ~ 말 그러면 안.돼.요.
석물들이 이곳에 있던 자리인가보다. 어디로 옮겼을까?
정경부인 완산이씨지묘
나무테크길의 시작이 어디인가 하고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도봉산 만남의 광장 계곡 쪽에서 오는거라고 한다.
주인 잃은 문인석, 쓰러질까 나무가지로 버팀목을 받쳐 놓았다. 에구구 ~ 중심잡고 버티려니 힘들다.
도봉 옛길 밖으로 나가니까 어느 방향인지 감이 안와 두리번 거리며 살펴보니 도봉사 길이였다.
한참을 이곳이 어디쯤일까? 어리둥절한 방향감각에 두리번거렸는데 화장
도봉사 옆 큰 나무에 빨간 열매가 달렸다. 마로니에 잎과 비슷하지만 일본 목련이라고 하는데 후박나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 후박나무와는 또 다른 나무라고 하니 정확한 이름인 일본 목련이라고 해야 한다고 . . .
도봉사 입구
지난번에 왔을 때는 없던 건물이 생겼다.
연리지, 화목한 부부 또는 남녀 사이. 춘추시대 진의 조간자가 나루터 아전의 딸을 소실로 데려오니, 그의 처가 청릉대에서 떨어져 자살했는데, 후에 그 부부의 무덤이 따로 있었으나 두 무덤에 나무가 나서 가지가 서로 향해 벋어가더니 하나로 합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도봉사는 고려 시대인 968년(광종 19)에 혜거 국사가 창건하였으며, 971년(광종 22) 광종이 여주 고달사와 희양산 봉암사, 양주 도봉사 세 곳을 특별 선원으로 삼았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도봉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 이후 도봉사는 전쟁과 화재 등으로 여러 번 소실되었으며, 그 내력은 잘 알 수 없다. 조선 말 고종 때 승려 벽암이 법당과 부속 건물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처의 진신 사리를 둔 뿌리 탑
극락보전과 칠층석탑
옥잠화
용화전(대웅전)
용화전 용마루의 가루라
철웅당과 5층석탑
법음각과 범종
능우너사에서 본 수락산
서양무궁화, 정확한 꽃명은 하와이안 무궁화
도봉산 광륜사는 673년 의상 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사찰 이름은 만장사였으며 천축사, 영국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가람으로 성장하였다.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쇠락하였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신정 왕후[1808~1890]가 부친인 풍은 부원군 조만영이 죽자 풍양 조씨 선산과 인접하고 산수가 수려한 도봉산 입구에 만장사[현 광륜사]를 새로 짓고 별장으로 삼아 만년을 보냈다. 그 후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국정을 보기도 하였다.
국립공원 생태 탐방 연수원
연수원 지붕의 단풍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도봉서원을 둘러보기 위해 다시 등산로로 go go . . .
도봉서원에서 불교 유물이 나왔다고 해서 현재 도봉서원 상태가 어떠한지 보러 갔는데 건물은 해체되어 없고 220년된 보호수 느티나무와 남궁복 선생 기념비만 남아있었다. 조계종 문화부는 문화재청, 서울시, 도봉구청에 공문을 보내 “도봉서원터는 영국사 터이며 출토된 유물로 보아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아 보존할 필요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한 뒤 “도봉서원 복원에 앞서 추가 발굴 및 연구·조사가 선행돼야 하며 영국사와 도봉사의 존재를 배제한 도봉서원 복원 사업은 전면 재검토돼야 할 것”이라고 요구, 현재 도봉서원 복원 사업이 중단되고 있다고 한다. 도봉서원과 영국사가 다 복원되었으면 좋겠다.
남궁복 선생은 성균관 박사로 양주향교의 전교를 역임하셨으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페한 후 도봉서원 재건에 뜻을 두고 활동하시다가 대지 문제로 소송 중에 타계하셨는데 후에 소송은 승소하였고 유훈에 따라 후손이 거액을 희사하여 도봉서원을 재건하게 되어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2009년 6월에 촬영한 도봉 서원
도봉서원은 서울에 남아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1573년 정암 조광조(1482∼151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동시에 ‘道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송시열, 권상하, 이제 등이 이곳에서 유학을 강마하였고 1696년 송시열을 추가 배향 하였다. 이곳은 400여년간 양주, 파주, 포천, 서울지역에 있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 유림들이 단을 설치하고 봄·가을에 향사(제사)를 지내오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1971년 서원을 복원, 그 후 매년 음력 3월 10일(춘향제)과 9월 10일(추향제) 전국 유림들이 모여 전통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사우, 유도문이라 편액된 신문, 동협문 서협문등이 있다. 사우의 오른쪽은 조광조 위패가 왼쪽에는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이 2012년부터 도봉서원터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도 시문화재로 지정된 도봉서원의 정확한 복원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발굴조사 결과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원 중 하나였던 도봉서원이 기존 사찰을 강제로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도봉서원을 건립할 때 영국사의 일부 건물과 기단을 재활용했고, 기존 사찰의 석축과 도량배수시설 위에 서원 건물을 축조한 흔적이 새롭게 드러났다.
이들 유물과 건물지는 도봉서원 전에 영국사가 존속했음을 입증하는 사료로서 당시 유림이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맞아 사찰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문화유산연구원도 보고서에서 “조사지역에서 출토된 범문수막새와 명문암막새, 묘법연화경 암각석판 등은 도봉서원이 창건되었을 당시 폐사된 영국사의 존재를 확인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도봉서원은 조선시대 서원 건립을 이유로 멀쩡한 사찰을 폐사시켰던 불교탄압의 생생한 현장이었던 것이다.
도봉서원 복원사업부지 내 유적 항공사진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8월 21일 서울 도봉구의 도봉서원 터에서 불교 의례에 사용된 용구 77점을 발굴해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공개된 유물은 금동제 금강저(방망이 모양의 도구)와 금강령(방)을 비롯해 청동제의 뚜껑항아리와 뚜껑합, 향로, 세(세숫대야 형식), 대접, 숟가락 등이다.
금강령에는 오대명왕상과 사천왕상이 함께 배치됐다. 금속공예사 전공자인 주경미 박사는 “두 문양이 한꺼번에 새겨진 금강령은 국내는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처음”이라면서 “일부 유물은 10세기 이른 시기 특징을 보이는 것도 있는 등 대부분 12세기 이전 작품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금강령의 경우 기존의 동일 유물 중 제작기법이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된다고 발굴을 맡은 서울문화유산연구원 측은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 유물들이 상태가 매우 양호해 최소 보물로 지정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국보지정까지 가능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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