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두번 째 관람 전에 춘추관 내부 사진 촬영은 안 된다고해서 외관 사진을 찍으러 아침 일찍 청와대 춘추관 쪽으로 올라갔는데 10 미터 간격이랄까? 그 정도로 경찰들이 보초를 서있고 사복 경찰은 소지품 검사까지 하며 이동 경위를 묻고 보내 준다.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응해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 최 요충지인데 . . .
동측 안내소 앞에 전통놀이 "말타기" 인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어린 시절 생각이 나서 입가에 미소가 머금는다.
건춘문
건춘문은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 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 중건 당시 건립된 것이다.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쪽문으로 ‘가을을 맞이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건춘문 쪽에서 내려오는데 수문장 교대 의식을 하려는지 취타대 연주 소리가 들린다. 얼른 광화문 쪽으로 뛰어갔다.
광화문 양쪽에 있는 해태, 해태는 시비,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로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 가운데에 뿔이 있다고 한다. 중국 문헌인 《이물지》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에 가식되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한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루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이처럼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이라는 점은 광화문을 비롯한 성문의 형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단 위에 문을 세우지만 경복궁의 문은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내서 마치 성곽의 문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광화문은 그 중에서도 홍예문을 셋이나 내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습을 보여준다. 광화문이 법궁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원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 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재건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재건 당시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의 축에 맞추어, 그 결과 3.5도 가량 본래의 축과 어긋나게 틀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미터 가량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수문장들 복장이 예사롭지 않다. 한 여름에도 겹겹이 갖춰 입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 서있어서 콧잔등이 빨갛게 타있다. 수고가 많구먼.
교대자들이 행군하면 나온다. 우리들이 볼 때는 멋있는데 저들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보낸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흥인지문, 숭례문 등 도성문과 경복궁 등 국왕이 임어(생활)하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였다. 수문장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광화문을 여닫고 근무교대를 통하여 국가의 중심인 국왕과 왕실을 호위함으로써 나라의 안정에 기여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수문장 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조선 예종 1년 (1469년)으로 그 이전까지는 중앙군인 오위의 호군이 궁궐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홍례문
교대자들이 협생문으로 들어온다. 협생문은 동쪽 내부 담장에 난 문으로 이극문, 즉 세자가 동궁으로 드는 오른편 측문에서 출발해 광화문 밖으로 나갈 때 세자가 이용했다. 총독부건물 해체 후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를 발굴 조사 중 2008년 11월에 용성문과 함께 발견 되어 복원 하였다.
의상이 색감도 좋고 아름답고 멋지다.우리 전통 문화는 명절이나 접할 수 있는데 그나마 매일 수문장 교대의식을 볼 수 있어 좋다.
교대식을 마치고 광화문 쪽으로 빠져나간다.
밖에서 본 근정전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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