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왕실의 사묘 칠궁 (육상궁)

智美 아줌마 2014. 8. 26. 12:44

청와대 관람을 마치고 선택 관람 칠궁으로 갔다. 칠궁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일반인 관람이 금지되었다가 33년 만인 2001년 11월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나 청와대 영빈관 바로 옆에 있어서 상시 공개 관람이 되지 않고 청와대 관람한 사람에게만 경호원과 고궁 해설사 인솔하에 관람할 수 있다. 칠궁은 사적 제149호로 공식 명칭은 '육상궁'으로 칠궁은 조선조 500여년 동안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 등을 모셔 놓은 사당으로 궁호란 후궁이 죽은 후 추존을 받는 것인데 흔히 공로가 많은 후궁이나 왕의 총애가 높았던 후궁에게만 붙일 수 있는 존칭이다.

 

칠궁에는 원래 숙빈 최씨의 사당인 숙빈묘(영조때 육상궁으로 개칭)만 있었으나 1908년 서울 주변에 흩어진 여러 사친묘(임금의 생모가 된 빈의 사당)을 합치면서 육궁이 됐다. 이어 1929년 고종의 후궁인 엄씨의 덕안궁을 옮겨 오면서 지금과 같은 칠궁이 됐다. 1882년(고종 19년)에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으며, 그래서 육상궁과 진종의 생모 정빈이씨의 연우궁,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의 덕안궁, 추존된 왕 원종의 생모 인빈김씨의 저경궁, 경종의 생모 희빈장씨의 대빈궁,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경우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선희궁이 있다.

 

영빈관 앞에서 본 칠궁 입구의 나무

칠궁 쪽에서 본 나무

 

 

칠궁 정문인 밖과 안을 가르는 외삼문

재실 정문

외행각(정문)

 

오른쪽 아래 지붕이 삼락당

 

칠궁의 재실인 이 건물에는 현재 송죽재풍월헌이란 두 현액이 걸려 있다. 이를 통하여 이전에는 이와 관련된 두 채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건물의 이름은 영조가 육상궁에 행차할 때 머물렀던 재실인 풍월헌, 그리고 고종 19(1882)년의 화재 당시 영조의 어진을 옮겨 모셨던 송죽정이라고 본다. 영조 48(1772)년 영조는 숙빈최씨에게 영강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시보책을 육상궁 풍월헌에 봉안하게 한 바 있다. 이 건물은 위 기록들과 건축 양식 등으로 볼 때 1882년의 육상궁 화재 이후 건립된 듯하다. 이 때 송죽정의 뒤를 이은 이름이 송죽재다. 해마다 10월 넷째주 월요일 칠궁제를 지낸다고 하는데 월요일은 일반인 관람이 안 되는 날이라 아쉽다.

 

송죽재

풍월헌

 

제실 송죽재에 딸린 삼락당,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정면이 나온다.

삼락당은 본래 송죽재와 함께 창의궁에 있었다가 고종때 육상궁으로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중문

 

육상궁 삼문, 육상궁은 칠궁 가운데 가장 격식을 갖춘 모습으로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삼문과 배각은 물론 삼문에서 사당까지 이어진 삼도와 사당 앞뜰 좌우에 들어선 이안청까지 골고루 구비되어 있다.

 

임금께서 절을 하시던 배전(배각)

육상궁 이안청(우), 위패를 잠시 모셔 두는 곳

 

육상궁(毓祥宮) . 연호궁(延祐宮), 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묘이다. 영조 원년(1724)에 건립된 것으로 당초에는 숙빈묘라고 하였던 것을 영조 29년(1753) 묘를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고쳤다. 고종 19년(1882)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소실된 것을 그 다음해에 복구하였다.

 

숙빈 최씨의 시호는 '화경'이고 한창 희빈에게 염증을 느끼던 숙종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아들 연잉군까지 낳아주어 정 1품 직위에 오른 최초의 무수리 출신의 후궁이다. 무엇보다 인현왕후가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 데에는 그녀의 공이 크다. 그녀의 출생은 정확하지 않지만 고아 출신으로 이리저리 동냥질하는 것을 인현왕후의 부모가 이를 보다못해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인현왕후가 왕비의 간택을 받을 때 그녀의 몸종으로 궁궐에 들어가 궁녀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1689년에 "기사환국"사건으로 인하여 민씨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궁에서 쫓겨나가자 왕비를 모셨던 최씨 역시 궁궐 안쪽으로 물러나 내명부와 외명부의 세숫물이나 식수를 길러나르는 무수리로 지내게 된다.

 

 

4년 뒤인 1693년 1월, 최씨는 인현왕후의 생일을 맞아 기도를 올리다 이 곳을 지나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된다. 숙종에게 승은을 입고 처소를 얻을 때 처음 숙종이 가장 애용하던 보경당을 하사 받았지만 그녀의 출신이 천출이라 대신들의 반발이 많아 숙종은 보경당을 다시 회수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보경당이라는 당호로 더 많이 불리웠다. 기록에는 후궁이 된 이후에도 궁녀들에게 모진 핍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아들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는 장면도 보지 못하고 49세로 천수를 다하게 되었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의 궁호를 육상궁으로 하고 그 무덤을 소령원이라고 하였다.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 진종(영조의 첫째 아들)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이다. 정빈 이씨는 이준철의 딸로 영조의 첫번째 아들인 효장세자의 생모로 영조에게 승은을 입고 소원에 봉작되었다가 아들 호장세자를 낳자 정빈이 되었다.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이미 그의 후궁이 되어 효장세자와 화순옹주를 낳았다. 하지만 효장세자가 10세 나이에 병으로 죽자 그녀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28살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녀의 딸 화순옹주 역시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곡식을 끊고 일주일만에 세상을 떴다. 정빈 이씨는 아들 효장 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자 연우궁이라는 궁호를 얻었고 묘소는 숙빈 최씨의 소령원 옆 수길원이다.

 

육상궁 이안청(좌)

육상궁 쪽에서 본 배각

육상궁에서 냉천정으로 가는 문

초가집으로 된 정자와 냉천

 

냉천은 육상궁을 지을 때 발견된 샘으로 제사 때 이 곳의 물을 사용하였는데 영조는 재위 기간 중 200여 차례가 넘게 어머니의 사당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3년째 되던 해에 영조가 냉천의 물맛을 보며 그 감회를 시문으로 남겼는데 냉천의 벽면에 1727년에 영조가 쓴 냉천과 냉천정에 대한 오언시가 새겨져 있다.

 

세월에 마모가 되어 글씨가 많이 훼손이 되었는데 그 뜻은 아래와 같다.

 

냉천정 앞마당에는 ’자연’이라고 새겨진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은 냉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아 만든 것이다.

 

자연

냉천정에 딸린 수복방

 

냉천정은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나와서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을 가다듬어 제사를 준비하던 건물로 1725년에 육상궁과 더불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2칸은 온돌방 동편 1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다. 영조(1724~1776년)는 재위 기간에 자신의 어진을 여러 번 그리게 하였다. 이 가운데 영조가 61세(1754년)와 81세(1774년)때 에 그린 어진은 육상궁 안 봉안각에 봉안하였다. 영조가 자신의 어진을 육상궁에 걸도록 한 것은 곁에서 늘 모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정조 5(1781)년 정조는 영조의 어진을 옮겨 모사하기 위해 육상궁 봉안각에 배례한 일이 있었다. 이 봉안각의 어진은 영조의 유지에 따라 매년 포쇄(햇볕에 말리거나 바람을 쐬어서 습기를 제거하는 일)하였다. 순조 25(1825)년 냉천정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에 비가 새어 개수하였고, 순조 31(1831)년 순조는 승지를 냉천정에 보내 어진을 잘 받들어 살펴보게 한 바 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이 봉안각은 이름을 순조(1800~1834년) 때 냉천정으로 바꾸었다고 본다. 고종 19(1882)년 8월 육상궁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신위를 모신 정당은 전소되었으나, 냉천정의 영조 어진은 무사하여 이를 육상궁 내 송죽정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이 당시 소실된 육상궁 건물들은 이듬해 6월에 복구되었다.

 

냉천정 옆면

담장 너머로 덕안궁이 보인다.

삼문

 

덕안궁(德安宮), ‘덕안德安’이란‘덕있고 편안함’을 뜻하고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이며 황태자이자 일제 강점기에 순종에 이어 이왕이 된 이은(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옛 덕안궁 터는 서울시 중구 태평로(태평로 1가 61-1번지) 일대이며 현재 이 자리에는 서울특별시의회 및 조선일보 사옥 등이 들어서 있다.

 

어린 시절부터 궁궐로 입궁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다가  아관파천으로 고종을 수행한 덕분에 승은을 입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마흔을 훨씬 넘어 있었고, 회임을 하고나서 고종은 그녀를 정식으로 후궁에 책봉했는데 종 1품 귀인으로 있다가 영친왕을 낳고 순빈으로 봉해졌다. 엄귀인은 미색은 뛰어나지 못하였으나 지략은 뛰어난 분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아관파천이 엄귀인의 정치적 역량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또 내탕금을 내어서 양정, 진명, 숙명의 학교설립을 지원하여 근대화 교육의 선구자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덕안궁에 딸린 이안청

 

저경궁(儲慶宮)은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이다. 인빈 김씨의 본관은 수원으로 원래는 궁녀 출신이었다. 당시 선조 임금에게는 의인왕후 박씨와 공빈 김씨가 있었고, 공빈 김씨 다음으로 인빈 김씨를 총애하였다. 인빈은 자못 용태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명종의 후궁 숙의 이씨의 외종 조카로, 그녀의 천거로 어릴 때부터 궁궐에서 자라났는데 명종비 인순왕후 박씨가 그녀의 용태와 영리함에 탄복하여 선조에게 그녀를 가까이 두라고 일렀다.

 

그래서 그녀는 14살의 나이로 선조의 승은을 입고, 처음 소용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아 귀인이 되었고 처소의 이름이 "양화당"이라 선조는 그녀를 양화당이라고 불렀다. 성품이 매우 단아하고 착하여 공빈이 광해군을 낳고 일찍 죽자 그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위하면서 키웠다고 전해진다. 소생으로는 신성군, 정원군, 의안군, 의창군, 정신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 등의 4남 4녀를 낳았고 오랫동안 선조의 총애를 받다가 1613년 죽게 된다. 후에 영조 임금이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를 기리는데 대신을의 눈치를 보아 인빈의 가문도 함께 높여주고, 저경궁이라는 궁호를 내리게 되었다. 인빈 김씨의 시호는 인조 임금으로 인해 경혜라는 시호가 내려지게 되었다.

 

 

 

대빈궁(大嬪宮)은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이다. 중전의 위치까지 올랐던 신분이라 좌우의 사당은 기둥이 네모인데 비하여, 둥근 기둥을 갖고 있고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도 한칸 더 높으며 문에는 경첩이 있어 중전까지 올랐던 신분에 대한 예의를 표한 것 같다. 희빈 장씨의 본관은 인동 장씨. 이름은 옥정, 아버지는 장형,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 윤씨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장안 최고의 거부이자 역관인 숙부 장현의 집에서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장옥정이 궁녀로 입궐하게 된 데에는 당시 서인의 세력이 커지자 위협을 느낀 남인 세력이 장옥정을 의도적으로 궁궐에 들였다는 것이다. '자못 아름다웠다'는 기록이 숙종실록에 남을 정도로 그녀는 빼어난 외모로 숙종을 매료시킨 듯 하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14년만에 장옥정에게서 첫 아들을 보게 되고 곧바로 원자로 책봉한다. 왕자(경종)을 낳은 후 옥정은 희빈에 봉작되고 끊임없는 모사로 인현왕후를 폐서인시키고 국모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양반도 아닌 후궁 출신의 여인이 왕비가 된 것은 조선 역사상 장희빈이 유일 무이하다. 그녀의 전각 이름이 숙종이 세자시절 공부하던 취선당이었기에 그녀의 당호는 취선당이다. 5년 뒤 숙종이 인현왕후를 페비시킨 일을 후회하며 장씨가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세자였던 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입적시켜 이로서 정국은 다시 서인 세력이 잡는다. 인현왕후가 승하한 뒤 희빈이 거처하고 있던 취선당에서 신당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사실이 발각되자 결국 희빈에 숙종은 사약을 내리고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숙종은 그 이후 후궁 출신이 왕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후에 경종의 생모라는 이유에서 영조로부터 '대빈궁'의 궁호를 하사 받았다.

 

 

 

경우궁(景祐宮) . 선희궁(宣禧宮),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인데 수빈 박씨의 시호가 가순이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가순궁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정조의 후궁으로 본관은 반남 박씨이고 아버지 박준원은 영조의 서차녀인 화평옹주의 부마 박명원과 먼 친척관계이다. 하루는 그녀의 아버지 준원이 큰 비를 맞아 명원의 집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를 계기로 정조의 후궁이 되어 순조를 낳았다. 당시 정조에게는 의빈 성씨가 있었는데 의빈의 소생이였던 문효세자가 일찍 죽어 정조의 시름이 많았는데 그녀가 입궁하여 아들을 낳으니 정조는 그녀를 무척이나 총애하였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숙선옹주와 순조가 있다.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인데 처음에는 의열묘라 불렀으나 영빈의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대우를 높여서 선희궁이라 이름을 고쳤고 영빈 이씨는 침방궁녀 출신으로 천하디 천한 가문의 여자였으니 빼어난 미색으로 영조의 사랑을 받아 세 용주를 낳고 귀인이 되었으며 사도세자를 낳으면서 영빈이라는 빈호를 받게 되었다. 슬하에 화평, 화협, 사도세자, 화완, 그리고 이름조차 짓지 못하고 세상을 저버린 옹주, 이렇게 1남 4녀를 낳았다.

 

효장세자가 죽은 후 후사가 없던 영조가 마흔이 넘어서야 아들을 낳아주어 영조는 매우 사도세자를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아들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되는데 영빈은 남편의 입장에 서서 아들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시호는 의열이고 정조로부터 선희궁이라는 궁호를 봉작받게 되었고 죽을 때도 후궁 제일의 예를 다해 장례를 치루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종로구 신교동 산1-1번지에 옛터가 남아있으며 경우궁과 선희궁의 두 신위를 한 묘우에 모시고 있다.

 

삼문

삼문

 

내삼문

두번째 방문 때는 관람인이 나 혼자라서 해설사 분께 개인 사사(?)를 받고 칠궁 관람을 마치고 다음은 청와대 사랑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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