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한민국 제2의 수도? 두 번째라는 숫자가 불편하다면 ‘대한민국 해양수도’쯤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수식어들이 먼저 떠올랐다면 그건 당신이 부산을 한 번도 찾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이라도 부산을 제대로 맛보았다면 그가 품은 ‘특별한 무언가’를 눈치 챘을 테니까. 해양수도 말고도 부산을 설명할 수식어는 차고 넘친다.
1904년, 조용한 어촌마을 가덕도 외양포에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들어섰다.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마을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포진지터와 군부대 흔적은 생채기처럼,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마을에 남아있다.
가덕도 외양포 요새 안에서 바라본 모습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섬의 운명
섬나라 일본은 한반도를 탐냈다. 갖지 못한 뭍에 대한 열망과 필요 때문이었으리라. 섬에서의 노곤한 생존을 떠올리면 침략과 수탈로 얼룩진 한반도의 역사가 조금은 이해하기 쉬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침략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왜구는 지독히도 한반도를 못살게 굴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 남쪽 지역의 피해가 컸다. 아예 섬을 비워버린 공도(空島) 정책 역시 왜구들의 공이 혁혁하다.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시킨 임진왜란과 더불어 남도의 섬들이 겪은 피해는 셀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 부산이, 그리고 부산의 가덕도가 있다. 지도에서 가덕도를 찾아보면 위로는 진해만을 통해 뭍과 이어지고 아래로는 대한해협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해협, 바다 어디쯤에선가 여전히 누군가의 눈물이 샘솟을 것 같은 물길. 위치만으로도 가덕도의 파란만장한 삶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부산이 품은 가장 큰 섬. ‘가덕도(加德島)’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설명이다. 섬을 하나의 산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최고봉은 연대봉(烟臺峰, 459m)이다. 이곳에서 진우도·대마등을 비롯한 모래사주와 함께 낙동강과 남해가 몸을 섞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진해와 김해 그리고 부산을 바라보며 뭍을 꿈꾸었기 때문일까. 부산 서남단 끝자락에 자리한 가덕도는 부산과 경남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가 놓이면서 섬 아닌 섬으로 태어났다. 현대인들에게는 거가대교 덕분에 유명해진 셈. 물론 역사는 훨씬 오래 전부터 가덕도를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서도 서남단 끝자락에 자리한 가덕도. 위로는 진해만이 아래로는 일본으로 뻗은 물길 대한해협이 이어진다. 외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가덕도는 뭍과 물 사이에 자리한 유용한 전략기지였을 것이다.
멀리는 1544년, 조선 중종 때 설치된 가덕진과 천성만호진부터 거슬러 갈 수 있다.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치명적 패전으로 기록된 가덕도 해전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가덕도가 본격적으로 침략과 수탈의 역사 전면에 서게 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하면서부터다. 근대화로 나라 안팎이 격동하던 시대, 외세는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100년 후에도 남아 있는 일본군의 흔적
멀리서 보기에는 숭어들이로 들썩이는 풍요롭고 풋풋한 섬 가덕도.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가덕도 남단에 자리한 외양포는 마을 전체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했던 곳이다. 뭍으로 향한 진해만과 대한해협 사이에 자리한 가덕도의 위치를 살려 일본군은 이곳을 대륙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무려 10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 헌병대 막사 건물이 가덕도를 찾은 이들을 가장 먼저 반긴다.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다. 지금은 매점으로 변신했지만 이 건물 지하에는 당시의 감옥이 남아있다. 이곳의 시간은 100여 년 전에 멈춰 있는 것일까.
진해만 요새 사령부의 중심 포진지터로 향한다. 말 그대로 포가 있던 터다.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니 요새 중의 요새이다. 입구에 ‘사령부발상지지’라는 건립비가 있다. 하지만 한글로 표기된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다. 안으로 들어서면 포를 설치할 수 있는 발사대터와 탄약고 등이 보인다. 군인들이 머물던 내무반 자리도 그대로 남아있다. 속살을 드러낸 내벽에 몽돌이 보인다. 포격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시멘트와 해안 몽돌을 섞은 것. 밖에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완벽한 요새에 몸을 감춘 채 일본군은 가덕도 근방으로 들어서는 러시아 함대를 향해 포를 겨눴을 것이다. 남의 땅에서, 그곳의 주민들을 몰아내고.
일본군은 멀리서도 가까이 와서도 보이지 않는 요새 속에 몸을 감추고 러시아 함대를 향해 포를 겨눴다.
열강들의 식민지 전쟁이 한창이던 20세기 초반, 일본의 러시아 견제는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부동항을 품은 한반도를 원한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이곳 가덕도 외양포에 사령부와 포진지를 만들었다.
부산민학회 회장 주경업 선생은 “외양포를 둘러싼 봉우리에 관측소와 포가 있었을 것”이라며 “이 마을 전체가 당시 주둔했던 일본군 병영을 오롯이 보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과 수 년 전까지도 이곳 주민들이 사용했다는 우물터도 남아있다. 태풍 ‘매미’에 본 모습을 잃은 공용 변소며 수로 시설까지, 외양포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 1904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셈. 좌우로 길게 뻗은 집은 공용 막사였음을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외양포 마을의 모든 집은 생김새가 같다. 지붕색을 달리해 ‘한 지붕 두 가족’ 또는 ‘한 지붕 세 가족’임을 알리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저릿하다. 이 모든 시설을 일본군이 만들었을까.
“나무에 기름을 먹여 집을 올리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에요. 창문 위를 보세요. 이건 일본 고유의 건축양식인 눈썹지붕이에요. 창문으로 햇볕과 비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거죠.” 일제강점기 과거를 가진 이 땅에서 일본식 건물과 마주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저 ‘과거’라고 치부하기에 그 시간이 짧지 않고 상처가 얕지 않다. 이렇게 통째로 군용화 되었던 마을을 돌아보며 과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100년여 전 지어진 헌병대 막사, 무기창고, 장교 사택, 사병 내무반 등이 그대로 현대로 이어진 공간, 가덕도 외양포. 풍요로운 숭어들이의 고장으로만 알고 있기에는 조금 미안하지 않을까.
갤러리
여행정보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가락IC→가락대로(부산신항 방면)→가덕대교→눌차대교→거가대로(천성·대항 방면)→서천로→가덕해안로→대항→외양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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