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는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고’라는 곡이 있다. 오렌지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향기로운 봄을 노래한 곡이다. 오렌지는 아니지만 대한민국에도 그처럼 상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진하게 번지는 곳이 있다. 전남 고흥이다. 11월의 고흥은 유자 수확이 한창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기침을 쿨럭이게 되는 요즘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이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유자의 향과 맛을 따라 고흥으로 떠나보자.
샛노란 유자가 수확을 앞두고 있다
동양의 향기를 만나다
유자는 역사가 제법 깊다. 중국 양쯔강 일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유자를 재배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일신라 시대 장보고가 당나라의 상인에게서 선물로 받아 가져온 것이 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각 도의 진상품목에 유자가 등장하며, 환관을 통해 사신들에게 유자를 주었다는 내용, 유자를 전라도와 경상도 연변에 재배하게 하고 풍흉에 따라 조사한 후 제철에 좋은 것을 골라 진상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 등이 나온다.
고흥은 유자 재배지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유자는 기후 변화에 특히 민감한데, 연평균 기온이 13∼15℃, 최저 기온이 영하 9℃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야 재배가 가능하다. 또한 연간 2,400시간의 일조량, 1,500mm 이상의 연평균 강수량도 중요한 재배 조건이다. 유자나무의 증산 작용과 광합성을 왕성하게 해주는 적당한 바람도 꼭 필요하다. 유자 재배지를 보면 고흥을 비롯해 전남 완도와 진도, 경남 남해와 거제 등 남해안이 대부분이다. 이 지역이 바로 유자 재배의 북방한계선이다.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유자
고흥에서는 유자나무를 흔히 대학나무라고 부른다. 유자나무 한 그루에서 수확한 유자만으로도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무 한 그루에 달리는 유자도 많았을 뿐 아니라 가격도 좋았기 때문인데, 실제로 유자 1개에 1,000원씩 하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10월의 첫 유자는 수요가 많아 가격이 제법 높았다. 고흥 사람들은 문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유자를 꼭 올렸다.
유자는 198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재배가 시작됐다. 가공식품이 보급되고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으면서 급성장한 것이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가격도 폭등했다. 유자나무가 대학나무로 불리던 시기였다. 하지만 수요가 증가하면 공급이 늘게 마련. 너도나도 유자밭을 일구기 시작해 재배 면적이 무려 30배나 늘었다. 결국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해 유자밭을 갈아엎은 사람들도 많았다. 기본적인 경제 원리를 무시한 결과였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웰빙 바람을 타고 서서히 옛 명성을 회복하고 있다.
유자향에 취하고 유자술에 또 취하고
선별 후 유자를 담는 모습
고흥에는 유자농장과 가공공장이 쉽게 눈에 띈다. 고흥의 유자 재배량은 약 6천 톤으로 전국 생산량의 35%에 이른다. 그야말로 유자의 본향이라 할 수 있다. 고흥 전지역에서 유자를 재배하며, 그 중 풍양면과 두원면이 최고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고흥 읍내에서 녹동항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독특한 공원을 하나 만난다. 풍양면 한동리에 자리한 유자공원이다. 유자밭에 서 있기만 해도 향긋한 유자 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바람이 불면 유자향이 온몸을 뒤덮고, 향기에 취해 호흡이 제법 깊어진다.
유자나무에 꼬물꼬물 움직임이 보인다. 유자를 수확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유자나무 가지는 가시가 있어서 열매를 따기가 쉽지 않다. 유자 수확은 대개 2개 조로 역할을 나눠 이뤄진다. 유자를 따서 떨어뜨리면 밑에서는 유자 상태를 확인하고 상자에 담는다. 수확한 유자는 일부 인터넷을 통해 판매되지만, 대부분 농협에서 일괄 수매하거나 가공공장으로 들어간다. 푸른 이파리 사이로 샛노란 유자가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여간 풍성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올해는 두 차례 태풍으로 낙과가 많아 수확량이 줄었다고 한다.
유자향주와 잘 어울리는 삼치회
유자공원에는 유자판매장을 중심으로 전망대와 흥무정을 거쳐 되돌아오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탁 트인 전망은 아니지만 전망대에 오르면 한동리 주변의 유자 재배 단지가 내려다보인다. 유자공원 산책로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유자공원 인근에는 풍양주조장이 있다. 고흥 특산주인 유자향주를 만드는 곳이다. 시설을 확장하느라 옛 집의 절반이 무너졌지만, 유자향주의 맛을 볼 수 있다. 유자향주는 3년간 발효시킨 유자와 감초, 당귀, 황기, 계피, 생강 등 한약재를 넣은 뒤 20일간 숙성시켜 만든다. 맑은 탁주로 단맛이 꽤 강하지만, 부드럽고 유자향이 은은하다. 유자향주는 2012 여수세계박람회의 공식 건배주로 채택되었고, 참장어, 낙지, 삼치, 전어, 서대, 굴, 매생이, 붕장어 등과 함께 고흥이 자랑하는 맛, 이른바 ‘고흥 9미’에 속한다.
육지에서 유자가 제철이라면 바다에서는 삼치가 제철이다. 외나로도의 나로도항은 예부터 삼치 파시가 섰던 항으로 지금도 삼치로 알아주는 곳이다. 삼치는 숙성시켜 회로 먹는데, 김에 싸서 양념장에 찍어 먹으면 고소하면서도 살살 녹는 맛이 일품이다. 달콤한 유자향주를 한 잔 곁들이면 이만한 찰떡궁합이 없다.
더 이상 섬이 아닌 소록도를 찾아
녹동에서 멈췄던 27번 국도는 바다 건너 거금도까지 이어진다. 2009년 소록대교에 이어 지난해 거금대교가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소록도와 거금도는 이제 섬 아닌 섬이 되었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소록도에 가려면 녹동항에서 배를 타야 했지만, 지금은 늘씬하게 이어진 다리 위를 달려 차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소록도 주차장에서 소록도병원까지는 해변을 따라 600m를 걸어가야 한다. 소록도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다. 병원의 전신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한센병 전문 병원으로 세워진 소록도 자혜의원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가슴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환자들을 불법 감금하고 출감할 때에는 강제로 정관수술을 시행했다. 당시의 감금실과 검시실뿐 아니라 만령당, 식량창고, 신사, 등대, 녹산초등학교 교사, 원장 관사 등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소록도에 남아 있는 옛 건축물들은 자혜의원 본관(전남 문화재자료 제238호)을 제외하고 모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불법감금이 이뤄졌던 소록도 감금실의 전경
소록도 남쪽에 자리 잡은 거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큰 섬이다. 소록도와 거금도는 거금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다이아몬드형 주탑을 케이블로 연결해 세운 사장교로 1층은 보행자도로와 자전거도로, 2층은 차도로 설계된 복층 교량이다. 해상에 설치된 다리로는 유일무이하다. 거금대교를 건너자마자 우측에 자리 잡은 주차장에는 거금대교의 전경을 담을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노란빛을 띤 거금대교가 파란 하늘, 짙푸른 바다와 조화를 이룬다. 총 길이 2km의 거금대교에서는 바다의 비경을 감상하며 걷거나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소록도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을 통하면 소록도까지 둘러볼 수 있다.
갤러리
여행정보
<가는 길>
영암순천고속도로 벌교IC → 벌교교차로에서 고흥 방면 15번 국도로 우회전 → 상림교차로에서 우측 방향 → 고흥유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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