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아가면서 끝을 경험한다. 예정된 경우, 급작스러운 경우 등 다양한 끝이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끝과는 익숙해지기 어렵다. 우리가 한 번쯤 ‘땅끝’에 가기를 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리라. 땅끝에서 끝의 실체를 직접 보고 또 걷고 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으니까. 그 기대감을 따라 서울에서 천 리 길, 그래서 한 때 버려졌던 땅 해남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해남윤씨 종손이 머물던 사랑채 녹우당
한반도의 시작이자 마지막, 땅끝
한반도의 끝이자 시작점인 땅끝은, 이름 그대로 반도의 최남단 해남에서도 가장 남쪽에 자리한다. 덕분에 사람들은 끝과 시작이라는 상징성을 좇아 해남 땅끝을 찾아든다. 수도권에서 출발할 경우 꼬박 한나절은 달려야 닿는 거리다. 해남에 와서 땅끝만 보기에는 아쉬움이 큰 이유다. 이왕 찾은 김에 해남 구석구석 살펴보자. 볼 거리며 먹거리 넘쳐나는 해남 여행, 지금부터 출발.
해남 지도를 펼쳐보면 위 아래로 이어진 고산 윤선도 유적지~대흥사~미황사~땅끝을 살펴보고 좌우로 뻗은 고천암 철새도래지~우항리 공룡화석지~우수영 관광지를 둘러보는 동선이 그려진다. 이 모두를 제대로 둘러보기 위해서 (수도권 출발 자가운전 기준) 최소 2박3일은 필요하다. 각자 취향과 일정을 고려해 더하거나 빼면서 동선을 정하면 된다. 일출과 일몰 모두 볼 수 있는 땅끝, 일몰 포인트로 꼽히는 미황사·고천암 철새도래지·화원 매월 등을 기억해 두면 숙소와 동선 선정에 도움이 된다.
해남IC나 평동IC를 지나 해남 땅에 들어서면 가까이에 고산 윤선도 유적지와 대흥사(두륜산도립공원)가 있다. 먼저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보고 대흥사에 들렀다 미황사에서 일몰을 감상한 후 땅끝으로 이동해 1박 하기로 했다. 이튿날 맴섬 일출을 보고 땅끝을 둘러볼 요량이다. 도착시간이 오후라면 먼저 땅끝을 둘러보고 이곳에서 일몰과 일출을 본 후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도 괜찮다.
조선 명문가 해남윤씨 고택을 찾아
2010년 개관한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 전경.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지난 2011 한국건축문화대상 사회공공부문 대상인 대통령상을 차지했다.
해남 여행의 시작은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서 출발한다. 볼거리 넘치는 해남이지만 고산을 빼고는 아무래도 섭섭하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살펴보고 해남윤씨 종택인 녹우단(綠雨壇·사적 제167호)으로 향해보자. 동선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지난 2010년에 개관한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은 고산과 해남윤씨 종손들의 작품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내로라하는 명문 사대부가였던 해남윤씨 가계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고산의 육필은 물론 그의 증손 윤두서의 공재자화상(국보 제240호) 등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들이 눈길을 끈다.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전시관을 가득 채운 유물 하나하나에 무엇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고이 간직해 온 후손들의 정성이 전해진다. [어부사시사], [오우가]를 통해 교과서에서나 만났던 아득한 고산의 실체와 마주하는 듯하다.
이쯤 고산에 대해 살펴보자.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 1628년(인조6) 별시문과의 초시에 장원을 하며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 된다. 정적,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함께였다. 귀양과 은둔으로 채워진 그의 정치 인생 중 최고의 시간이었으리라. 녹우당은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이다. 수원에 있던 집을 고산이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옮겨왔다.
초록색 비가 내리는, 고산 윤선도의 집
녹우당을 지키는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 옹. '녹우당' 현판은 동국진체를 최초로 쓴 옥동 이서의 작품이다.
흔히들 헛갈려 하는데 종손이 기거하는 사랑채가 녹우당(綠雨堂)이다. 녹우당과 고산 사당, 어초은 사당, 추원당 등을 품은 해남윤씨 종택 전체를 아울러 녹우단(綠雨壇·사적 제167호)이라 한다. 당호인 ‘녹우(綠雨)’는 동국진체를 최초로 쓴 옥동 이서(1662~1723)가 지었다. 녹우당 현판 역시 그의 작품이다. 고산의 증손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사이다. ‘녹우’를 그대로 풀어내면 ‘초록색 비’다. 풀과 나무가 푸릇할 때 내리는 비라, 싱그러운 생명수를 뜻한다. 이외에도 녹우당 앞 은행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녹우당 뒤에 자리한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 등으로 해석되곤 한다.
고산 유적지로 너무 유명하기 때문일까. 으레 녹우당을 고산의 생가로 여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물전시관의 고산 양자 예조입안문서(보물 제482-5호)를 보면 고산이 8세 되던 해 큰집으로 입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처음 해남 땅을 밟은 것은 25세가 되던 해. 그 전까지는 서울에서 살았다. 85년 고산의 일생에서 유배지에서 보낸 20여 년을 제외하고 가장 오랜 시간 머문 곳은 서울이었다. 이곳 해남 녹우당에서 6년, 금쇄동에서 9년 가량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의 은거지 보길도에서는 거의 그 둘을 더한 만큼의 시간을 보냈으니 고산의 흔적을 더 느끼고 싶다면 보길도에 들러보는 게 좋겠다. 땅끝에서 보길도(노화도)행 여객선이 출항한다.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고산의 육필이 새겨진 [금쇄동기](보물 제482-2호), [산중신곡](보물 제482-3호), [어부사시사] 등의 책자를 비롯해 고려시대 노비문서(보물 제483호), 고산 양자 예조입안문서(보물 제 482-5호) 등 볼 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증손 공재의 작품도 만만치 않다. 앞서 소개한 공재의 자화상 윤두서상(국보 제240호)을 비롯해 공재화첩(보물 제481호), 백마도(보물 제481호), 동국여지지도(보물 제481-3호), 정물화와 진경산수화 등이 기다리고 있다.
비자나무 숲 속, 초록색 비가 내리는 집
녹우당 뒤편 비자나무숲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고산 사당
유물전시관을 살펴본 후 녹우당으로 가보자. 부드럽게 휘어진 담벼락이 운치있게 이어진다. 신기하게도 솟을대문이 옆구리에 나 있다. 해남군청 박미례 문화해설사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는 뜻이라고 이를 설명했다. 녹우당에는 현재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 옹이 생활하고 있다. 보통은 사랑채(녹우당) 관람이 가능하지만 안채가 공사 중이라 양해를 구하고 녹우당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쓰지 않던 보온을 위한 이중처마에서 실사구시를 추구한 가풍을 엿볼 수 있다.
녹우당까지 갔다면 돌담을 따라 비자나무숲까지 걸어보자. 고산 사당을 지나 해남 윤씨 중시조 어초은 윤효정(1476~1543) 사당을 지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길이 나온다. 어초은 윤효정은 녹우단에 터를 잡아 해남윤씨가 번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그의 유훈을 받들어 후손들이 비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해남 별미 비자강정이 만들어진 이유기도 하다. 방귀 좀 뀐다는 양반들은 해남윤씨 종택을 방문하면 비자로 만든 한과와 차를 대접받았단다. 예나 지금이나 비자강정은 구경도 못했을까, 아쉬운 마음 한겨울에도 여전한 비자림 스치는 빗소리에 남몰래 달래본다. 고산도 이곳에서 이 빗소리를 들었을까.
갤러리
여행정보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목포IC→2번 국도(영암·해남 방면)→영산강하구둑→월산교차로→13번 국도(해남 방면)→해남읍→806번 지방도(대흥사 방면)→연동리 사거리에서 좌회전→고산 윤선도 유적지
Tip 윤선도 유적지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 들어서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어른 1000원, 청소년과 군인은 700원이다. 먼저 유물전시관을 살펴보고 녹우당으로 넘어가자. 유물전시관에서 상주하는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들을 수 있다.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 유물전시관을 살핀 후 녹우당관 비자림 산책까지 모두 하려면 넉넉하게 2시간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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