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전남 나주읍성

智美 아줌마 2014. 8. 25. 12:26

나주읍성 한국 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천년 역사를 걸으며 즐기는 시간 여행

산을 등지고 강을 앞둔 평지가 넓은 나주. 수려한 강산에 살기도 좋으니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지사.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나주에 쌓여 있다. 이번 여행은 나주읍성에 관한 이야기가 주인공이다.

완사천

버들잎 띄운 물 한 그릇의 역사, 완사천

 

나주읍성에 들어가기 전 들려볼 곳이 있다. 왕건이 첫눈에 반한 여인을 만난 곳 ‘완사천’으로 향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 그는 궁예의 장군으로 견훤과 싸우기 위해 나주에 오게 된다. 한 샘터에서 빨래 중인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부탁했는데, 여인이 건넨 바가지의 물에는 버들잎이 떠 있었다. 급히 마시면 체할지 모르니 잎을 띄운 것이다. 이 여인이 바로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다. 이 설화의 배경이 바로 완사천이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로,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넘어가는 역사적 지점이기도 하다.

말을 탄 왕건과 장화왕후의 조형물에서 고려와 나주의 깊은 관계가 전해진다. ‘전라도’는 고려 현종이 전주와 나주의 첫 자를 따와 만든 지명이라는 점,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피신한 장소가 나주라는 점에서 나주는 예부터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 년 나주를 한 눈에, 나주목 문화관

 

나주읍성 모형

이런 나주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나주목’, ‘목사’, ‘목사골’ 등이다. 공통으로 들어간 ‘목’에서 당시 나주의 중요도를 확인할 수 있다. 목은 요즘의 시, 군과 비슷한 고려, 조선시대의 행정단위이다. 전남에서는 나주가 유일한 목으로 지정돼 일대의 경제·문화·군사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983년부터 1895년 동안의 이야기가 ‘나주목 문화관’에 이해하기 쉽도록 전시돼 있다.

문화관 한쪽엔 조선시대 나주읍성 모형이 정밀하게 만들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읍성이 많았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읍성을 가진 고을이 179개에 달한다고 전한다. 나주읍성은 왜구의 침략이 빈번해질 무렵 본격적으로 보수, 증축되기 시작했다. 공사가 마무리됐을 즈음 나주읍성의 둘레는 약 3.5km에 달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나주읍성 모형을 눈여겨 살펴보면서 여행 동선을 그려보고 그 주위에 당시 모습을 눈에 담아두면 여행하면서 더 큰 감흥을 느낄 수 있다. 문화관 앞 관광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 챙기는 것도 잊지 말자.

크고 화려한 도시의 중심, 나주객사

 

나주객사 내부. 왼쪽부터 서익헌, 금성관, 동익헌

모형의 중심에 나주객사가 있다. 다음 목적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의 객사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외국사신이 숙식할 수 있는 시설이었지만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지방궁실인 ‘정청’이 객사에 추가됐다. 정청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뒀으며,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망궐례가 이뤄졌다. 이외에도 왕이 내린 교지가 정청 앞에서 발표됐으며, 왕이 죽으면 정청 앞으로 백성이 모여 통곡했다.

객사 외삼문 ‘망화루’를 지나 내부에 들어갔다. 담장 없는 내삼문이 휑한 공간 가운데를 지키고 있다. 미완성된 공간의 어색함이 감돈다. 내삼문을 지나 객사 본 건물을 정면에 두니 조금은 안정된 모습으로 다가온다. 3채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가운데 건물이 정청인 금성관, 서쪽의 서익헌, 동쪽의 동익헌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시대 나주객사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하는데, 납득할 만한 크기와 화려함이 돋보인다.

나주 목사의 집에서 숙박체험, 목사내아

 

목사 내아

목사가 살던 살림집 ‘목사내아(牧使內衙)’로 가보자. 망화루에서 나와 오른쪽에 나주목 관아의 관문이었던 정수루를 지나야 한다. 정수루 2층에 큰 북이 있다. 여기엔 학봉 김성일 나주목사가 “원통한 일을 하소연하고 싶은 자는 이 북을 치라”라며 북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수루를 지나 약 40m 거리의 목사내아로 들어갔다. 대문 가까이 문간채와 ‘ㄷ’자형 안채 그리고 마당이 단촐한 느낌의 조화를 이뤘다. 손님접대가 많았던 까닭에 부엌을 넓게 만들었다. 현재는 문화재로 지정돼 숙박체험이 가능하며 정수루의 북 이야기로 알게 된 김성일 목사의 이름을 딴 방도 있다.

왕을 상징했던 금성관에서 나주목사가 머물던 살림집을 거쳐 나주향교로 향했다. 읍성 중심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신분이 낮은 선조의 흔적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읍성 안에서는 관리와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 부유한 농민이 살 수 있었다. 평민에게 성곽은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기도 했던 것이다. 서성문을 지나 읍성 밖 나주향교에 도착했다.

밤낮으로 공부하던 곳, 나주향교

 

나주향교 대성전

조선 성종 11년, 한 향교의 교생 10명이 동시에 과거를 급제했다. 나주향교 오한 박성건의 제자들이었다. 이외에도 고려, 조선시대에는 나주의 인물이 관직에 많이 올라 나주는 '인물의 보고'라고 불렸다.

나주향교는 고려 후기, 전국 12목에 향교가 들어서던 시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향교 중 특이하게 전묘후학(제사공간이 뒤, 학습공간이 앞으로 구성) 배치를 보인다. 이중 나주향교 대성전이 눈길을 끄는데,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흙으로 벽을 만들었다고 하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이 건물을 표본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유생이 잠을 자고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는 규모가 엄청나다. 당시 나주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주의 주요문화재를 둘러보는 코스가 끝나면, 정처 없이 그냥 걸어보길 권한다. 숨이 거칠어지지 않을 정도로 걷는 동안, 곳곳에 남은 나주읍성의 속살이 보인다. 어느새 나주는 금성관의 위엄보다, 나주목이란 명성보다, 그저 친근한 옛 시절의 멋진 고장으로 가슴을 물들였다.

갤러리

여행정보

나주목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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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무안광주고속도로 나주IC → 양천교차로 (나주방면) 라복교차로 → 마한로 영산포 (나주시청 방면) → 완사천 → 나주로, 한국통신 앞 (나주세무서 방면으로 우회전) → 나주객사 (좌회전) → 나주목 문화관, 관광안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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