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파주 황희 정승과 율곡 이이 묘

智美 아줌마 2014. 8. 25. 12:29

경기도 파주 한국 관광공사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야기 황희 정승과 율곡 이이의 넋을 따라

황희 정승과 율곡 이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둘 다 파주에 묘소가 있다는 것. 아이들과 함께 역사책 한 권 들고 파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황희 선생 묘소

청백리의 상징, 황희 정승을 찾아서

 

자유로 낙하IC를 빠져 나와 잘 닦인 4차선 도로를 달린다. 내비게이션에서 금승리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린다. 청백리의 표상이자 명재상으로 알려진 방촌 황희 선생의 묘(경기도기념물 제34호)를 찾아가는 길이다.

황희 선생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활동한 대표적 정치가이다. 고려 우왕 2년 관직에 발을 들여 성균관학록을 지냈고, 고려 멸망 후에는 역성혁명으로 개국한 나라에서 관리를 지낼 수 없다 하여 70여 명의 고려조 신하들과 두문동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이때 생겨난 말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하지만 동료들의 끈질긴 추천과 조선 조정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섰고,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55년간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명재상으로서 이름을 높였다. 특히 세종 때에는 19년간 영의정을 지내며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황희 선생 동상과 경모재

황희 선생의 명망에 걸맞게 묘역의 규모도 넉넉하다. 우선 3단으로 조성된 묘역이 시선을 끈다. 제일 아래에는 문인석이, 그리고 그 윗단에는 동자석이 한 쌍씩 마주 보는 형태로 서 있다. 장명등은 두 동자석 사이에 자리했다. 봉분의 전면 호석을 ‘ㄷ’자 모양으로 조성한 것도 특이하다. 개경에서 태어난 황희 선생이 파주에 묘를 쓴 이유는 고향과 벼슬지의 중간에 자리해 두 곳 모두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황희 선생 묘에서 차를 돌려 당동IC를 지나면 황희 선생 유적지가 나온다. 황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와 벗하며 지냈다는 반구정(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호)과 황희 선생의 영정을 모셔놓은 방촌영당(경기도 기념물 제29호) 그리고 황희 선생의 동상 등이 있는 공간이다. 먼저 반구정에 오른다. 시원스레 흘러가는 임진강의 모습이 일품이다. 반구정 옆 앙지대는 반구정이 있던 옛터로 1915년 반구정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지은 것이다. 앙지대는 황희 선생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 두 정자 모두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지만 1967년 이후 몇 번의 개축과 증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반구정에서 내려서면 경모재가 있고 양 옆으로 방촌영당과 황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대학자가 학문을 논하던 정자에 서서

 

화석정

율곡 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는 첫 번째 여행지는 화석정(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이다. 화석정은 임진나루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율곡리 임진강변에 자리했다. 황희 선생 유적지에서 차로 1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화석정은 율곡 선생의 손때가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고려 말의 유학자 길재가 세운 화석정은 율곡 선생이 여가가 날 때마다 찾은 곳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율곡 선생이 사랑했던 화석정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두 번이나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6년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화석정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 가던 선조가 어둠과 폭우로 길이 막혀 당황하고 있을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임진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평소 율곡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정자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발라둔 덕분이라고 한다.

율곡 선생 유적지 기념관의 전시물들

화석정을 둘러봤으면 다음은 율곡 선생 유적지로 갈 차례다. 율곡 선생 유적지는 크게 3개 영역으로 나뉜다. 기념관과 자운서원 그리고 가족 묘역이 그것. 최근 리모델링한 기념관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볼거리와 영상물이 가득하다.

자운서원(경기도기념물 제45호)은 조선 광해군 7년 율곡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잔디광장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자운서원이다. 효종 원년에 ‘자운(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돼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70년 지역 유림이 모은 기금과 국가 지원으로 복원했다.

율곡 선생 가족묘의 미스터리

 

율곡 선생 묘

율곡 선생 유적지가 기대어 있는 자운산 기슭에는 율곡 선생의 가족 묘 15기가 모여 있다. 율곡 선생의 직계 가족은 중심 묘역에 나란히 잠들었다. 가장 윗자리에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의 묘(경기도기념물 제15호)가 전후합장 묘의 형태로 자리했다. 그 아래 맏형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그리고 그 아래에 모친 신사임당과 부친 이원복의 합장묘(경기도기념물 제14호)가 있다. 가장 아래쪽은 율곡 선생의 맏아들인 이경림의 묘다.

무덤의 배치에서 특이한 점은 율곡 선생의 묘와 맏형 부부의 합장묘가 부모의 합장묘보다 위에 있다는 점이다. 학식이 높았던 율곡 선생의 묘는 그렇다 치더라도 맏형 부부의 합장묘가 부모의 합장묘보다 위쪽에 있는 게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는 조선시대 종종 있었던 역장묘(逆葬墓)의 형태로 풍수를 중요시했던 당시의 풍습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리고 율곡 선생의 묘와 부인 노씨의 묘를 온전히 합장하지 않고 전후 합장 방식으로 조성한 것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 이유와 관련하여 부인 노씨의 죽음이 호상(好喪)이 아니었다는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율곡 선생의 신도비에는 부인 노씨가 왜인을 꾸짖다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갤러리

여행정보

자운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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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자유로 낙하IC → 황희 선생 묘 → 자유로 → 당동IC → 반구정 → 37번 국도 → 화석정 → 364번 지방도 → 자운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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