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충현 박물관(이원익 유적지)

智美 아줌마 2013. 8. 1. 12:42
시원하게 가학 동굴 관람을 하고 충현 박물관으로 간다. 가학 동굴에서 직접 가는 차편이 없어 갈아 타고 가야 돼서 기사 아저씨한테 갈아 탈 수 있는 정거장에 내려 달라고 부탁을 하니 어디쯤 가다가 이곳에서 내려서 3번을 타고 다시 물어 보라고 했는데 내리고 보니 얼레? 생뚱맞게 시골 어느 한적한? 아니 민가도 없는 벌판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어찌 되었든 뙤약볕에 서서 기다리니 버스가 오기에 탔더니 이런 반대로 가는 버스란다. 에구에구 ~ 그래서 아예 광명역으로 가서 75번 버스를 타고 충현 박물관으로 갔다.

광명역에서 2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충현 고등학교, 이화 주유소" 정거장에 내리면 바로 이정표가 보인다.

 

개인이 운영하는 박물관인데다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관람하는 사람이 없고 매표소에 관람 신청을 하면  대문을 열어주는데 왜 문을 닫아 놓고 있냐고 물으니 도난 사고가 있어 어쩔 수 없이 관람객이 오면 문을 열어주고 있다고 한다. 서글픈 현실이다.

 

우와 ~ 대문이 열리는 순간 정면에 각양 각색의 다듬이돌이 계단 층층이에 진열이 되어 있는데 이 댁 종부께서 모으신 거라고 한다.

어릴 적 보던 밋밋한 다듬이돌이 아니라 모양도 다르고 문양까지 새겨져 있는 게 높으신 댁에서 쓰던 것인가 보다.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도 있고 둘러보니까 생각보다 규모가 꽤 넓다.

왼쪽  앞쪽이 종가, 안쪽으로 관감당이 있는데 우선 오른쪽 건물 전시실 관람부터 한다.

오른쪽 건물 전시실은 1,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 전시실로 들어가자.

전시실 입구에도 다듬이돌이? 다듬이돌 사랑이 깊으신가보다.

 

충현 박물관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 재상인 오리 이원익과 그의 직계 후손들의 유적 및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박물관 일대는 이원익이 말년에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이원익의 13대 종손인 이승규와 종부인 함금자 부부가 종가의 생활 모습을 통하여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조선시대의 충․효, 청백리 정신 등의 정신문화를 보급하고자 설립하였다. 2003년 5월 재단법인 충현문화재단의 설립 후, 2003년 10월 24일 충현박물관을 개관하여 이후 2004년 8월 경기도 테마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박물관에는 영정을 모신 사당인 오리 이원익영우, 인조가 지어준 집인 관감당, 1676년 숙종이 편액을 내린 충현사원지, 종택 등 경기도의 지정문화재가 여럿 있다. 전시관(충현관)에는 이원익 관련 유물과 자료, 종가의 민속생활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밖에 풍욕대, 심상대, 탄금암, 이원익의 부모·형·숙부의 무덤이 있다.

 

1층 전시실에는 종가에서 사용했던 제기와 민속 용품과 400여 년 전의 유물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집의 각종 자료를 볼 수 있다.

 

버들고리는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으로 종가의 혼사나 제사 등 큰일을 치를 때 떡이나 엿을 담아 두거나,. 사돈 댁에 이바지 음식을 보낼 때 사용하한 고리상자이다. 버들고리는 동고리, 떡고리, 버들고리, 고리짝등 지역마다 명칭이 다양하다.

 

 

납폐함, 12대 종손 이병돈이 강릉 최씨에게 보낸 납폐함으로 혼사가 정해지면 신랑집에서 약혼의 표시로 혼서지와 함께 신부 치맛감 등 혼수품과 그 내역을 적은 물목단자를 납폐함에 담아 신부 집에 보냈다. 납폐함은 혼인을 상징하는 예물이기 때문에 자손번창이나 가내평안을 뜻하는 수복 문자와 박쥐 문양을 주로 장식하였다.

 

옥바리와 합, 일제시대 쓰던 여자용 밥그릇 옥바리와 남자용 그릇 합, 옥바리에는 물을 담아 자리끼로 쓰기도 하였다.

오리 영우에서 쓰던 300년된 제기

 

교지, 1729년 영조 5년 6월 25일, 당시 61세였던 이원익 4대손 이존도(1659~1745년)에게 종2품 동지중추부사를 임명한다는 교지이다.

 

백패(左) 1705년 숙종 31년 10월,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이 생원시에 2등 제19인으로 합격했음을 증명하는 백패이고 홍패(右)는 1714년 숙종 40년 이원익의 5세손 이인복이 과거시험에서 갑과 제3인에 급제하였을 때 받은 교지로 당시 이인복의 나이 32세로 처음 과거에 급제했다.

 

오리영우 열쇠패, 종가 내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오리영우의 문을 열고 닫았던 열쇠패로 "영우개쇠패"라 새겨 사용처를 밝히고 있다.

1693년 숙종 19년 10월 이관징이 쓴 편액으로 건물은 이듬해 건립 되었다.

 

금오계첩, 조선시대 사법기관인 의금부 관리들의 계모임 참석자 명단을 기록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금오는 의금부의 별칭이다.

열성어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글씨들을 모은 첩

 

녹표, 조선시대의 월급 급여명세서로 이원익의 4세손인 정2품 자헌대부 이존도의 것이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급여는 조선전기에는 1년에 4번 계절별로 지급되었다가 이 후 1671년 현종 12년부터 월급제로 바뀌었다. 전표에 적혀있는 급여는 쌀 2석 2두, 콩 1석5두이며, 감찰과 당시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기관인 광흥청 관리의 수결이 보인다.

 

 

고성에서, "산 아래 외로운 성엔 달이 늦게 오르니 한번 취하여 서로 머물러도 기약은 없었네. 명년의 오늘 저녁은 어느 곳에서 저 맑은 빛을 누구와 함께 말하리"

오리 이원익 선생님의 영정, 평양 생사당 구장 이원익 영정(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 호성공신도상 이원익 영정(우) (보물 제1435호) 영정

관감당 편액, 인조 임금이 하사한 집인 관감당의 편액으로 조선시대 임금이 하사한 사택 중 현재 유일하게 보존 되어 있는 곳이다.

이원익 신도비 사진,

 

종가는 나중에 관람하고 . . .

충현서원부터 가본다.

충현서원

 

맥문동

 

 

 

이원보 내외의 묘, 이원보(1530-1589)는 이원익의 형으로 자는 백익이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 생원을 거쳐 통진군수을 지냈는데, 백성이 그의 유덕을 사모하여 돌에 새겨 표하였다. 1604년(선조 37)에 호성공신이 되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표석이 있으며, 참판 박숭원이 짓고, 동생 이원익이 쓴 음기가 있다.

 

 

 

함천군 내외 묘, 이원익의 부친으로 이름은 이억재(1503-1584)로 자는 대년이다. 처음에 부수에 제수되었고, 후에 명선에 올랐다. 장수하였기 때문에 함천군에 봉해졌고, 이원익이 공신이 되자 사후 순충적덕보조공신에 증직되고 현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향년 82세로 장수하였다.

 

야외 교육장, 각종 소규모공연이나 학생들의 단체 관람이후 간단한 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풍욕대

 

풍욕대는 “바람에 목욕한다”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정자이다. 실제로 풍욕대라는 이름은 『논어』「선진」편에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귀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민속 전시장

삼상대

 

삼상대는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의 삼정승을 모두 일컬을 때 쓰는 용어로 이원익이 삼정승을 두루 거쳤으며 많은 치적이 있었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및 문인에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릇

 

이억령(1514-1596)은 자는 대옹이다. 처음에 부수를 제수받고, 뒤에 명선의 품계에 올랐고, 숭천도정을 지냈다. 향년 83세로 장수하였다. 함천군의 동생이며, 이원익의 숙부이다.

 

 

 

 

 

 

 

 

왕원추리

 

상사화

 

능소화

 

 

 

 

종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1917년에 문간채는 1940년경에 건립되었다. 안채 들보에 “龍 觀感堂建翌年丁巳閏二月六日未時立柱上樑 龜”라고 씌여 있어 건립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은 “관감당을 세운 이듬해 정사년(1917) 윤2월 6일 미시(오후 1~3시)에 기둥을 세우고 동량을 올렸다.”라는 뜻이다.

 

 

 

 

 

인조 때 지어진 관감당은 637년(인조 15)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서거 60주년인 1694년(숙종 20)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다시 어느 시기인가에 허물어졌다가 1916년 10대손 이연철에 의해 다시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호수 400년 측백나무

 

 

 

혼자 여유있게 둘러 보면서 셀카!!

 

탄금암, 이원익(1547~1634) 선생이 거문고를 연주하던 바위이다. 거문고는 선비의 악기로 알려져 있다. 선생의 문집인 『오리집』「연보」에 따르면, 선생은 현재 동숭동 인근에 사실 때 자주 낙산에 올라 거문고 연주를 즐기셨다고 한다.

 

 

 

오리영우는 오리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뜻으로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종가의 사당의 경우는 위패를 모시고 있으므로 ‘○○사'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내부에 감실을 따로 두고 영정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므로 ‘영우'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 본 중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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