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

智美 아줌마 2013. 9. 27. 16:43

 

단종은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후 죽음을 맞이하였다. 단종이 죽은지 59년이 지난 중종11년(1516) 그의 묘를 찾게 되었는데, 관리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 고개를 지날 때마다 소나기가 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단종의 원혼이 소나기를 뿌렸다고 믿어 '소나기재'로 불렸고 홍살문은 1987년 영월군에서 세웠는데 고개를 내려가면 바로 단종이 계시는 장릉이 나온다. 법흥사 가는 길에 소나기재를 지나게 된다. 단종의 슬픈 운명을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지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 주셨네. 아, 코끝이 찡하다.

 

 

사자산 법흥사 일주문, 사자산은 횡성과 평창, 영월의 세 경계가 만난 지점에 있다. 사자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백덕산(1,350m)이 감싸주고, 서쪽으로는 삿갓봉, 남쪽으로는 연화봉이 둘러서서 웅장한 산악 맛을 내고 있다. 언제부터 사자산이라 불렸는지는 잘 알 수 없으며, ‘네 가지 재물이 있는 산’이기에 사재산이라고도 부른다. 그 네 가지 재물은 산삼과 옻나무, 가물었을 때 훌륭한 대용 식량이 된다는 흰 진흙과 꿀이다.

 

일주문 뒤의 현판 사자산문흥녕선원 獅子山門興寧禪院

사자산과 백덕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 시작되는 이 물은 주천강으로 흘러간다.

 

 

 

 

 

원음루, 2층에는 커다란 법고와 목어가 있고 아래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금강문으로 되어 있다.

 

 

 

예전의 극락전을 헐고 새로 지은 대웅전, 아직 현관이 걸리지 않았다.

종각

조사전

조사전의 자장율사와 징효대사(절중) 영정

칠원성군, 나반존자, 용왕대신

삼성각

삼성각에는 칠성 탱화,독성 탱화,용왕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흥녕대탑, 아직 미완으로 7층까지 올라갈 예정인 것 같다.

 

 

 

징효대사 부도 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 징효대사 절중(826~900년)은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파를 창시한 철감국사 도윤(798~868년)의 제자로 흥녕사(법흥사의 옛 이름)에서 선문을 크게 중흥시킨 인물이다.

 

 

징효대사 보인탑비는 징효대사의 행적과 당시의 포교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비문 마지막에는 “천복구년세재갑진유월십칠일립”(天福九年歲在甲辰六月十七日立)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천복 9년’, 곧 고려 혜종 1년(944)에 부도비를 세웠으며, 보인(寶印)이라는 탑호를 받아 ‘징효국사보인지비’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윗 부분 이수는 네 모서리에 각각 한 마리씩, 용 네 마리가 모두 목을 길게 뽑고 머리를 가운데로 내밀며 화염에 싸여 있는 보주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형상이다. 정면 중앙에는 ‘고징효대사비’(故澄曉大師碑)라는 글씨가 전각체로 조각돼 있다. 보물 제612호로 지정돼 있다

 

보호수 200년 된 밤나무

만다라전, 만다라는 원, 즉 우주를 상징한다.

 

이제 적멸보궁으로 올라간다.

적멸보궁 올라가는 길

산박하

전나무 숲길을 300m정도 올라가야 적멸보궁이 있다.

 

 

물봉선

 

법운당(요사채) 불자들이나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

법흥사 제2보궁 약사전 뒤로 구봉대산으로 부처님이 누워 계신 형상이라고 한다.

약사전

약사여래와 협시불

약사전 뒤

적멸보궁의 산식각

 

나도송이풀은 식물 스스로의 뿌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다른 풀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한해살이풀이다.

상단은 부처님께 올리는 물이므로 사용하지 말고 중단의 물을 불자들의 식수로 사용하라는 안내 글이 있다.

이 돌 계단으로 또 올라가야 적멸보궁

씀바귀

 

적멸보궁,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선덕여왕 12년(643) 귀국한 뒤 평창 오대산 상원사와 정선 태백산 정암사, 양산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끝으로 영월 사자산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사찰이다.

 

 

적멸보궁 안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리탑이 건물 뒤쪽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과 부도비가 창으로 보인다.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토굴은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었으며, 봉토를 올리기 위해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이 작게 보이지만 내부는 높이 160㎝, 깊이 150㎝, 너비 190㎝ 정도 되는 비교적 넉넉한 공간이다.

 

 

적멸보궁 뒤 편에 있는 토굴 옆의 이 사리탑은 고려시대의 부도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 8각 원당형 탑으로 전후면에는 각각 문비가 모각되고 전면 문비의 양 측면에는 인왕이, 나머지 4면에는 사천왕상이 조식되어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이 사리탑은 기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스님의 부도로 이것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 둔갑한 연유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진신사리의 영원한 보전을 위해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딘가에 사리를 숨겨둔 채 적멸보궁을 지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지금도 간혹 사자산 주변에 무지개가 서리는 것은 바로 그 사리가 발하는 광채 때문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생애를 조각한 판석을 적멸보궁터 아래에 둘러 세워놓았는데, 솜씨가 매우 조잡하다고 하니 석공이 누군지 심기 불편하겠다.

 

 

 

 

 

적멸보궁 왼쪽으로 가는 길이 있어 봉분 위로 올라가가볼까 했더니 가시덤불이 있어 그냥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왼쪽 심우정, 현심당, 요사채, 공양간, 종무소 . . .

법흥사 전경

법흥사 계곡을 따라 이제 서울로 가기 위해 내려간다.

 

법흥사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쪽 민가 옆에 위치한 흥녕선원지는 법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집터(74평) 1곳을 포함해 약 1만평 규모로 현재 집터에는 일부 훼손된 주춧돌 10여 개만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특히 이 일대에 흩어져 있던 징효대사의 부도(강원유형문화재 72)와 부도탑비(보물 612), 주인을 알 수 없는 부도(강원유형문화재 73) 1기, 금동불상 1기, 부도에 사용되었던 석재 등의 유물들은 대부분 법흥사 경내로 옮겨졌고 금동불상은 단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흥녕선원의 길을 알려주기 위한 3개의 안내석탑과 1개의 수호불상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석탑은 제천시 장락에 있는 석탑, 무릉리 삼층석탑, 주천리 삼층석탑(강원문화재자료 28)이고 수호불상은 징효대사가 입적한 곳인 요선정(강원문화재자료 41)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강원유형문화재 74)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까치밥 열매같은데 . . .

흥령교

며느리밑씻개와 혼동하기 쉬운 고마리, 며느리밑씻개는 줄기에 가시가 있다.

빨간 코스모스와 파란 하늘이 넘 예뻐.

노관초라고도 하는 이질풀은 많은 양의 타닌과 케르세틴이 들어 있어 소염·지혈·수렴·살균 작용이 있다

붉은 수수밭이라는 중국 영화가 생각나네. 광활하게 펼쳐진 붉은 수수밭

 

연화교와 일주문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니 법흥사로 드어가는 버스가 오기에 타고 들어갔다 나올까 했더니 그냥 휙 들어가 버린다. 그래, 나올 때 타지 뭐. 그런데  아래 백일홍 사진 찍고 있는데 버스가 또 그냥 나가버린다. 에구 ~ 뭐냐고?  다음 차를 타고 가자니 1시간 반을 기다려야 되서 주천까지 히치 하이킹해서 타고 나갔는데 친구인 두 아저씨가 타고 있었는데 전에 제천 박달재 넘을 때 어떤 아짐을 태워줬더니 그 여자가 혼자 자해를 하면서 납치범으로 신고해서 낭패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로는 절대 모르는 사람은 차에 태우지 않는데 친구랑 같이 있고 사진 찍으러 온 것 같아 태워 준거라고 한다. 세상 참 믿을 수 없게 변한다. 호의를 그런 식으로 이용해 몹쓸짓을 하다니 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어 정말 그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공감했는데 여행 중에 교통 편이 안 좋을 때는 더러 히치 하이킹을 해서 이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앞으로는 점점 쉽지 않을 것 같다.

 

 

순간 포착 제대로 했다. 너 딱 걸렸다. ㅎㅎㅎ

문제의 백일홍을 찍다가 버스 놓쳐 버리고 주천까지 태워 주셔서 주천에서 제천 가는 버스를 타고 제천역에서 기차 타고 올라왔다.

여기서 영월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는데 영월로 가는 것보다 제천으로 가는 버스 편이 더 많아서 제천으로 갔다.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망산(304m) 기슭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으로부터 ‘주천(酒泉)’이라는 지명이 비롯되었다. 주천(酒泉)은 말 그대로 ‘술이 솟는 샘’을 뜻하는데 고 선생님과 미스터 장이랑 묵밥 집 갔다 오면서 주천샘 있는 곳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조선 성종(재위 1469∼1494)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천샘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다. 옛날에 서천(西川)이라는 곳에 술이 나오는 주천석이라는 돌로 만든 술통이 있었다고 한다. 주천현(縣)의 아전이 술을 마시러 그곳까지 가는 게 귀찮아 사람들을 시켜 현(縣)의 안쪽으로 주천석을 옮기게 하였다. 그때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 주천석이 세 조각으로 나누어졌는데 한 조각은 못에 잠기고, 다른 한 조각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마지막 조각은 주천샘이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주천샘은 옛날에 술이 솟는 샘이었는데 양반이 오면 약주가, 천민이 오면 탁주가 나왔다. 하루는 천민이 양반 옷을 입고 와 약주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평소처럼 탁주가 나오자 화가 치밀어 샘터를 부순 다음부터는 술이 나오지 않고 맑고 찬 샘물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