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북한산 둘레길 왕실 묘역 구간

智美 아줌마 2014. 5. 8. 01:29

가볍게 가까운 둘레길이나 돌고 오자하고 나선 왕실 묘역 구간, 북한산 둘레길 중에서 가장 거리가 짧은 구간이지만 내게는 좋은 역사 공부가 되는 구간으로 두 번을 둘러 보고 왔는데 보존이 안 된 묘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나라에서든 구에서든 관리를 하면 안되나 싶었다.

 

버스 타고 지날 때 둘레길 입구를 봐서 정의 공주묘 앞에 내려 걸어 올라갔더니 우이동 우이령(도선사) 입구에서 내려 걷는 게 훨씬 가까운 걸 모르고 정의 공주 묘 앞에서 내려 고개를 넘는데 헉헉, 예전에 싸가지랑 꽃님이 데리고 넘으면서도 생각보다 힘들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북한산 둘레길 중  20구간 (정의공주묘 ~ 우이령길 입구)이 왕실 묘역 구간이고 인터넷 예약을 해야 갈 수 있는 우이령길이 북한산 둘레길의 마지막 21구간이다. 나는 우이령 입구부터 시작해서 걸어 보았는데 짧지만 숲길이 참 좋았다.

대부분이 흙길과 나무 테크 계단으로 길이 잘 만들어져 있고 평지를 걷는 듯하니 난이도가 낮아 가볍게 산책하면 된다.

조금 올라가니 왼쪽으로 빠지는 길이 있는데 이정표에 우이암을 볼 수 있는 쉼터라고 되어 있어 가봤는데

어떤 나그네가 혼자 막걸리를 먹고 있어 사진만 찍고 돌아나와 내 갈 길을 간다.

쉼터에서 본 도봉산 우이암

쉼터에서 본 영봉,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오른쪽부터)

살방살방 걸어 내려간다. 의외로 평일인데 사람들이 제법 다닌다.

이 일대에 궁 출신의 묘가 200기 정도 있다고 하는데 이 묘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후손이 없어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 . .

숲 속에 난 오솔길, 흙을 밟을 수 있어서 참 좋다. 연세 드신 분들도 헉헉 하시면서도 정담 나누시며 오고 가신다.

아, 이 묘도 후손이 없나보다. 살아실제는 부귀영화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딱하기 짝이 없다. 에효 ~

조금 내려오니 또 묘가 있었는데 이 묘 또한 후손이 없나? 혼유석을 새로 올려 놓은 것을 보니 관리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 . .

이 묘 앞에는 씀바귀 노란 꽃이 목을 가늘게 빼고 쭉쭉 뻗어 피어있다.

봉분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땅비싸리들

잎은 어떤 녀석이 갈아 먹었는지 꽃대만 길게 서있다.

얼레? 이 짧은 구간에도 계측기가 있네. 우측으로 가라고 하니 그렇게 해야지. ㅎㅎㅎ

자주괴불주머니. 약재로 쓰기도 하지만 독초라 함부로 꺾으면 안된다.

산길에서 내려오니 이제 주택가로 연결이 되는데  표지판이 없으면 좀 생뚱맞다.

윤세원 미술관 왼쪽 길로 나왔다.

위 미술관 유리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셀카로, 서너 번 시도 끝에 제대로 각이 맞았다. 나 찾아봐라.ㅎㅎㅎ

작약 꽃봉오리가 탱글탱글 달려있는데 이 아이들은 언제 커서 꽃이 필까?

자주달개비, 자주닭개비라고도 한다는데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라는 건 이번에 알았다. 어릴 때는 창포 꽃인줄 알았는데 . . .

수수꽃다리

주택가로 나오니 바로 원당샘 공원이다.  전통 연못, 벽천, 꽃담, 사모정 등을 만들어 전통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전통적으로 꾸미려고 꽃담도 만들어 놓았고

원당정, 정자와 연못도 있는데 개구리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게 꽥꽤 거리던지 . . .

 


원당샘은 일명 ‘피양 우물’이라고 불리었으나, 6·25 전쟁 이후 물이 잘 나오지 않자 1979년에 주민들이 우물을 가꾸고 관리하면서 현재의 명칭인 원당천 또는 원당샘으로 바뀌었다. 파평 윤씨들의 집성촌 이름이 원당 마을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마을 이름을 본 따 원당샘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수량이 풍부하여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섬에 따라 샘의 수량이 급격히 감소하여 2009년에는 급기야 물이 흐르지 않게 되었다.

지역 주민들이 원당샘의 역사를 찾아 달라며 구청에 복원을 요구하였고 이에 2010년 4월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11년 12월 13일에 원당샘 주변 정비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547번지 일대에 원당 공원이 조성되었다. 원당샘의 수질은 매우 우수하여 2011년 서울시 보건 환경 연구원 수질 검사 결과 먹는 물 수질 공정 시험 기준인 47개 항목에서 모두 기준 적합 판정을 받았다. 2013년에는 서울시 보건 환경 연구원 조사 결과 시중 판매 중인 생수 제품 33개의 평균치보다 미네랄 함량 수치가 높음이 밝혀졌다.

 

지금의 원당샘 모습

2009년 복원 되기 전에 갔을 때 모습인데 당시에는 계단 2개를 내려가야 샘이 있었으나 이번에 가니까 돌을 깎아 덮어 놓았다.


연산군 묘앞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보호수 1호로 지정되어 있고 수령이 540년이나 된다. 약 870년으로 추정됐으나 최근 조사결과 540살로 밝혀졌다고 한다. 높이 24m, 직경 9.6m로 성인 남자 4명이 가려질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이 나무에는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애처로운 사랑 얘기가 전해지는데 연산군은 1506년 폐위된 뒤 강화도로 추방됐고 그 해 숨을 거뒀다.

 

신 씨는 강화도에 마련한 연산군의 묘를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이는 방학동 언덕으로 옮겨 달라고 중종에게 간청해 1513년 남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역사는 그를 비난했지만 신씨에게 연산군은 하나뿐인 지아비였기에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지아비에게 나무로나마 따뜻한 가림막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신씨는 이장을 간청했다고 한다. 나무는 연산군 묘 이장 과정과 휘순공주 내외ㆍ 마지막으로 신씨가 연산군 옆자리에 묻히기까지의 전 과정을 함께했다.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는 나무에 불이 난다는 전설이 있어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1년 전인 1978년에 화재가 났는데 나무에 대한 주민들의 애착이 각별해 주민들은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아파트 단지 건축 당시 구조를 변경했고 도봉구청은 나무 옆 빌라 두 동(棟) 12가구를 매입한 뒤 철거해 나무를 위한 공간으로 꾸며줬다고 한다.

 


이제 연산군 묘로 올라가 본다. 안내소에 근무하는 어르신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니 모른다, 모른다고 하신다. 명색이 문화재 안내소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주변 문화재에 대해 상식이 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시대엔 경기도 양주였으나 현재는 서울시 도봉구로 편입된 이곳에 연산군과 부인 폐비 신씨가 묻혀있고 그 앞엔 조선시대 3대왕 태종의 마지막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 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앞쪽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뒤 유일하게 살아 남은 연산군 딸인 휘순공주와 그의 남편 구문경이 안장돼있다. 현재 연산군묘는 부인 거창 신씨가 강화 교동도에 있던 연산군묘를 양주땅으로 이장 요청, 옮겨 오게 되었다.


곡장 뒤 잉부분에서 내려다 본 묘역, 다른 왕릉에는 산맥이 흐르는 잉부분이 잘 나타나 있지만 연산군 묘의 잉부분은 어수선하기만 하다.


조선 시대의 임금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연산군이 아닐까. 연산군을 폐륜 군주, 폭군으로 종국에는 폐위되어, 묘호도 받지 못했던 연산군은 다른 한편으로는 연산군을 바라볼 때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되고, 생모의 죽음을 모른 채, 새 어머니인 정현왕후의 품에서 자라났지만 후에 생모의 죽음을 알게 되어 복수의 피바람을 불게 했지만 자식이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그의 삶에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폭군으로 폐위된 연산군. 그래서 그의 무덤은 능이 아닌 묘로 칭하는데 왕의 무덤에 으레 있는 용과 여의주 문양도 없이 덧없는 구름 문양만 있고 왕릉에 있는 난간석, 석호, 석양, 석마도 없다. 사후에도 경계대상이었던 그의 곁엔 문인석만 지키고 있고 무인석도 없다. 장명등도 팔각이 아닌 사각으로 되어 있고  “연산군 묘 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비가 오면 바람이 회오리치고 호곡소리가 나는 ‘비수지풍’”이라며 “오봉의 줄기이기는 하나 그 뒤가 실개천에 의해 끊기고 묘 앞쪽으로 받쳐줄 조대산이나 안산이 없어 허망함을 안겨주는 땅”이라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목록에서 연산군묘는 광해군묘와 함께 제외됐다고 . . .

 

 

연산군 옆엔 부인 폐비 신씨가 묻혀있고 그 앞엔 조선시대 3대왕 태종의 마지막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의정궁주 조씨가 후궁으로 뽑힌지 72일만인 세종 4년(1422) 5월 10일에 태종은 연화방 신궁에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태종의 장례가 일단락 된 세종 4년(1422) 9월 25일에 세종은 후궁 조씨로 하여금 의정 궁주를 삼았다.


이렇게 태종과 하루밤도 자지 못한 의정궁주 조씨는 태종이 사망한 후 22년을 더 살다가 단종 2년(1454) 2월 8일 졸하게 되는데 의정 궁주 조씨의 묘가 연산군 묘 바로 아래에 있는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즉 세종의 넷째 왕자 임영 대군이 이 땅을 사패지로 받으면서 왕명에 의해 임영 대군이 후사가 없던 의정 궁주의 제사를 모시게 됨에 따라 1454년(단종 2) 현 위치에 의정 궁주 조씨의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임영 대군의 외손녀인 연산군의 폐비 거창 군부인 신씨요청에 의하여 의정 궁주의 묘 위쪽에 연산군 묘를 이장해 온 것이다.

 

연산군과 의정궁주의 가계도


휘순공주의 남편 구문경의 아버지는 구수영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날 연산 12년(1506) 9월 2일 실록에 구수영은 영응 대군(세종대왕의 8째 막내 아들)의 사위이고, 그 아들은 또 왕의 딸 휘순 공주에게 장가들어, 아첨과 간사로 왕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연산군의 총신 중의 총신으로 애초에 임사홍과 신수근과 함께 제거의 대상으로 분류되었으나 반정의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가 참가 의사를 밝혀 유순, 김수동 등과 함께 2등 정국공신에 올랐다.

 

구수영은 반정이 일어나고 23일이 지난 9월 25일 중종 앞에 가서 아들이 폐왕의 부마가 되었는데, 이제 아들이 죄인의 딸과 절혼하기를 청하여, 휘순공주는 구문경 집안에서 이혼을 당하였다. 휘순공주가 남편하고 헤어져 산지 2년 후 정광필이 용기를 내어 이 문제를 정면으로 중종에게 제기하여 휘순 공주의 칭호를 삭제하고, 구문경의 처로 칭하게 하였다. 정광필은 조광조가 권세를 가졌을 때 가장 조광조 비판에 섰던 사람이 정광필이었지만 조광조가 죽게 되었을 때 조광조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가장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던 사람이 정광필이었다

 



연산군 묘의 제실은 소박한 ‘ㄱ’모양으로 매년 연산군 제의행사 때 사용된다. 연산군 어렸들 때 별명인 양로왕을 따 ‘양로재’라 불리기로 하는데 연산군 종외증손녀의 양자인 이안눌이 지어 1903년까지 연산군 제사를 지냈다. 2010년 개ㆍ보수됐지만 제실 일부가 민간 소유로 넘어가 담을 경계로 개인 집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근처 식당 앞에 핀 불두화

땅비싸리

산딸기꽃

마가목에도 꽃이 피었다.

정의 공주 묘 앞에서 내려 연산군 묘 쪽으로 건너 오니까 금낭화가 피어 있다. 어릴 때 우리 집 화단에도 금낭화가 있었는데 . . .


 

정의 공주는 세종의 딸로 함길도 관찰출척사 함흥 부윤 안망지의 아들인 안맹담과 1428년(세종10)에 혼인을 하였고 안맹담의 자는 덕수, 호는 양효이다.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죽성군에 책봉되었고, 1432년에는 연창군에 봉해진 뒤 세조 때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초서에 능하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고 음률에도 밝았다. 묘소는 정의공주와 쌍분으로 나란히 있다.

 

 

정의공주는 잘 알져지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훈민정음이 완성되기 직전, 소리의 변화원리(변음)과 소리를 토하는 원리(토착)를 아무도 규명해내지 못했는데 정의공주가 이를 밝혀낸 것. 그는 아버지 세종이 정사를 펼칠 때 높은 식견과 안목으로 조언을 해 세종으로부터 아들 못지 않는 신임을 받았다.

 

정의공주의 부군 안맹담(1415∼1462)의 신도비로 1466년(세조 12)에 세워졌다. 비문은 정인지가 지었으며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아들 안빈세가 썼다.1982년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사천 목씨 재실, 연산군의 재실보다 몇 배가 크다. 전에 갔을 때는 그 댁의 종부께서 나와 계서 이야기도 나누고 왔는데 이번에 보이지 않았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목서흠의 묘와 사천 목씨 1대에서 7대까지 묘역이 있다. 목서흠은 7대 목진공의 6대 손

사천목씨 재실(모현재)

목서흠 신도비는 목서흠의 사망 이후 후손들이 목서흠을 추모하는 뜻으로 행적을 정리하여 1671년(현종 12)에 세웠다

목서흠과 안동 권씨의 봉분이 하나로 되어 있지만 땅 밑의 실은 2개로 나누어진 구조 동분이실로 되어 있다. 목서흠은 인조 때 한성부 좌우윤을 지냈으며 백성을 위해 교화를 베풀고 청렴했으며 1675년(숙종 1)에는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방학동길로 들어서면 전주 이씨라고 하던가? 그 집안 묘들이 여러 기 있는데 묘 관리하는 사람이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래 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