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법정스님의 도량 길상사

智美 아줌마 2011. 4. 17. 23:21

법정스님의 도량 길상사

 

예전에 가끔 갔던 대원각이 길상사로 바뀔 때 사람들의 관심이 참 컸었다. 제3공화국 시절 3대 요정으로 꼽히던 삼청동의 삼청각, 성북동의 대원각, 종로 익선동의 오진암 중 한 곳으로 고급 한정식으로 영업할 때 식사하러 몇번 갔었는데 자연 속에서 풍경이 있는 식당이여서 아이들도 뛰어 놀 수 있어 참 좋아들 했었다.

그러고 보니 삼청각에서도 여러번 가서 식사를 했는데 오진암은 한번도 못가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네. 아쉽다. 그래서 이제 법정스님도 열반에 드셔서 안 계시지만 길상사를 가보기로 한다.

4호선 한성대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가면 길상사 셔틀버스가 있어 탈 수가 있고 마을버스 타고 홍익고 앞에서 하차해 차 가는 방향으로 보면 노란 간판의 부동산이 있는데 그 골목으로 500미터 정도 가면 길상사가 있다. 가는 길목에 성북동 성당이 있고 . . .

성북동 성당

작년 5월에 오픈한 카페 안도(ando)가 2층에, 퍼니츄어(Furniture) 갤러리가 3층에 있다.

성북동 어느 집 담장 넘어로 가지를 뻗어 핀 영춘화

영춘화는 쌍떡잎식물 합판화군 용담목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관목으로 중국이 원산지이며 가지가 땅에 묻히면 뿌리가 내린다.

개나리가 참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성북동 동네를 둘러보며 걷다보니 어느새 길상사가 보인다.

지장전과 도서관, 선열당으로 함께 쓰는 건물이 보인다.

길상사 일주문

길상사 전각 배치도

극락전 올라가는 길

설법전

카톨릭신자인 최종태 조각가가 봉안한 석상으로 종교간 화해의 염원으로 담긴 관음상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이의 예술혼이 시절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관음상 받침돌 옆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무스카리와 꽃잔디

앵두꽃이냐?

 

송풍각 : 스님 개인 처소

 

범종루

어고와 법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기둥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어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도 하고 다른 절에서는 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극락전 앞의 석등

 

 

길상헌 : 어른 스님 처소(고 김영한님이 마지막으로 거쳐하던 곳)

극락전 왼쪽 길상선원 올라가는 길

길상선원은 길상사나 다른 도량에서 3회 이상 수련을 마친 사람에게 방부를 들일 수 있는 곳으로 재가자들을 위한 시민선원이다.

 

↓아래는 상이 놓여 있는데 아마도 밖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지 아닐까싶다.

 

침묵의 방

 

 

 

 

오른쪽 위에 청향당

 

행지실 : 어른 스님 처소, 접견실

종지나물 : 쌍떡잎식물 측막태좌목 제비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8·15 직후 미국에서 건너온 귀화식물이다. 미국제비꽃이라고도 부른다

수선화는 설중화, 수선이라고도 한다. 지중해 연안 원산이다. 수선화의 생즙을 갈아 부스럼을 치료하고, 꽃은 향유를 만들어 풍을 제거한다. 비늘줄기는 거담·백일해 등에 약용한다. 수선이란 중국명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천선, 땅에 있는 것을 지선, 그리고 물에 있는 것을 수선이라고 하였다.

수선화의 속명인 나르키수스(Narciss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나르키소스)라는 청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나르시스는 연못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물속에 빠져 죽었는데, 그곳에서 수선화가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꽃말은 나르시스라는 미소년의 전설에서 '자기주의' 또는 '자기애'를 뜻하게 되었다.

능인당, 죽림당, 반야당, 육화당, 보시실, 지계실, 인욕실, 정진실, 지혜실, 정인당 등 스님들의 처소 건물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3층에 지장전, 2층 도서관, 1층에 선열당

선열당 앞의 연못

영산홍

민들레와 하늘매발톱

지장전 옆길

 

 

 

정랑(화장실)

 

 

 

법정스님과 대원각 주인 김영화님은?

대원각 소유자인 김영한님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친견한 뒤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주실 것을 청하였지만 거듭 사양을 하시다가 1995년 그 뜻이 받아들여져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었다.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그날 김영한님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고 7천여평 절터와 전각 모두를 보시하시면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바람이라며 수천의 대중들 앞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불교를 모릅니다만 . . .
저기 보이는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였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1999년 11월 14일 김영한님은 길상헌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다비 후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첫눈이 길상사에 내리는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러면 김영한님은 누구일까?
고 김영한님은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린 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영한님은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인 백석과 만나게 되었는데 백석의 집안의 반대로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서로의 마음을 간직한 채 백석은 김영한님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한지에 써서 편지와 함께 남기고 홀로 떠나간다

김영한님은 백석과의 못다한 사랑을 간직한 채 성북동 지금의 길상사 터에서 첨암정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다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으로 운영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정치인과 많은 단골의 구애를 뿌리치고 백석 한 사람만 사랑한 여인으로 백석을 기리며 시인을 위하여 백석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백석에게서 받은 자야는 중국 변방의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이야기인 자야오가(子夜五歌)라는 이백의 시에서 따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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