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떠나는 여행

빼앗은 터에 지은 경희궁

智美 아줌마 2011. 4. 4. 21:49

빼앗은 터에 지은 경희궁

광화문 르메이에르 빌딩 하꼬야에서 점심 식사 모임이 있어 나갔다가 경희궁에 가보았다. 그 앞을 지나간 적은 여러번 있었지만 관람은 처음이였는데 왕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경희궁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모임을 마친 후 가는 것이라 시간 절약을 위해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님께 경희궁 가자니까 얼레? 모르신단다. 그래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가자했더니 박물관은 아신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신문로 큰 도로변에 있고 경희궁은 바로 뒤에 있다.

 

경희궁지 내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2002년 5월에 개관했다.

경희궁의 금천교

 

 

 

박물관 앞 화분에 있는 꽃들인데 이름을 알아야지 원 . . .

 

 

시네나리아

현관 입구에 해태 두마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서있는데 참 표정이 익살맞다.

방문객들이 기념 촬영할 수 있게 마련해 놓았는데 외국인들과 아이들이 좋아한다.

기증된 유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하는 것 같아서 맛배기로 몇 컷!!

여아들이 모자로 쓰던 굴레와 남아가 쓰던 복건

촬영을 못하게 하는 것 같아 살짝 몇 컷만 . . .

박물관 뒤에 있는 경희궁으로 간다

경희궁에서 금천교로 흐르는 금천, 왕궁이나 왕릉에는 금천교를 꼭 만들었는데 이는 안과 밖의 경계를 두기 위함과 신성한 곳이므로 마음을 경건하게 하라는 뜻, 또 금천은 풍수설에 의한 명당수 역활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오층석탑

우물같은데 아쉽게 안내문이 없다.

이 언덕을 오르면 경희궁

연둣빛 새순이 바쁜 발길을 멈추게 하고 . . .

노오란 개나리가 봄을 알린다

사진 찍을 때는 꽃이름을 알았는데 그새 꽃이름을 잊어버렸으니 도대체 내머리가 왜 이렇게 멍때리는지 세월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 .

아, 냉이꽃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 인경궁·자수궁과 함께 건축을 시작하여 1623년 (광해군 15)에 완공하였다.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 자리는 원래 인조(仁祖)의 생부인 정원군(元宗으로 추존)의 잠저였는데, 여기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숭정전·융복전·집경당·흥정당·회상전·흥화문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1829년(순조 29)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831년에 중건하였다. 그후 국권피탈 때에는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황학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되고,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로 이건하였으며, 흥화문은 1832년에 박문사의 산문으로 이축되었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은 1922년 사직단 뒤 등과정 터로 이건하였다.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요상하게 생긴 고목인데 아래 구멍으로 어린 아이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크다.

 

 참으로 대단한 생명력이다. 석축 틈에서 민들레가 자라서 꽃을 피었다.

숭정문 

 

하월대의 양쪽 기단 석상은 1985년 발굴된 것으로 아크릴판으로 훼손을 막고 보호하고 있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이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에 해당하는 건물로서 왕이 대소 신료들의 조하를 받던 곳이다. 숭정전은 조선 광해군 9년(1617)부터 12년(1620) 사이에 지어진 궁궐로, 경희궁과 연관된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1829년(순조 29) 대화재가 일어나 회상전, 융복전 등은 소실되었으나 숭정전은 피해를 면하였다.

숭정전은 1926년 일제에 의하여 조계사로 이전되었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으나 건물이 낡아서 이전이 어렵게 되었다. 그후 1980년에 경희궁터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1985년부터 다섯 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숭정전 2중 기단을 근거로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경희궁의 본래 숭정전 자리에 복원하게 되었다 

 

숭정전 내부, 용상(어좌)과 일월오악도 

숭정전 천장 

숭정전에서 본 숭정문과 품계석 

 

행랑 

 

드므에 담긴 물에는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자정문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으로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1617~1620년(광해군 9~12년) 사이에 건립되었으나 일제가 훼손을 하였는데 서울시에서는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자리에 <서궐도안>에 현재의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자정전 천장

 자정전 서쪽의 행랑은 발굴 당시 행랑의 바닥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돌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자장전 왼쪽 행랑 문으로 나가면 서암이라는 바위샘이 있다.(태령전 뒤)

 

 서암은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에 샘이 있으며, 본래는 왕암으로 불리웠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숙종 때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으로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사방석에 "서암"이라고 새겨 두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암에서 바라 본 경희궁 전각들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초상화)을 모셔두던 건물로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았으나 영조의 어진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년)에 이곳을 다시 수리하여 어진을 모셨다. 선원전의 경우 선대 국왕들의 어진을 모셨던 것에 비해 태령전은 영조 재위 당시에 현왕인 영조 자신의 어진을 모셨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으며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

 영조의 어진

 태령문

 태령전 담장

 

 서울 시립 미술관

 흥화문은 조선시대 광해군 10년(1618년)에 세운 경덕궁(현재 경희궁)의 정문이다.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장충동 박문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1] 그 후 박문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의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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