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야기

회상 (回想)

智美 아줌마 2007. 3. 21. 00:08

오늘 감동글을 올리면서 울 엄니와 형제들이 생각이 나서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내가 먼저 전화해야지했는데 또 엄마가 먼저 하셨다.
목소리가 많이 힘드신 듯하였다.

살면서 난 단 한번도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날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머지 않아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나신다.
아니 서서히 떠나시고 계시다.

가시지 않겠다고 해도 갈 수밖에 없고,
보내드리지 않으려해도 어쩔 수 없이 보내드려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아프다. 엄마가 너무 가여워 눈물이 난다.
너무도 한 많은 생을 살다가시는 것 같기에 더욱 더 마음이 아프다.

젊디 젊은 39살 남편을 잃고 어린 4남매를 꿋꿋하게 키워 오셨다.
엄마 인생의 울타리요. 버팀목이셨던 남편을 잃고
그 충격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셨고 정신을 놔버려서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고 얼마 사시지도 못 한다고 하였다.

주변에서는 아버지에 이어 엄마까지 줄초상 나겠다며
4남매가 졸지에 고아되겠다고 여간 걱정들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공직에 계셨는데 회사에서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늘 성실하시고 타의 모범이 되시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신 분이셨다.
아버지의 죽음에 회사 사람들을 비롯 사택에 함께 살 던 분들,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도 안타까워 하고 슬퍼하였다.
지금도 회사 한 켠에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이런 남편을 잃었으니
그 충격은 우리들이 상상하기 힘든 것이였으리라.
아버지가 물려주신 부동산들은 있었지만 병든 엄마와 어린 4남매가
생활하고 공부 가르킬 현찰은 없었다.

우등생이였던 오빠가 안타깝게도 학업을 포기하고 엄마 병원비며, 약값, 동생인
우리 3남매 학비까지 벌어야 했고 우리들의 뒷바라지에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였나, 정신을 놓은 것을 당신 스스로 가다듬고
강하게 일어나셨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공사판이며, 취로 사업장이며, 남의 집 파출부며 . . .
일을 주겠다는 곳이 있으면 다 가서 하셨다.
당신 힘에 겨운 일을 하시다보니 일 다녀 온신 후에는 밤새 끙끙 앓으시면서도
새벽이면 일어나 우리들 밥과 도시락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또 일을 나가시곤 하셨다.

우리 외가 (엄마 친정)도 친가(아버지 본가)도 그 고향에서 알아주는 대지주집이였다.
금지옥엽으로 자라 부잣집으로 시집 온 엄마,
그런 엄마가 우리들 때문에 갖은 고생을 다하신 것이다.

엄마와 오빠에게는 우리 3남매가 꿈이고 재산이며, 그리고 짐이기도 하였으리라.
늘 엄마와 오빠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우리들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늘 최소한 고등학교 이상은 졸업을 해야 된다며
우리들을 힘겹게 공부를 가르키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지는 못하였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의 학력을 갖게 되었고 그 학력은 살면서
우리들 인생에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지 모른다.
남들 앞에서 늘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것도
울 엄마와 오빠의 희생어린 뒷바라지 덕분이였다.

3남매 공부 가르키느라 집은 팔게 되었지만 땅은 아직도 소중하게 지키고 있다.
그래도 엄마와 오빠는 우리집의 재산은 땅보다 집보다 우리 3남매라고
늘 그렇게 말씀하시며 우리들에게 사랑과 용기를 주셨다.

동생인 우리 3남매는 성장하고 결혼하고 많은 세월을 살았어도
그때 우리 4남매와 엄마, 아빠와 살았을 때와 아빠가 가신 후 엄마랑 우리 4남매가
살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을 하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엄마와 오빠에겐 너무 힘겨운 날들이였겠지만 . . .

그런데 그렇게 우리에게 행복을 준 엄마가 병이 들어 가시게 된 것이다.
애닲고, 또 애닲으지만 우리들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가슴 아프게 한다.
당신 몸이 아파 고통스러워 하시면서도 오빠를 걱정하시는 우리 엄마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니 오래비가 옆에서 보고있어야하는 마음이 오죽 힘들겠냐" 하신다.
당신이 죽음 앞에서 고통스러워 하시면서도 자식의 아픔을 더 걱정하시니
엄마의 사랑은 정말 끝이 없는가보다.

2007년 3월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