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야기

의(義 ) 상한 우리 4남매

智美 아줌마 2007. 3. 10. 00:13

추석 연휴가 지나고 광주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병원에 입원 시킨다고 . . .
동생이 다니는 교회 장로님이 병원장으로 계신 안양 병원에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고 그리 모셔 오라고 하셨단다.

처음 안산 고대병원에서 입원과 정밀 검사를 하자고 하였지만
엄마가 거절하셨단다.
"살만큼 살았고 죽을 병이 검사한다고, 수술한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서로 힘들게 할 필요 없이 주어진 명대로 사는거다" 하시며
그냥 집으로 돌아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 노인정으로 평소대로 생활을 해오셨다.
노인정 친구분들에게 조차 당신의 몸이 병든 것을 말하지 않을 정도
엄마는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분이시다.
살이 많이 빠졌다고들 한다고 그 말조차 듣기 싫다고 하신다.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이나 신세지는 것을 절대 하면 안된다는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을 하셔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처음 입원 생활에서 많이 마음 상해 하셨다.

엄마는 확실한 병명도 모르는 채 왜 옆구리와 허리가 이렇게 아프시냐고 하신다.
사실대로 말해드리면 더 힘드실까봐 경과를 지켜보면서 말씀 드리자고
의사 선생님과 상의를 하였다.

난 마침 추석 연휴까지 일을 하고 쉬고 있는 중이여서
낮에는 내가 엄마곁에 있기로하고 저녁에는 오빠와 동생들이 알아서 하기로 했다.
엄마는 왜 내가 이런 병이 걸렸는가 가끔은 한탄스러울 때가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병원에 함께 있으면서 엄마가 죽음에 대해
많이 놀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죽음에 대해 자주 말을 건냈다.
"엄마, 사람은 누구나 늙어서 병들어 죽게 되는거잖아.
심장마비나 사고로 죽지 않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다 가는거잖아.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힘들겠지만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돼.
그렇지 않으면 자꾸 비관이되고 더 힘들어지게 되는거야. 그렇지,엄마?
그냥 나도 별 수 없구나. 남 살다 가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다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해, 아파서 자식들 힘들게 한다는 생각하지말고
우리가 어렸을 때는 엄마가 우리들을 보살 폈듯이
이제는 우리들이 엄마를 보살피는거다. 라고 편하게 생각해.

그리고 아버지가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혼자 계셔서
이제는 우리들 다 키워 놨으니까 같이 있자고 엄마 오라고 부르시나보네."하니
엄마는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지. 죽는 것은 안두렵다. 살만큼 살았으니까
통증때문에 너희들 힘들게 할까봐 그렇지.
그리고 너희들 아버지 너무 오래 혼자 있었으니까 아버지한테 가봐야지." 하신다.

보름 동안의 병원 생활에 지치셨는지 자꾸 집에 가자고 하셨다.
"성성하니 내 발로 들어와서 더 있다가는 걸어서 못 나갈 것 같다. 퇴원하자."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엄마의 병이 요즘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설명하시고 점점 더 아파지고 힘들거라고 엄마한테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알고 퇴원을 하기로 하셨다.
그런데 퇴원 전 날 큰올케가 십이지괘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생겼다.
오빠는 올케 언니를 병원에 입원 시켜 놓고 엄마한테 와서도
올케 언니 입원한 것을 엄마가 아실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퇴원 당일 난 "엄마,올케가 체기가 있어 몸이 안좋다고 하니까 하루이틀
병원에 더 있자. 언니 몸이 안좋은데 아픈 엄마까지 집에 가면 서로 힘들잖아." 했다.
엄마는 집에 간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병원에 계시려니까 싫었지만
내말에 따르기로 하셨다.

그런데 동생이 이 얘기를 듣고는 동생 집으로 모시고 가겠단다.
동생 두내외가 다 교직에 있기 때문에 엄마는 동생집으로도 안가시겠다고 . . .
그러나 효성 지극한 동생 엄마를 광주로 모셔 갔다.
그곳에서 한 보름 정도 작은 아들, 며느리의 효를 받으시다 안산 오빠 집으로 가셨다.

집에 가셔서 큰올케가 병원에 있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통곡을 하셨단다.
늙은 내가 앞서야지 어찌 자식을 먼저 앞세우냐고
큰 탈없이 이틀동안 수혈받고 퇴원했으니 다행이라시며 놀란 가슴 쓸어 내리셨다 한다.
올케 언니의 입원으로 좋은 일이 생겼다.

그동안 우리 언니, 언니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언니와 나 그리고 오빠, IMF 때 금전 문제가 걸려 서로 의절(?)하고 있었다.
난 언니와 화해하고 왕래를 하고 있었지만 언니와 오빠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병원에서 엄마를 보살피고 있을 때도 언니는 오지 않았다.

퇴원 무렵 병원에서 곧장 언니 집으로 갔다.
가게는 아는 동생에게 맡기고 술을 먹어서 취해 있었다.
언니는 술이 약해서 소주 서너 잔에도 만취 상태가 된다.
병든 엄마, 병수발은 커녕 병문안도 안가는 딸의 심정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그래도 난 언니를 보자마다 한바탕 퍼붓고는 언니 집으로 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형부는 잠 자려고 누워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보고 깜짝 놀라 하였다.
난 형부한테도 막 퍼부어댔다.

형부는 엄마가 병원에 계신 것도 모르고
언니가 아예 친정쪽에 일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형부조차도 친정쪽에 발을 들여 놓으면 그때는 끝이다.라고 언포를 놓았고,
오빠 또한 다음에 보자고 다음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우리 4남매 세상에 둘도 없는 의좋은 4남매였고
형부, 처제, 처남 사이도 각별하게 좋았다.
언니와 오빠가 함께 한 사업 실패로 냉랭한 남매가 된 것이다.
그런데 오빠와 언니 두사람이 알고보니 금전 문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 였던 것이다.

내 잘못도 크다는 생각을 했다. 왜 진작에 오빠하고 긴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왜 오빠한테 물어 보지 않았던가. 후회가 되었다.
퇴원 전 날 오빠가 엄마가 계신 병원에서 올케 언니 병원으로 가면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칫 망설이다가 내게 물었다.

"미희는 엄마 보러 안온다니?
나는 안보더라도 엄마한테는 그러지 마라고 해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나한테 물어 보고 싶었겠는가.
나 또한 오빠한테 묻고 싶었지만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말 나온김에 오빠를 따라 로비로 내려 갔다.

내가 먼저 오빠한테 말을 건냈다.
"오빠는 안봐도 되고 엄마만 보라고, 왜 오빠는 안봐도 되는데?
오빠,아무리 아랫 사람이 잘못을 했어도 윗 사람이 품어줘야 되잖아.
오빠가 언니를 품어줘, 오빠가 먼저 손 내밀면 안될까?"
돈이 동생보다 더 소중해? 그렇지 않잖아." 했다.

오빠는 " 돈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야. 내 자존심 문제야.
솔직히 처음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을 때는 그 돈이 어떤 돈인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건 잠시였지 동생보다 돈이 더 중요하지는 않았다." 하신다.

나는 " 그런데 돈이 문제가 아니면 뭐가 우리 남매를 이렇게 한거야?" 했다.
오빠는 " 내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동생이라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너희들보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많이 가지지도 못해서 너희들한테
무시 당하는 것 같아서 그런다." 하시는 것이였다.

"오빠, 어떻게 우리가 오빠를 못배웠다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
오빠의 희생적인 뒷바라지가 없었으면 어떻게 지금의 우리가 있겠어?
우리 3남매는 절대로,아버지한테 맹세코 오빠를 그리 생각한 적이 없었어.
그건 오빠의 오해야. 아니 자격지심일거야." 했다.

오빠는 평생을 국영 기업체에서 근무를 하였다.
명퇴니, 조퇴니, 한창 사회적으로 시끄러울 때 조퇴를 한 것이다.
오빠는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모르고 살아 온 사람이다.
성품이 아버지를 닮아서 곧고 성실하고 책을 많이 보셔서 해박하시다.

퇴직을 하고 세상 밖에 나오니 세상은 순수한 오빠를 많이 힘들게 하였다.
그래서 언니가 잘 알고 있는 분야에 같이 투자를 하게 되었고
불운하게도 종업원의 인사 사고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사업장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오빠가 언니한테 마음이 많이 상했었나보다.

언니는 자기가 잘 알고있는 분야다보니 자주 오빠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말을 했고 듣는 오빠의 입장에서는
내가 많이 못 배워서 그러는가보다라고 생각한 것이였다.
오빠 입장에서 그리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난 오빠가 오해한 것이라고 말을 했다.

"만약에 언니가 조금이라도 오빠한테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내가 언니를 용서 못해, 우리들의 오늘이 있는 것이 오빠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인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어?
오빠가 오해하고 있는거야. 오빠 자격지심에 그리 생각한거야." 했다.

오빠는 " 그래, 내 자격지심에 그리 생각한 부분도 있을거야.
그래서 니 형부가 만나자고 했을 때도 다음에 보자고 거절했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게되면 그때 보자고 했다." 라고 하셨다.
난 " 사람의 앞 날을 알 수 없는거야. 엄마가 저리 일찍 가실거라고 생각이나 했어?

우리들도 모르는거야. 이런 마음으로 오빠가 먼저 갈지 언니가 먼저 갈지 . . .
형제 잃고 난 다음에 더 좋은 위치에 살게 되면 무슨 소용이야.
그건 다 부질없는거 아니겠어 오빠?
그리고 죽을 죄를 졌어도 내 부모 내 형제가 감싸줘야 하잖아. 했다.
오빠도 조금은 마음의 오해를 푸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언니 집으로 달려 갔던 것이였고 형부라도 혼자 엄마한테 오셨다.
엄마는 형부의 손을 붙잡고 서럽게 우셨다.
"내 자네 못보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자나 깨나 걱정이였네.
난 얘들 키우면서 우리 애들은 절대 의 상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다들 그럴거라고 했네. 이렇게 의 상해 사는 것은 상상도 못했네."하셨다.
형부가 다녀가시고 엄마는 동생집으로 퇴원해서 가셨다.

그리고 난 언니한테 올케 언니의 입원을 전했다.
언니는 올케 언니의 입원에 더 충격을 받고 울었다.
"엄마야 나이드신 분이지만 올케 언니가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될뻔 했니?" 하였다.
"언니 형제간에 자존심이 뭐그리 대단하니? 부모, 형제 목숨보다 중하니?
아니잖아, 자존심 그거 부모, 형제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야." 했다.

그래서 올케 언니의 입원으로 우리 4남매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살기로 하였고
언니도 오빠와 올케 언니한테 잘못을 구하고 서로 마음을 풀어 가기로 했다.
이런 것이 아마 전화위복이 아닐까.

엄마의 죽음 앞에서도 꿈적하지 않는 우리들을 돌아가시 전에 화해 시키려
올케 언니를 잠시 아프게 했나보다.
"아버지, 머지 않아 엄마 가실거에요.
그때까지 많이 안아프게 엄마 보살펴 주세요.

2007년 3월10일

'내가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상 (回想)   (0) 2007.03.21
나의 컴맹 탈출기   (0) 2007.03.15
부모님은 늘 자식들을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0) 2007.02.28
살다보니  (0) 2006.12.22
서로에게 진실된 친구가 되자.   (0) 2006.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