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사 입구 풍경
불갑사 가는 길목 왼쪽에 호랑이 한마리가 표호하고 있다. 불갑산에 서식하던 호랑이를 1908년 2월 한 농부에 의해 잡힌 것을 일본인 하라구찌가 당시 논50마지기 값에 해당하는 200원에 사들여 동경 시마쯔 제작소에서 표본박제하여 목포 유달 초등학교에 기증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호랑이굴
불갑사는 호남(湖南)의 명찰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가 남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의 시원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쇠폐했었으리라 짐작된다. 불갑사는 정유재란의 병화로 절이 전소되어 버리고 오직 전일암만이 남아 황폐해졌고 선조 31년 11개소가 복원되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의 극심한 훼불기를 당하여 불갑사도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1845년~1868년경까지 약 20여년 이상 승려들이 수행을 못하고 절이 비어있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건물들이 많이 무너져 내려서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설두대사(1824~1889년)가 1870년(고종7년)에 각진국사의 주석도량이 폐허로 변해가는 것을 슬퍼하여 단신으로 백양사에서 불갑사로 내려와 절을 되찾고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전각들을 보수하였으며, 고창(무장) 연기사터에 있던 사천왕상을 옮겨 모셔와 불갑사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 부도가 모두 도굴당하고 6.25동란시 빨치산 토벌대에 의하여 산너머 용천사를 비롯하여 산내의 암자들이 모두 불태워져 버렸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개보수가 이루어지면서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불갑사. 사찰의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갖은 아픔을 당했던 이 지역 역사를 대변하는 듯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이질풀
불갑사 부도군
금강문이 보이고
금강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이 있다
천왕문
불갑사 사천왕상은 고창 연기사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서, 연기사가 폐사된 후 1870년(고종7년)설두대사에 의해 불갑사로 옮겨졌으며 조선중기에 조성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불갑사 성보 박물관
만세루는 1644년에 중건되었으며 정면5칸, 측면4칸의 중층형 문루건물로서, 법회 장소 및 스님들의 여름철 강학(講學)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와 익공식의 혼합된 양식을 보여주며 가구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건한 미를 간직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깨꽃이라고도하는 꽃향유
대웅전은 보물 830호로 백제 침류왕원년(384년)인도승 마라난타존자께서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법성포를 거쳐 이곳에 최초로 창건한 사찰로 정유재란시 소실된 후 다시 중건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매우 화려한 양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살은 삼분합 소슬 빗살문으로 연꽃, 국화꽃, 보리수 나무 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하여 우리 조상들의 예술성이 표현된 건축물이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 목조삼신불좌상
대웅전 지붕에 다른 절에서 못본 것이 있다. 줌으로 당겨 보니 도깨비 얼굴같다
도깨비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절병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광당
칠성각과 팔상전
칠성각 내부
능소화
오래된 법고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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