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을 따라 걷다보니 "도솔암 가는 길" 이정표가 보인다. 많이 들어 본 도솔암
나무 뿌리가 들어나 안타깝지만 보기에는 멋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고 . . .
낙상홍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가다보면 이런 쉼터와 벤치가 더러 보인다.
꽃무릇의 봉우리, 꽃잎 날개를 펼치면 새색시 족두리같이 화사하다
카메라 베터리 충전을 했는데 문제가 있었는지 충전이 안되어서 똑딱이로 찍어서 좀 아쉽다.
개울을 건널 수 있게 곳곳에 다리가 놓여져 있어 이쪽 저쪽 왔다갔다하며 둘러 볼 수 있다.
진흥굴은 숭불왕으로 유명한 신라 24대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당시 백제땅인 이 곳에 의운국사를 시켜 선운사를 창건케하고 왕위를 퇴위한 후 선운사를 찾아 수도했다는 암굴이다.
또한 진흥왕은 그의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이 굴 윗산에 중애암을 그리고 만월대 밑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이 굴은 길이가 10m, 높이가 4m의 동굴이다.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이 나무는 반송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수령은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되고 높이는 23m, 가슴 둘레는 3.07m이며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이 나무의 명칭은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 불려지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지명이 장사현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숲길을 걸어가니까
도솔암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도솔암 찻집
오 자네 왔는가, 이 무정한 사람아
청풍에 날려 왔나, 현학을 타고 왔나
자넨 먹이나 갈게, 나는 차나 끓임세.
김시라님의 글 [본명 김천동. 1945.12.1~2001.2.8] - 연극 연출가이자 극작가 겸 시인이다
도솔암은 정확한 창건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 · 선운사 · 도솔사등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진흥왕은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의 왕이었는데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이 곳에 신라왕이 머물렀다는 설화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창건사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은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창건된 사찰임에는 틀립이 없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산 중사(兜率山 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에는 절이름을 중사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 내원궁으로서 1511년 지은스님이 중창한 뒤 1694.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에 해인(海印)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년(숙종 29)에 최태신이 창건하앴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에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락보전
조선 후기의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가운데 북도솔암이 지금의 극락보전이 있는 자리로 1703년(숙종 29년)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극락보전 내부
북도솔암에서 올라가면 하도솔암의 미륵불과 나한전이 있다.
마애불은 보물 제1200호로 등록되어 있고 월출산에 있는 마애불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층단을 이루어 비교적 높게 되어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으며,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배꼽 속에 들어있던 신비한 비결이 햇빛을 보는 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미륵불 오른쪽에 폭은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고 높이는 2,3m 정도 되는 굴이 있는데 들어가보다가 너무 음침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되돌아 나왔다.
나한전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였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나한전 내부
나한전 앞 석탑
도솔천 내원궁
이제 도솔천 내원궁을 가려면 108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생각만큼 녹록치 않는 계단 길이다. 올라갈 수록 가파른 계단 . . . 헥헥
도솔천 내원궁은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6년(1511)에 지은스님이 중창하고, 숙종 20년(1694)에 3창, 순조 17년(1817)에 4창하였다.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기단 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아 원형초석만 두었는데, 기단이 없어 건물이 낮아지므로 하인방의 높이만큼 되는 장초석을 사용하였다
고려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보물 280호로 등록되어 있고 고려 후기의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나 문수사금동불좌상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솔천 내원궁의 뒤편에 자리한 산신각에는 특별한 산신이 모셔져 있다. 산신각의 주인공은 도솔암을 비롯한 선운사, 참당암 등 도솔산 내의 사암을 창건한 검단선사와 의운국사이기 때문이다.
이 두 분의 스님은 도솔산에 살고 있던 도적들을 교화하고 가난한 중생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어 삶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처럼 지역민에게 한없이 자애로왔던 두 스님을 열반후에도 도솔산 산신으로 남아 중생들의 염원과 기도소리를 듣고 소원을 성취해 주시는 성현으로 남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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