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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 괘릉, 김유신 장군 묘에 담긴 설화 이야기

智美 아줌마 2017. 2. 13. 04:37

경주에는 잘 알려진 왕릉 외에도 수많은 능이 존재한다. 각자 옛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왕릉과 위대한 인물들의 묘는 장소를 답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덤 안에 묻힌 주인공에 대해 공부하고 그들이 살아온 길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오늘 살펴볼 주인공들은 오릉에 묻힌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괘릉에 묻혀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원성왕, 그리고 김유신장군묘에 묻혀있는 김유신 장군이다.

 

박혁거세와 알영왕비가 모셔져 있는 오릉

 

오릉의 전경

오릉의 전경

 

오릉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 왕비인 알영, 제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이다. 전형적인 원형 봉토분의 왕릉으로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마총', '황남대총'과 같은 무덤들은 발굴조사가 끝난 무덤들이고, 발굴조사가 끝난 무덤은 '총'이라고 부른다. 오릉의 무덤들 중 제2호 분은 봉우리가 두 개로 쌍릉의 형태를 띄우고 있어 실제 무덤 안에 묻힌 사람이 6인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오릉의 첫 번째 주인공인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신라를 다스렸던 인물이다. 그 후 하늘로 승천했는데 7일 후에 왕의 유체가 담엄사라는 사찰의 북쪽에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었고,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왕비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백성들은 박혁거세와 알영의 시신을 한데 모아 장사를 지내려 했으나, 갑자기 큰 뱀이 나타나 이를 방해해 하는 수 없이 흩어진 상태 그대로 장사를 지내니 이를 5릉이라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뱀이 방해를 하였다 하여 사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출처: 삼국유사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알영왕비가 태어난 알영정

알영왕비가 태어난 알영정

 

오릉의 능 동쪽에는 박혁거세의 제향을 받드는 숭덕전이 있다. 그리고 숭덕전 옆 관리사옥 뒤편으로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이 태어난 알영정이 있다. 신라인들은 예로부터 우물을 신성한 공간이라 생각했다. 알영정은 알영왕비가 태어난 우물이고, 박혁거세 역시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났다. 알영정과 나정은 지척으로 붙어있으며 이 우물 주변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져 보호되어왔다.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은 용이 낳은 아이로 알영정 우물가에서 태어났다. 근처에 살던 노파가 가보니 용은 사라지고 여자아이만 남아있는데 아름다운 용모에 닭의 부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데려와 개울가에서 입을 씻어주니 닭 부리는 없어지고 아름다운 용모가 드러났다. 알영은 아름답고 자태가 고왔으며 총기가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소문을 들은 박혁거세가 알영을 데려와 비로 삼았는데 왕비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아름답고 단정한 자태를 잃지 않았으며 박혁거세를 정성을 다해 내조했다고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원성왕의 무덤 괘릉

 

괘릉의 전경

괘릉의 전경

 

괘릉은 통일신라시대 원성왕의 무덤으로 잘 알려져 있다. 커다란 원형 봉토분만 있던 무덤양식에서 벗어나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석물과 문. 무인상을 양쪽으로 세우고 무덤 주위에 둘레돌을 둘렀으며 둘레돌 주변으로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왕릉으로서 위엄을 더했다. 괘릉이라는 뜻은 연못 위에 무덤을 살짝 걸었다는 의미로 원래 괘릉이 있던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을 흙으로 메우지 않고 왕릉을 그 위에 걸치듯이 만들었다고 해서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괘릉은 통일신라시대 왕권이 안정화 되며 왕릉으로서 위엄을 갖추기 시작하는 과도기 단계의 무덤을 대표한다.

 

서역인을 닮은 괘릉의 무인석 신기하게 새긴 돌사자상

[왼쪽/오른쪽]서역인을 닮은 괘릉의 무인석 / 신기하게 새긴 돌사자상

 

괘릉이 다른 무덤과 또 다른 점은 서역인을 무인석의 주인공으로 세웠다는 점이다. 작고 날카로운 눈매와 두루뭉술한 콧등, 부처님 귀처럼 축 처진 귓불, 신라의 귀족을 연상케 하는 신라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인석과는 달리 무인석은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역시 곱슬 거리는 구레나룻이 이국적인 수염, 왕방울만한 두 눈과 주먹만 한 코, 우락부락하고 두툼한 입술, 그리스-로마 신화를 연상시키는 축 늘어지고 주름 잡힌 의상 및 낯선 철퇴를 연상시키는 무기 등은 신라에서는 보기 힘든 외국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무덤을 지키고 있는 동물 역시 우리나라에는 없는 동물이다. 모습은 고양이를 닮았으나 사자의 갈기가 있는 동물이 영락없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돌사자와 무인석의 모습을 통해 신라 원성왕대에 활발하게 페르시아까지 교역을 넓혀갔던 통일신라의 저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 원성왕대에는 실제 페르시아와 교역했던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증거가 유리잔이다. 신라 귀족들은 유리잔을 즐겨 썼는데 신라 자체적으로 유리 공방이 있어서 유리잔을 자체 제작하기도 했지만 주로 페르시아 서역지방에서 수입해 와서 사용하는 것을 즐겼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금실을 감아 보수한 유리 주전자도 발견되는데 그만큼 서역제품들이 신라귀족계층을 중심으로 널리 쓰였다는 것을 증언해주는 예라 하겠다. 신라의 왕을 서역인들이 떡하니 버티고 지키고 있는 장면은 후손인 우리들에게는 낯선 풍경이겠지만 어쩌면 서역과 교류가 활발하던 원성왕대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원성왕의 능으로 알려진 묘의 모습

원성왕의 능으로 알려진 묘의 모습

 

원성왕은 재위하는 기간 동안 독서삼품과를 만들고 김제 벽골제를 수리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은 왕으로 유명하다. 그의 왕위 등극에 따른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신라 선덕왕은 후사를 남겨놓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이찬 벼슬에 있는 김주원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원성왕은 당시 각간의 벼슬을 가지고 있어 김주원의 다음 후계로 왕이 될 가망성이 거의 없었다. 선덕왕이 돌아가시기 전 김경신은 꿈을 꾸게 되는데, 그는 귀인이 쓰는 모자를 벗고 흰 갓을 쓴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산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해몽을 해보니 복두를 벗은 것은 실직할 징조이며 가야금을 든 것은 칼(형구)를 쓸 징조요,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는 결론이 나왔다.

 

김경신은 몹시 근심하여 두문불출하고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아찬 벼슬직에 있던 여삼이 찾아와 새로운 해몽을 내놓는데,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12손이 대를 이을 징조이며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대궐로 들어간다는 뜻이라 하여 상서로운 꿈이라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왕이 돌아가셨고, 신하들은 이찬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때 큰 비가 내렸는데 마침 공교롭게도 김주원의 집 앞에 냇물이 불어 냇물을 건너지 못하는 사이 김경신이 먼저 궁에 들어가 즉위하니 김주원의 무리가 새로운 왕에게 절을 하고 경하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를 두고 항간에는 김경신이 난을 일으켜 왕이 된 것이라는 설과 실제 김주원과 김경신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며 평화로운 정권이양 이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둘 다 확신할 수 있는 가설은 아니다. 김경신은 바로 괘릉의 주인공 신라 제 38대왕 원성왕이다.

 

김유신장군묘 이야기

 

김유신장군묘 전경

김유신장군묘 전경

 

김유신 장군묘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왕릉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신비스럽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우거진 숲을 잠시 꿈결처럼 걷다 보면 눈앞에 거대한 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의 여느 왕릉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김유신장군묘를 보면 이곳이 과연 장군의 무덤인가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데, 아름답게 둘러진 둘레돌과 둘레돌에 조각된 정교한 십이지신상을 만날 수 있다. 한 가지 왕릉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왕릉에 새겨지는 십이지신상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반면 김유신장군묘에 새겨져 있는 십이지신상은 한복차림의 평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에 [흥무대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김유신의 부음을 슬퍼한 문무왕이 엄청난 재물을 하사하여 무덤을 단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가신 후에도 신라의 정신적인 지주로 모셔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에 재미있는 설화 하나가 전해 내려오는데, 신라 제36대 혜공왕 무렵 김유신 장군묘에 별안간 회오리바람이 일어 바람 속에 말을 탄 장군과 40여명의 병사들이 미추왕이 묻혀있는 죽현능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곡소리가 나며 장군의 소리가 천둥처럼 하늘로 울려 들려왔다고 합니다.


"신이 한평생 나라를 위해 충심으로 애를 쓰며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왕은 방탕함을 일삼고 지난 경술년에는 저의 자손이 무고한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겠다는 결심은 버리겠습니다. 이제 신은 이 나라를 떠나려 합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장군이 이 나라를 떠난다면 불쌍한 백성들은 어찌 되겠소, 부디 이 신라를 지켜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세 번 다 거절하였다. 이에 다시 회오리바람은 죽현능을 나와 김유신장군묘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혜공왕은 두려운 마음이 들어 김경신을 김유신 장군묘에 보냈다. 김경신은 왕을 대신하여 김유신 장군묘에 백배 사죄했으며, 미추왕의 설득으로 김유신장군은 다시 신라를 위해 그 자리를 지켰다고 전해지며 지금은 당당히 김씨시조왕 흥무대왕으로 봉해져 신라왕실 제사를 지낼 때 오릉보다 더 격이 높은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가야 왕족출신으로 신라에 와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최고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김유신은 백성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주고 있다.

 

 

Tip
사회교과서 5학년 2학기 2단원에서 소개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건국과 생활상을 통해 역사를 공부 할 수 있다. 더불어 경주 여행시, 신라시대 건국을 뒷받침하고 있는 설화를 알고 가면 여행이 조금 더 재미있어 질것이다.

여행정보

오릉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7-1
  • 문의 : 054-772-6903
괘릉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 17
  • 문의 : 054-779-6114
김유신장군묘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7-1
  • 문의 : 054-794-6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