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저기 좋은 자료 있나 웹서핑을 하던 중
내가 좋아하고 학창 시절 즐겨부르 던
마이클 메이브릭 곡 "거룩한 성( The Holy City )"을 듣게 되었다.
기독교 환경에서 자란 나는 지금은 종교 생활을 하지 않고 있지만
문득문득 학창 시절이 떠오를 때면 마음 한 켠이 짠해온다.
난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합창을 하였다.
대입고사를 앞둔 고등학교 때에도 합창 연습을 하였고
임원까지 맏게 되어 더 소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내 경연대회에서지만 지도상과 지휘상까지 받았는데
당시 우리 가곡 "가고파, 그 집앞, 옛동산에 올라" 등등 주옥같은 곡을 지은신
이은상선생님께서 심사를 하러 오셔서
심사평을 하시면서 작곡이나 음악공부를 하라고 권하셨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자랐기에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입상한 덕에 교내 경연대회가 있을 때면
우리 반 뿐만 아니라 다른 학년에서 중학교까지 소문이 나서 서로 자기 반을 지도
해달라고 경쟁하 듯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렇게 내가 음악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여러 선생님이 계셨지만
고3 담임이면서 합창단을 이끄시던 은사님 덕뿐이였는데
워낙 깐깐하게 지도를 해주셨기에
다른 선생님께 지도를 받을 경우 성이 차지 않았다고나할까?
아뭏든 그 은사님 덕분에 기초부터 제대로 배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왠만한 大곡의 합창곡들은 섭렵했으며
그 뿌듯함은 살면서 두고두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노래하는 것을 잊고 산지라 창법도 노래도 다 잊어버려
이젠 그때같이 노래를 부를 수가 없게 되어 안타깝게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재수하면서 사회 나와서까지 합창을 계속하면서 동아리 활동으로
중창단을 결성하여 고아원, 양로원, 집없는 노동자들이 당시 하루 100원씩 내고
묵는 노동자의 집, 양동의 창녀촌, 군부대와 수경사 영창까지
위문 공연을 다녔는데 살면서 잊혀지지 않고 파노라마같은 영상이
가끔 펼쳐져서 아직도 그때 보았던 사회의 모습들이 가슴 아프게 한다.
그렇게 몇년을 배우며 노래했던 악보들이 백과 사전같이 두꺼워져
악보 한장한장 넘기면서 흥얼거리면서
당시 선생님들께서 지도해주셨던 부분부분들을 다 체크해가며 정리해두었던
악보집을 내 재산 목록 1호라고 칭하고 귀하게 보관을 하였었다.
그런데 결혼 전 연희동에 살 때
집 아래 조그마한 개척교회가 있었는데
집에 오려면 늘 그 개척교회 앞을 지나와야만 했었다.
어느 날 그 교회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귀가 길에 들여다보았더니
또래 대학생이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침 우리 옆 집에 살고 있었고
아직 교회가 가난해서 성가대를 꾸려가기가 어려워
성가대에서 부를 악보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하기에
나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선뜻 내 재산 1호 악보집을 빌려주기로 했다.
원하는 곡들 골라 복사하고 돌아달라고 하고는 . . .
그렇게 빌려주고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우연히 집 부근에서 만나게 되어 악보집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그 학생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며칠있음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했다.
아, 이민가기 전에 받아야되는데 하고는
몇번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끝내 돌려주지 않은 채 이민을 가버렸다.
그때 그 허탈한 마음은 살면서 두고두고 안타까움이 되었고
뼈저린 후회가 되었다.
빌려주지 말 것을, 어떻게 해서라고 찾아가 받아 놓을걸 . . .
참으로 그때의 그 심정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다빠져서 후둘후둘 . . .
몇날 며칠을 정신이 멍하니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얼마나 많이 아파했던지 . . .
아직도 재산 1호 악보집을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안타까워 마음이 아프다.
그 후부터 배우면서 모은 악보는 소설책 두께 정도지만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내 재산 목록 1호는 어느 곳에서 패휴지가 되었는지
어떤 사람의 책장에서 먼지 덮어 쓴 채 꽂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바람은 낡아 헤져도 많은 사람들이 노래부르는 살아있는 악보가 되었음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하나 꿈들을 접어야했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어진다.
※ 흐르고 있는 배경 음악이 거룩한 성( The Holy City )인데
이 곡에 대해 전해내려오는 믿기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1910년, 영국(?)에서인가 술 주정꾼들이 난동을 부려 구속이 되었는데
이튿날 아침 재판정에 나와 무릎을 꿇고 이 노래를 합창하였고,
판사는 그 노래에 감동을 받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 만으로
전원 석방하였다는 믿기 힘든 얘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성가곡이기 앞서 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곡이지 않을까 싶다.
2011년 7월15일
내가 좋아하고 학창 시절 즐겨부르 던
마이클 메이브릭 곡 "거룩한 성( The Holy City )"을 듣게 되었다.
기독교 환경에서 자란 나는 지금은 종교 생활을 하지 않고 있지만
문득문득 학창 시절이 떠오를 때면 마음 한 켠이 짠해온다.
난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합창을 하였다.
대입고사를 앞둔 고등학교 때에도 합창 연습을 하였고
임원까지 맏게 되어 더 소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내 경연대회에서지만 지도상과 지휘상까지 받았는데
당시 우리 가곡 "가고파, 그 집앞, 옛동산에 올라" 등등 주옥같은 곡을 지은신
이은상선생님께서 심사를 하러 오셔서
심사평을 하시면서 작곡이나 음악공부를 하라고 권하셨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자랐기에 꿈으로만 남게 되었다.
입상한 덕에 교내 경연대회가 있을 때면
우리 반 뿐만 아니라 다른 학년에서 중학교까지 소문이 나서 서로 자기 반을 지도
해달라고 경쟁하 듯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렇게 내가 음악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여러 선생님이 계셨지만
고3 담임이면서 합창단을 이끄시던 은사님 덕뿐이였는데
워낙 깐깐하게 지도를 해주셨기에
다른 선생님께 지도를 받을 경우 성이 차지 않았다고나할까?
아뭏든 그 은사님 덕분에 기초부터 제대로 배울 수가 있었다.
그래서 왠만한 大곡의 합창곡들은 섭렵했으며
그 뿌듯함은 살면서 두고두고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노래하는 것을 잊고 산지라 창법도 노래도 다 잊어버려
이젠 그때같이 노래를 부를 수가 없게 되어 안타깝게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재수하면서 사회 나와서까지 합창을 계속하면서 동아리 활동으로
중창단을 결성하여 고아원, 양로원, 집없는 노동자들이 당시 하루 100원씩 내고
묵는 노동자의 집, 양동의 창녀촌, 군부대와 수경사 영창까지
위문 공연을 다녔는데 살면서 잊혀지지 않고 파노라마같은 영상이
가끔 펼쳐져서 아직도 그때 보았던 사회의 모습들이 가슴 아프게 한다.
그렇게 몇년을 배우며 노래했던 악보들이 백과 사전같이 두꺼워져
악보 한장한장 넘기면서 흥얼거리면서
당시 선생님들께서 지도해주셨던 부분부분들을 다 체크해가며 정리해두었던
악보집을 내 재산 목록 1호라고 칭하고 귀하게 보관을 하였었다.
그런데 결혼 전 연희동에 살 때
집 아래 조그마한 개척교회가 있었는데
집에 오려면 늘 그 개척교회 앞을 지나와야만 했었다.
어느 날 그 교회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귀가 길에 들여다보았더니
또래 대학생이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침 우리 옆 집에 살고 있었고
아직 교회가 가난해서 성가대를 꾸려가기가 어려워
성가대에서 부를 악보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하기에
나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선뜻 내 재산 1호 악보집을 빌려주기로 했다.
원하는 곡들 골라 복사하고 돌아달라고 하고는 . . .
그렇게 빌려주고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우연히 집 부근에서 만나게 되어 악보집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그 학생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며칠있음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했다.
아, 이민가기 전에 받아야되는데 하고는
몇번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끝내 돌려주지 않은 채 이민을 가버렸다.
그때 그 허탈한 마음은 살면서 두고두고 안타까움이 되었고
뼈저린 후회가 되었다.
빌려주지 말 것을, 어떻게 해서라고 찾아가 받아 놓을걸 . . .
참으로 그때의 그 심정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다빠져서 후둘후둘 . . .
몇날 며칠을 정신이 멍하니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얼마나 많이 아파했던지 . . .
아직도 재산 1호 악보집을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안타까워 마음이 아프다.
그 후부터 배우면서 모은 악보는 소설책 두께 정도지만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내 재산 목록 1호는 어느 곳에서 패휴지가 되었는지
어떤 사람의 책장에서 먼지 덮어 쓴 채 꽂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바람은 낡아 헤져도 많은 사람들이 노래부르는 살아있는 악보가 되었음 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하나 꿈들을 접어야했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어진다.
※ 흐르고 있는 배경 음악이 거룩한 성( The Holy City )인데
이 곡에 대해 전해내려오는 믿기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1910년, 영국(?)에서인가 술 주정꾼들이 난동을 부려 구속이 되었는데
이튿날 아침 재판정에 나와 무릎을 꿇고 이 노래를 합창하였고,
판사는 그 노래에 감동을 받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 만으로
전원 석방하였다는 믿기 힘든 얘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성가곡이기 앞서 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곡이지 않을까 싶다.
2011년 7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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