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야기

홧병으로 가슴앓이 하던 날

智美 아줌마 2010. 10. 13. 22:25

오래 전에 일이다.
홧병, 그 넘의 홧병으로 마음 고생하고 살은지도 어언 십수년이 되었다.
사십대 들어 서기 직전 최악이였는데
잠시 그때를 회상해 본다.

주변 사람 그 누구 한 사람도 찬성한 사람없이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7남매의 막내, 홀시어니 . . .
시엄니나 형제들 우애가 좋지 않은 집으로 시집을 가다보니
시시때때로 잦은 불화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다행히 시엄니는 며느리 넷 중에 나만 며느리인양 예뻐 하셨지만
예쁨 받기 까지 내가 어떻게 했겠는가.
예쁨 받자고 한 것은 아니지만
시엄니, 형제들, 조카들 . . .
그 많은 시집 식구들을 다 챙기며 살았다.

막내 며느리면서 늘 맏며느리 노릇을 하며
언제나 친정은 뒷전이고 날마다 돌오는 시집의 크고 작은 일들로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다.

그나마 불평 불만으로 다투는 성격이 아니라 언제나 내가 참고 내가 이해하고
내 속이 응어리가 져서 병이 되도록
자존심 상할까봐 남들 앞에 내색하지도 못하고 늘 삭히고 삭히며 살았다.

다행히 밝은 성격으로 자라서 겉은 늘 밝게 살았고
주변 사람들이 그저 맘 편하게 팔자 편하게 사는 여자로 생각하였고
그렇게 겉은 밝게 그늘없이 살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형제들이 시엄니를 제대로 모시지를 않는데서
뒷감당은 내가 다 하고 살게 된 것이다.
내 성격상 나마저 내몰라할 수 없는 성격이다보니
늘 시엄니 챙기는 것은 나였고
그래도 공치사는 켜녕 언제나 된소리만 듣게 되었다.

자신들이 안하는거 내가 하게되어 미안해야 되지만
그들은 적반하장으로 누가 하랬냐는 식이였으니까
그러다 그런 것들이 자꾸 쌓이니까 마음의 병이 되어
늘 편두통으로 눈을 뜰 수 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 속에서 살았고

진통제를 다섯, 여섯 알을 먹으며 안감힘을 쓰며 살았지만
늘 가슴이 버큰하니 아프고 가슴에서 열이 확확 뜨겁게 나고
누가 목을 조이는 것 같이 숨이 턱턱 막혔었다.

이름하여 홧병이 들게 된 것이였다.
늘 편두통으로 진통제를 먹고 불면증으로 수면제를 먹고
그러다가 약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밤새 남대문, 동대문 새벽 시장을 헤매고 다니고 . . .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면서 지내다가
어느 날엔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왜 이 나이에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해야하는지
나 자신에게 새상살이에게 반문을 하고 또 반문을 하었다.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시엄니와 큰 시누이한테 찾아가
그동안 시집와서 살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을 다 퍼부댔다.

하루종일 울며불며 자존심이고 뭐고간에 내가 살아야겠기에
그렇게 가슴 속에 있던 것들을 다 쏟아내었다.
처음에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시엄니와 큰시누이는
자신들을 옹호하기 바빴고

조목조목 풀어내놓으니까 나중에는 고개를 떨구고는
그렇게 마음 고생하며 사는줄은 몰랐다고 . . .
늘 밝게 웃고 다녀서 형제 중엔 제일 편하게 사는줄로 생각했다고 . . .
나중에는 미안하다고, 자신들이 그렇게 상처 주었는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고 . . .

살면서 남편한테도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늘 남편이 하고자하는대로 다 따르며 살았는데
그 후부터는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내가 하고싶은 것은 가능하면 하면서 살려고 했다.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집밖으로 가는 것 조차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
이렇다할 부부싸움 한번 제대로 안하고 다 맞추며 살았는데
처음엔 내가 싫다고, 안한다고 거절했을 때
남편은 의외의 반응에 놀라하였지만
그동안 내가 가슴앓이하는 것을 아는지라 더 이상 강요(?)는 하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가능하면 내 개인 생활을 찾았고
결혼 전부터 여행을 좋아해서 결혼 후에도 여행을 자주 다녔지만
가족여행이 아니더라도 혼자 여행도 자주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시엄니께서 5년전 아흔한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고
그 후로는 시형제들을 보지 않고 살고있다.

남편 입장에선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달리 뭐라하지 않았고
남편 회사가 안성이라 주말이나 서울에 일이 있을 때나 집에 오지만
와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산다.

그냥 나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겠다고 했다.
만약에 나를 전과 같이 구속할 생각이라면 이혼도 불사한다고 말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마음 편하게 이혼했다 생각하고 살자 했다.

늘 자기 말에 NO라는 대답 한번 하지 않고 늘 YES 만 하다가
돌변하는 나를 처음엔 믿기지 않아 놀라했지만
지금은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남편이
처음으로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서러운지 아냐고 했을때
난 자기하고 결혼한 이십 몇년 세월 내내 외로웠다고 . . .

당신은 이제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난 자기하고 사는 동안 늘 외로웠다고 . . .
내가 가끔 외롭다고 말을 했을 때 당신은 뭐라했냐?
남편있고 자식있고 부모, 형제 있는데 뭐가 외롭냐고 했지?

그렇게 기가 센 남편이 기가 좀 죽은 것 같지만
아직도 기가 세고 강한 자존심에 더 이상 말은 않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결혼 후 그런 것을 알기에 가능하면 부딪히지 않으려고 순종하며 살았다.
워낙 이집 식구들 기가 세다.보니 . . .
시엄니 부터 당신 뜻대로 안되면 옴몸이 뒤틀리고 뒤로 자빠지시고
형제들 또한 기가 세서 보통 사람들이 감당하기 버거운 사람들이다.

어찌 되었던지 간에 여자들은 의외로 가볍거나
또는 깊은 홧병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내 경험으로는 혼자 가슴에 꽁꽁 묻어놓지말고 까발리라고 말하고싶다.
세상사는거 다 거기서 거기다 생각하고
자존심? 때로는 벗어 던져버리고 나 스스로 병을 이겨내야한다.

약에 의지하면 점점 더 강도가 높은 약을 처방 받아야되고
그 약으로 인해 육신은 점점 더 황폐해진다.
까발린다고 자존심 상해할 필요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수다를 떨어라.
시엄니 흉도 보고 남편 욕도 하고 못마땅하면 시누이 시숙들 욕도 하고
친정 식구들도 흉볼거 있으면 흉보며 살아도 된다.

남들은 그런 흉, 없는 것 같지? 다 있다.
나보다 더한 흉도 있는 집들도 많을 것이다
사람 사는거 특별난 사람없다.

똑같이 밥 세끼먹고 화장실 가서 볼일보고
돈 많다고 똥 안싸고 살 수 없고 죽을 때 돈 다 싸들고 가는 사람 아무도 없다.
단지 조금 불편하지만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된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다 종이 한장 차이라고 생각해라.

난 그후로 동네 마실가면 시집식구들 흉도 보고 욕도 하고
친구들 만나도 같이 시집식구들 씹고 맞장구 치며
그렇게 풀다보니 점점 편두통도 사라지고
가슴 아프고 숨이 막히던 것도 없어지게 되었다.

홧병, 풀지 않고 그대로 가슴에 담고 살면 오래 살지 못한다.
옛 어른들 홧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말 듣지 않았나.
홧병으로 죽기도 한다는 생각하고 훌훌 털어내 놓아야 된다.

여인네들이여. 속에 응어리진 것들 수다로 풀어내라.
수다는 마음의 병을 자가 치유하는 약이다.
잘난 척 하는라 쉬쉬 숨긴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데 . . .

우리 친정 언니가 나같은 성격이 무섭다나?
늘 지지고 볶고 사는 사람들은 머리 터지게 싸우고 그래도
하루, 이틀 밤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는데
나는 냉정하게 돌변한 것 보면 무서운 성격이라네. 외유내강이랄까? ㅎㅎㅎ
아셨죠? 나 엄청 무서운 사람입니다요.. ㅎㅎㅎ

2010년 10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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