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부여 박물관 |
사비성 관람을 뒤로 하고 부여 박물관으로 이동한다.
박물관 건너 골동품상 앞의 석물들
박물관 앞 도로에 있는 비석군
백일홍
메리골드
공연장 사비마루
당유인원기공비각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호로 지정되었다.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략할 때 당나라에서 원정온 장수 유인원의 기공비로서 실질적인 당비이다. 《대동금석서》에는 유인원이 썼다고 하나, 그의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어서 누가 짓고 썼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원래 충남 부여군 부소산 중턱에 있었으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겼다.
보광사대보광선사비각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고 고려시대에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을 새긴 비이다.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박물관으로 옮겼으며 비몸돌만 남아 있다. 비문의 앞면은 건립 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새겼다.
비의 앞면 제일 윗부분에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라는 10자의 전액이 있고 비제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중창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創碑)"로 되어 있다. 비문은 원나라의 위소가 짓고 양지가 썼다.
원명은 19세에 등과하여 선문에서 수도하였으며 선원사에서 가르침을 펴오다가 1265년(고려 원종 6)에 보광사로 왔고 10년 후인 65세에 입적하였다.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무렵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선종의 유행과 함께 많이 세워졌다
조선시대 16~18세기의 문인석(논산 성동면 우곤리)
비석받침
석조불입상
석조보살입상
비석받침과 비머리(보령 성주면 성주사터)
능소화
요즘엔 패랭이 꽃의 품종이 다양하다. 야생 패랭이꽃을 엄니가 좋아하셨는데 .. .
동사리석탑은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석탑이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각면마다 3개의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위층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 모퉁이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 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석탑양식이다.
석조여래입상은 1933년에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전천왕사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크며 어깨와 하체가 거의 일직선으로 곧바로 서 있는 자세이다. 얼굴은 살이 올라 풍만하며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가 새겨져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은 아무런 무늬없이 발 밑까지 내려져 있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이 불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표현되어 있어 균형미가 부자연스럽다. 충청도 일원에서 유행했던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박물관 뜰
박물관내 휴식공간
부여석조는 보물 194호로 부여현의 동헌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工」자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태의 석조가 올려져 있다. 석조의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세로줄을 새기고 그 사이에 글을 새겨 넣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보인다.
박물관 전시실
호자는 호랑이 모양을 한 남성 소변기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호랑이의 등 부분에 손잡이가 달려있다.
배롱나무
어린이박물관
아이들 체험하는 옷인데 사이즈가 커서 나도 입어봤는데 나만 입어보자 하는게 아니란다. 다른 어른들도 많이 입어본다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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