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坡平面)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로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의 유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후 1443년(세종 25) 율곡 이이의 5대 조부인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숙함의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의 별장인 평천장(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함)의 기문 중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李珥)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석정 주변에는 몇 백년이상 된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참 많다
560년된 느티나무 높이 12m 둘레 4.5m
화석정시비
숲 속 정자에 가을 이미 늦으니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먼 물줄기는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도다.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 강는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울고가는 소리가 저녁 구름 속에 끊어지도다.
화석정 아래로 흐르는 임진강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화석정 이야기
칠흙같은 4월 어두운 밤에 의주로 몽진(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한다는 뜻)을 떠나던 길에 임진나루 화석정 아래 깎아지른 절벽 앞에 당도한 선조(조선14대 1552~1608년)가 문산 땅을 뒤돌아보며 장탄식을 하고 있다.
더구나 빗줄기는 쏟아지고 밤은 어두워 임진나루 주변이 아수라장이다 말과 사람이 뒤엉켜 절벽 아래 임진강으로 빠져 죽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때 누군가 큰소리를 쳤다.
"정자에 불을 놓아라 화석정을 불태워 강을 밝혀라."
오성 이항복 대감의 호령이 일었고 곧 정자는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칠흙같았던 임진나루 주변은 환해졌고 사공들은 황급히 노를 저어 무사히 임진강을 건너게 된다.
1592년 4월에 터진 임진왜란이지만 20여일만에 한성이 왜장 코시니에게 유린 당하게 된다. 속수무책 백성을 돌볼 틈도 없이 선조는 겨우 몸만 빠져나와 화를 면하고자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이를 예견한 이이(율곡 1536~1584년)는 여러 차례 10만의 병력을 양성하여 후일 난을 대비하자는 1"0만양병설"을 선조에게 청하였지만 번번히 묵살 당하고 말앗다.
그 후 공직에서 물러나 파주로 낙향하여 5대째 대물림하며 내려오던 임진강변 밤골 화석정에 오르내리며 후학들과 학습하고 시와 문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이선생이 별세하고 10년도 안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훗날을 예견한 이이선생께서 화석정 정자 기둥에 매년 기름기가 풍부한 송진을 발라 두었는데 이는 선조의 피난을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 셈이다.
"스승님, 왜 자꾸 기둥에 송진을 바르라고 하시는지요? 한 제자가 물었다.
"훗날 큰 일에 쓰일 것이니 잘 준비해 두거라: 라고 하셨다.
과연 살아서는 10만 병영설로 국운을 걱정하셨고 죽어서는 당신의 영혼을 화석정 기둥에 불살라 나라의 어두운 국운을 되살리는 불길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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